소설리스트

130화 (130/150)

“으음···.”

케빈 오리어리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그의 공식적인 임무는 감염의 확산 차단이었지만, 비공식적인 임무가 더 중요했다.

슈퍼 솔져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를 확보해 연구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최초 감염자의 시신을 온전하게 확보해야 했지만, 소멸돼 일부 잔해만이 남은 상태였다.

“시신의 잔해로 의미 있는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겠소?”

“뭘 원하시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린다 에반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백신이나 치료제를 원하신다면 시간은 걸릴지언정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른 걸 원하신다면 불가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일본 쪽에는 알아봤소?”

케빈 오리어리의 시선이 제임스 코플란을 향했다.

“비슷한 감염자의 발견 여부를 문의해봤습니다. 금시초문이라는 답변이 오긴 했는데, 느낌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일본으로 가야겠군. 쓸모없는 랭글리 놈들이 잘 해낼지 모르겠어.”

케빈 오리어리가 혀를 차더니 제임스 코플란에게 당부했다.

“방역 부분은 CDC에서 확실히 책임져 주시오. 감염자의 추가 발생과 확산이 없도록 말이오.”

“그 부분은 문제없지만, 통제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통제에 관해서는 홈랜드에 맡겨주시오. 이동부터 통신까지 사실상 봉쇄 수준으로 차단할 테니.”

CDC를 나선 국토안보부 장관이 CIA와 전미각성자협회 등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진행될 작전의 연합체 구성을 위해서였다.

다시금 일본이 파란에 휩싸일 조짐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

슈퍼 솔져 프로젝트에 관한 정보는 좀처럼 확보되지 않았다.

이윤성이 중국 내 휴민트를 총동원했지만,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괴담 수준의 이야기조차 들을 수 없었다.

과거 죽의 장막으로 유명했던 중국은 확실히 정보 차단에 관해서는 세계 최강이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휴민트까지 무너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냥 무턱대고 가야 하나? 그럼 재미없는데···.”

“그래도 가보는 게 좋지 않겠나. 시기를 놓치면 힘들어질 수 있네.”

“어디 가서 놈을 찾아? 신강에도 틀어박혀 있으면 찾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릴지 몰라.”

“오랜만에 중원 유람이라도 한다고 생각하세.”

그렇게 유지훈과 화무결이 기약 없는 중국 유람 길에 오르려는 찰나. 뜻하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족 자치국에 머물던 이자걸의 연락이었다.

“이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귀국할 때 되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슬슬 귀국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골치 아픈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유지훈 씨를 다시 이쪽으로 모셔야 할 수도 있는.]

“아니.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오래요. 대체 손님이 누구길래 그러는 거예요?”

[제법 영향력 있는 짱개 인사인데, 망명을 요청해 왔습니다. 짱개 놈들 수백 명이 그 양반 잡겠다고 우르르 쫓아와서···.]

“행패라고 부리고 있습니까?”

깜짝 놀라서 물었지만, 대답은 어처구니없었다.

[녀석들 먹잇감이 됐습니다. 모처럼 배불리 먹었는지, 좋다며 늘어져 자고 있습니다.]

“에잇! 끊어요! 정신 산란해 죽겠는데···.”

[끊기 전에 망명 문제는 어떻게···?]

“조호견 초인한테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임시 수반이긴 해도 공식적인 책임자잖아요.”

[그래도 유지훈 씨 찾아서 망명해온 건데 만나보셔야···.]

이자걸이 말을 끝맺기 전에 누군가 전화기를 낚아챘다.

[유지훈 초인. 나 랴오위안허요. 곤륜의 사부.]

곤륜의 사부 랴오위안허. 중국 각성자 생태계의 정점인 팔대 사부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가 망명을 신청한 것이었다.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어? 그쪽이 왜 망명을 신청했대?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 아니었어? 부주석 예우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됐소. 사정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소.]

한국으로 오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할 수 없었다.

조선족 자치국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금 중국의 추격이 시작될 테니.

그런데 초인씩이나 돼서 쫓기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지?

[중요한 인물을 보호하고 있소. 망명이 절실한 인물이오. 이자를 지키면서 피해 다니기 어려워 여기에 몸을 의탁해야 했소.]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그러는 거야? 그쪽 정도면 어지간한 군단이 몰려와도 상대할 수 있지 않아?”

[정부가 사생결단의 기세요.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재개와 관련된 인물이라···. 이쪽으로 와줄 수 없겠소?]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재개라는 말에 유지훈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필요로 하는 정보를 인물이 제 발로 걸어들어온 격이었으니.

바로 화무결과 조선족 자치국으로 향했다.

***

랴오위안허와 함께 망명을 요청한 인물은 쉬웨이칭.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연구소장이었다.

“정부에서 프로젝트의 재개를 지시했소.”

실험체에 의해 각성자 생태계가 황폐해진 상황. 중국 정부의 대응책은 맞불 작전이었다.

프로젝트를 재가동해 동일한 실험체를 만들어내는 것. 새롭게 만들어낸 실험체로 문제의 실험체를 제압하겠다는 이이제이 전술이었다.

“막무가내 짱개답네. 앞뒤 안 가리고 저지르고 보겠다는 거군.”

“맞소. 너무 위험한 생각이오. 앞서 연구를 중단하고 실험체를 폐기한 것도 제어가 불가하기 때문이었소. 그런 제어 불가의 존재를 수십 개나 더 만들겠다는 계획은 중국을 명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소.”

“그래서 망명을 요청한 거야? 우국지사인 모양이지? 그런데 지금까지 연구는 왜 했대? 앞뒤가 맞지 않는데?”

쉬웨이칭이 쓸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우국지사는 아니오. 오히려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속물이오. 하지만 신의 영역에 도전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존재를 탄생시키는 건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일이오.”

쉬웨이칭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솔직히 내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오. 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수발만 들었소. 본질에는 접근조치 하지 못했소. 할 수 없는 일을 시켜서 도망쳤다고 보는 편이 옳을 거요.”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공식적인 수장이 실은 시다바리였다고 자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주인은?

“혈마로군.”

화무결에게서 나온 대답이었다.

쉬웨이칭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귀라도 해도 무방하겠군. 신과 대등한 존재이고자 한 악의 집결체니···.”

“어떤 놈인지 자세히 좀 말해 봐. 인적사항부터 행적까지.”

“장쑤밍이라고 북부전구의 2급 상사였소. 레벨 4의 각성자라고 했는데, 이따금 초인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했다고 들었소.”

당연히 군부 고위층의 관심을 모았을 터였다.

장쑤밍은 인위적으로 개발이 가능한 능력이라 군부를 설득했고,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가동으로 이어졌다.

생명공학의 거장이자 뇌 연구 일인자의 쉬웨이칭이 휘하 연구원들을 이끌고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공식적으로는 연구소장이었다.

“나는 프로젝트에서 뇌 영역에 관해서만 의미 있는 존재였소. 나머지 모는 것을 그자가 도맡았으니. 그자의 방식을 좇을 수도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소. 과학이 아닌 주술에 가까웠으니···.”

주술.

역시 혈마는 슈퍼 솔져 프로젝트에 숨어 활강시를 만든 셈이었다.

“그쪽은 뇌 영역에서 뭘 거든 거야?”

“뇌의 활용도를 높이는 부분이었소. 내 지식으로는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는데, 그자가 견디게 만들었소. 무한 재생 능력과 일반인의 수천 배에 달하는 반사신경이 거기서 나온 것일 거요.”

“장쑤밍이라는 놈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쉬웨이칭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 살아있을 거야. 스스로 실험체가 되려고 하는 중일걸?”

“스스로 실험체가 되려 한다고 했소?”

쉬웨이칭의 눈빛에 이채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소. 주술의 재료들을 공급받은 곳. 단둥의 의료 암시장이오.”

***

전장의 형성 (1)

“오사카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일본 총리 와타나베 츠요시의 표정은 한없이 침중했다.

답이 내려진 상황에서 부질없는 질문을 던지는 상황이었다.

방위 대신 후지타 사다노리의 힘없는 대답은 그런 총리의 심경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했다.

“수습이 불가한 실정입니다. 결단을 내릴 때가 된 듯합니다.”

오사카시에서 시작된 식인 괴질이 오사카부 전역으로 확산된 상황이었다. 후생노동성 인력이 총동원돼 원인을 규명하고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확산 속도를 늦추지도 못했다.

경찰청 특수급습부대에 이어 육상자위대 병력까지 투입됐지만, 괴질의 감염자만 추가됐을 뿐이었다.

급기야 오사카부 전체를 봉쇄하고, 괴질을 잡을 대책 강구에 들어갔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급격히 늘어난 감염자가 봉쇄벽을 뚫고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막아내기에도 버거운 실정이었다.

“각성자협회에서도 대책이 없다고 합니까?”

총리의 질문에 관방장관 기시다 시게노부가 고개를 떨궜다.

“현재 일본의 각성자 전력으로는 어림없다고 합니다. 감염자들의 능력이 초인에 버금가는 수준이라···.”

한국과 대립 과정에서 일본은 초인을 모두 잃었다. 레벨 7 이상 각성자도 절반 이상 소실됐다.

한때 세계 3위를 넘보는 각성자 전력을 자랑하는 일본이었지만, 이제는 50위권도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각성자협회에 맡기면 거뜬히 처리할 괴질 사태였지만, 이제는 국가 위기로 확대될 때까지 손도 못 쓰는 형편이었다.

“야마가토의 헛된 야욕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려.”

일본 총리의 만시지탄이었다.

물론 이제 와서는 아무 소용 없는 탄식이었다.

“최후의 수단만 남은 겁니까?”

총리의 침통한 질문에 다들 외면으로 시인했지만, 한 사람만은 반발했다. 외무대신 이노우에 후미오였다.

“좀 더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국민들을 상대로 핵미사일을 투하할 순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한 사실이 알려지면 국제적인 제재를 받게 될 겁니다.”

마지막 수단은 핵미사일 투하로 오사카부의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일본에 괴질이 발발한 사실이 알려져도 제재의 대상이 되긴 마찬가지일 겁니다.”

“맞습니다. 일본 전체가 봉쇄되면 자칫 앉아서 멸망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민들도 이해할 겁니다. 오사카부 주민들의 희생은 대의를 위한 거룩한 결단으로 기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방위대신에 이어 관방장관과 경제산업대신까지 동조하자, 이노우에 후미오는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외무대신께서는 달리 방도가 있습니까? 없다면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 같습니다.”

총리의 독촉성 질문에 이노우에 후미오가 맥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우방에 원조를 요청하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이미 곤란하다고 결론짓지 않았습니까. 지난번 변종 몬스터 사건 때 미국도 지원을 거절한 바 있고. 만일 사정을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하면 괴질 창궐만 알리는 격이 될 겁니다.”

“그래도 핵미사일을 투하하기에 앞서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오사카부 주민들에 대한 도리라고 여겨집니다.”

“흐음···.”

와타나베 츠요시가 침음을 흘렸다.

“변종 몬스터 사건 때 한국에게 지급하기로 한 보상금이 2000억 달러입니다. 1000억 달러가 채무로 남아있습니다. 어떤 우방이든 거저 도울 리는 없겠지요. 감당할 처지가 안 되는 게 현실입니다.”

총리는 핵미사일 투하로 결심을 굳힌 눈치였다.

내각 인사들을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동의를 구하는 모습이었다.

다들 침묵으로 동의하는 양상이었다. 이번에는 외무대신도 반대 의사를 접은 듯 눈을 감아버렸다.

그때 누군가 다급하게 회의 석상으로 들어왔다. 외무대신에게 가더니 귀엣말을 했다.

외무대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밝아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됐습니다! 해결됐어요! 미국에서 돕겠다고 합니다.”

총리를 비롯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외무대신을 바라봤다.

이노우에 후미오는 시선은 의식하지 않은 채 환희에 겨운 표정으로 외칠 뿐이었다.

“전미각성자협회에서 대규모 전력을 파견한다고 합니다. 랭글리와 홈랜드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하겠다는 소식입니다.”

한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한편으로 의아했다.

“미국에서 우리 사정을 어떻게 알고···.”

“설마 외무대신께서 식인 괴질에 대해 알리기라도 하셨습니까?”

그제야 이노우에 후미오도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렇진 않은데···.”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면한 국가 위기를 해결할 수 있게 됐는데. 당장은 이유보다 결과에 집중해야 할 상황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괴질부터 잡아야지요. 나머지는 그다음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다들 동의했다.

당장은 오사카부 주민들에게 핵미사일을 때려 박지 않아도 되는 점에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

랴오닝성 단둥시. 자정을 막 지날 무렵, 압록강 북단의 허름한 숙박업소 건물에서 세 남녀가 걸어 나왔다.

숙박업소에 들어가야 마땅할 시간에 나서는 장면은 이상하다면 이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당장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건달 무리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장 영감. 이 밤중에 꼬맹이들 데리고 어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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