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따져봐도 CIA의 동아시아 인력이 궤멸에 가깝게 당했을 텐데요. 물론 그중에 저랑 상관없는 일도 있지만요. 미국에서 별다른 항의도 없었다니 이상한데요?”
“중국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실험체를 확보하려다 벌어진 일이니 언급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군요.”
이윤성이 명쾌하게 분석했다.
“프로젝트 자체가 비인도적인데, 미국은 한술 더 떠서 남의 나라 연구 결과를 탐냈으니까요. 세계적인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겁니다.”
“혹시 뭐라고 지랄하면 알려 주세요. 제 선에서 해결할게요. 양키 놈들한테도 나를 도발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알려줘야죠.”
“하하하. 미국 쪽에 입 다물고 있으라고 경고라고 해야겠군요.”
유쾌하게 웃던 이윤성이 뭔가 떠오른 듯 눈매를 좁혔다.
“그러고 보니 미국 쪽 사정이 썩 좋지 않은 징후가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요.”
“어떤 징후인데요?”
“LA 쪽에서 큰 사건이 있는 듯합니다. 도시 봉쇄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출입 통제로 끝나긴 했지만···.”
“무슨 일 때문이랍니까? 괴질이라도 돌았답니까?”
“LA 쪽과 연락이 여의치 않아서 정확하게 파악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소문에 따르면 식인 사건이 있었던 듯합니다.”
“식인 사건이요?”
유지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흡혈귀에 식인이라니. 소식들이 하나같이 엽기적인 괴담이네요.”
“하하하. 그렇게 됐군요.”
“어쨌거나 그런 부분 덕분에 미국이 저랑 얽힌 CIA 문제에 크게 신경 쓰기 힘들 거란 말씀이시죠?”
“그런 추측도 가능합니다.”
“재미있네요. 조용하게 넘어가면 서로한테 좋기도 하고요.”
유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윤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보 조직 수장들 회의가 있어서요. 요청하신 정보에 관해서도 추가적인 내용이 거론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 있으면 알려주세요. 특히 슈퍼 솔져 프로젝트 관련해서요. 흡혈귀 소식도 좋고요.”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윤성이 떠났다.
정보를 정리해 분석할 시간이었다. 화무결과 함께.
“혈마가 흡혈도 하나?”
“들어본 적은 없네만. 안 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네.”
“흡혈로 아수라혈염기의 화후를 높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아? 흡혈은 대체로 한기를 다스리는 목적일 테니.”
“맞는 말일세.”
화무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늙어졌다가 젊어졌다가를 반복했다면, 분명 저쪽에서 넘어온 자가 맞을 걸세. 하지만 흡혈로 젊어지진 않았을 거야. 아수라혈염기로 노화를 제어한 결과이지 싶네.”
“흡혈귀 괴담은 왜 나온 걸까?”
“자네도 상대해 봤듯이 아수라혈염기를 운용하면 눈이 핏빛이 되고 전신에 혈기가 감돌게 되네. 누군가 그 장면을 목격한 게 아닌가 싶군. 전신에 피칠갑을 한 모양새였을 테니 흡혈귀로 오해할 만하지.”
“어찌 됐건 혈마가 21세기로 넘어와 북부전구에 숨어들었다는 가정이 성립되는 거네.”
유지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북부전구의 비밀 프로젝트와 사라진 강화 계열 각성자 장병들까지. 혈마가 슈퍼 솔져 프로젝트에 관여한 것도 사실이라 봐야 할 테고.”
“그렇게 유추하는 것이 타당하겠지.”
“지금 혈마는 실험체와 함께 있을 텐데, 현재 중국 각성자 전력으로는 놈들을 어쩌지 못할 처지인 것 같고···.”
물론 각성자가 아니고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개인용 중화기로는 어쩔 수 없겠지만, 대량 살상 화기를 동원하면 이론상 처치는 가능하다. 이를테면 핵미사일이나 소이탄을 때려 박는 방법. 다만 혈마에게 통할지는 미지수다.
혈마 정도의 신출귀몰한 능력자면 대량 살상 화기를 때려 박을 위치 잡기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폭격이 가해지는 동안 유유히 타깃 지역을 벗어날 여지도 충분하다.
온 나라를 포화에 몰아넣어 초토화하고도 정작 혈마는 무사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의미다.
중국 정부가 그 정도를 모르진 않을 터. 결국 초인을 비롯한 고레벨 각성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 중국의 각성자 전력으로는 어림없다는 게 유지훈의 분석이었다.
“어쩔 텐가? 자네가 내키지 않으면 나라도 가볼까 싶네만.”
21세기로 넘어와서도 화무결에겐 협객의 기질이 남아 있었다.
무림의 중원과 현재 중국이 일맥상통하는 지역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테고. 어떤 의미에선 현재 중국인들은 화무결의 후손이라고 해도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닐 테니.
“너 혼자 가긴 어딜 가. 혈마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뒤지다 보면 나오지 않겠나. 뭔가 엄청난 일을 도모하려고 할 텐데, 숨어 있지만은 않겠지.”
“그래도 너 혼자 간다고 될 일 아니야. 가도 같이 가.”
“자네도 갈 텐가?”
화무결이 반색했다.
유지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어쩌겠냐. 중국이 끝장나면 우리나라도 편치 않을 텐데.”
“뭔가 생기는 것 없을지도 모르는데?”
“전적으로 공짜로는 곤란하지. 적당히 얻어낼 방법을 찾아봐야지.”
유지훈이 옅은 미소로 화무결을 바라봤다.
“여긴 무림과 달라. 협(俠)이 사치인 시대이자 공간이야. 개인의 행복이 집단의 명분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해야 한다고.”
“알고 있네.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개인이 행복할 수 있도록 주어진 능력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
“멍청아! 그게 바로 협이잖아.”
유지훈의 질책에도 화무결은 허허롭게 웃기만 했다.
“개인의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겐 그게 행복일세.”
“나 참. 천마한테 처맞고 죽어가는 놈 살려놨더니 온갖 똥폼만 다 잡고···. 이래서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그래도 자네가 뭔가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네.”
“됐어. 내 건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너는 네 안위나 잘 챙겨.”
유지훈이 입을 비쭉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려는가?”
“미쳤냐? 밑도 끝도 없이 무턱대고 가게. 여기가 무림이랑 다른 가장 중요한 대목이 정보의 시대라는 점이야. 가더라도 가능한 많은 정보를 확보해서 가든지 해야지.”
***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CDC(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질병통제예방센터) 본부.
국장 제임스 코플란의 사무실에 근엄한 인상의 노신사가 찾아왔다. 위압적인 분위기의 수행원 다섯을 거느린 채였다.
“코플란 국장. 오랜만이오.”
“아! 장관님.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임스 코플란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상 밖의 인물이 등장한 탓이었다.
국토안보부 장관 케빈 오리어리. 워싱턴 D.C.에 있어야 할 미국 안보의 총책임자가 몸소 애틀랜타까지 찾아왔다.
긴급한 정보를 전달하고 협조를 요청했는데, 실무 책임자가 아닌 장관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
“미국 안보에 보통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서 대통령님께서 내게 손수 챙기라고 당부하셨소.”
“그렇군요. 비밀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같이 오신 분들은···.”
비밀 회의실은 조직의 책임자급 인사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장관 수행원들을 배제해달라는 눈치로 말을 꺼냈지만.
“실무 책임자들이오. 같이 참석하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 함께 가도록 하시죠.”
원탁에 10개 남짓의 의자가 놓인 회의실에 당도했다.
방음과 통신 보안이 철저하게 갖춰진 공간. 회의 내용은 참석자 외에 누구도 알 수 없는 폐쇄된 회의실이었다.
장관과 수행원이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빔프로젝터를 작동해 화면을 띄웠다.
“조사를 총지휘한 수석 연구원 린다 에반스 박사입니다.”
제임스 코플란의 소개에 이어 린다 에반스가 사건 전반에 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LA에서 발견된 식인 사건에 대한 보고였다.
“감염자는 총 마흔두 명으로 파악됐습니다. 일반인 넷과 군인 서른여덟. 감염자에 의한 희생자가 새로운 감염자가 된 양상입니다.”
“식인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소? 식인을 당했으면 죽었을 텐데.”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 상처까지 모두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좀비 같은 존재가 된 거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국토안보부 장관 케빈 오리어리가 수긍하는 듯한 태도로 질문을 이어갔다.
린다 에반스가 화면 두 개를 동시에 띄우며 설명했다.
“좀비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보시다시피 멀쩡한 사람의 형태입니다. 피투성이긴 하지만 말끔하게 치유된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행동 양태도 이지를 지닌 양상입니다.”
“그 의미는?”
“무한 재생 능력을 지닌 식인 괴물의 탄생입니다.”
케빈 오리어리가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감염자들에 대한 조치는 어디까지 진행됐소?”
“군용 화기로는 제압할 수 없어서 각성자협회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초인 세 분 포함해 서른 명의 각성자가 투입돼 전원 제거했습니다.”
“혹시 생포는 불가능했소?”
“그렇습니다.”
린다 에반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 분들께 한 개체라도 생포를 부탁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로버트 미첨 초인님의 특성 헬파이어로 소멸시키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연구 자료는 확보했소?”
“잔해를 수거하긴 했습니다. 자료로서 가치는 확인 중입니다.”
“으음. 가치가 있어야 할 텐데···.”
케빈 오리어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린다 에반스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새로운 화면을 띄웠다. 멀끔한 인상의 동양인이었다.
“역학 조사 결과 최초 감염자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요?”
“일본 오사카대학의 조교수 가와노 유키오입니다.”
예기치 않은 단서
“최초 감염자가 일본인이라고? 중국인이 아니고?”
국토안보부 장관 케빈 오리어리의 당혹스러운 반응에 린다 에반스는 신념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모든 시뮬레이션을 거친 역학 조사 결과입니다. 한 달 전 LA 공항을 통해 입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케빈 오리어리가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CDC 국장 제임스 코플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초 감염자를 중국인이라고 예상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확신이라도 하셨던 것 같은 눈치였는데요.”
“흐음···.”
케빈 오리어리는 대답 대신 침음만 흘렸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제임스 코플란이 다그치듯 다소 언성을 높였다.
“감염자 마흔두 명 중 중국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장관님께서 최초 감염자를 중국으로 확신하신 듯했습니다.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협조를 원하시면···.”
“코플란 국장! 지금 선을 넘고 있소!”
케빈 오리어리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제임스 코플란은 기세를 굽히지 않았다.
“저는 장관님의 하급자가 아닙니다! 협조를 원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희는 여기서 국토안보부와 공조를 중단하겠습니다.”
제임스 코플란이 린다 에반스에게 눈짓했다.
린다 에반스가 상관의 의중을 눈치채고 빔프로젝터를 껐다. 자료를 챙겨 회의실을 나서려 했다.
그제야 케빈 오리어리가 쓴웃음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좋소. 말씀드리지. 대신 이 회의실 밖의 누구도 몰라야 하는 사실이오. CDC 내에선 국장과 박사 둘만이 아는 사실이어야 한단 말이오.”
제임스 코플란과 린다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 오리어리의 설명이 시작됐다.
“중국에서 비밀리에 진행한 연구가 있소. 가칭 슈퍼 솔져 프로젝트. 인위적으로 초인을 만드는 프로젝트요.”
“초인이라 하면 각성자를 의미하는···?”
“각성까지는 아닐 거요. 각성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니. 대신 신체 능력에 있어서 초인에 버금가는 존재일 거요. 근력, 지구력, 순발력, 반사신경 그리고 재생 능력까지.”
“일반 병사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로···?”
“정확한 건 알 수 없소. 랭글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근력과 지구력은 1만 배 정도, 순발력과 반사신경은 5천 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소. 재생 능력은 사실상 무한이고.”
“아···.”
제임스 코플란과 린다 에반스에게서 동시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케빈 오리어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중국이 프로젝트를 중단했소. 실험체를 폐기하기에 이르렀소.”
“그럼 장관님께서 생각하신 것은···.”
“폐기되지 않은 실험체들이 있다는 정보 또한 입수됐소. 랭글리에서 확보하려고 공작을 펼치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오.”
케빈 오리어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LA에서 비슷한 능력을 보유한 존재가 발견됐다고 했소. 감염자라고 했지만, 실험체라 의심할 만한 여지가 충분했소.”
“그래서 최초 감염자를 중국인이라 여기셨군요.”
“그렇소. 그럼 최초 감염자에 대한 브리핑을 계속해주시오.”
케빈 오리어리의 시선이 빔프로젝터에 의해 띄워진 화면으로 향했다. 어느새 다시 작동한 화면에는 유약해 보이는 동양인이 있었다.
린다 에반스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가와노 유키오. 36세. 오사카대학 심리학과 조교수입니다. 3주 전 LA에서 개최된 임상심리학회 세미나 참석을 위해 입국했습니다.”
새로운 화면으로 바뀌었다.
가와노 유키오의 LA 내 행적을 추적한 화면이었다.
“예약된 항공편에 따르면 세미나 참석 이틀 뒤 출국 예정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출국을 미루고 LA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지역 갱단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결과는 보시다시피입니다.”
150명 갱단 조직원이 몰살당했다.
가와노 유키오도 수십 군데 총상을 입었지만, 이내 멀쩡하게 회복돼 활극을 이어갔다.
“이때까지는 식인 행태는 없었습니다. 이후 특공대가 투입돼 제압하는 과정에서부터 식인 행태가 나타났습니다.”
“식인의 피해자들이 감염자가 된 것이군. 혹시 가와노 교수가 실험체일 가능성은 없소? 일본에서 비밀리에 진행한 연구의···.”
“랭글리의 협조를 구해 가와노 교수의 일본 내 행적도 추적해봤습니다. 실험체를 가능성은 극히 작습니다. 다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험의 대상이 됐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