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50)

조호견은 초인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공산주의 국가 출신답게 자본주의 경제 인사를 폄훼하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유지훈이 있는 동안은 당연히 협조적이었겠지만, 자리를 비웠을 때는 본색을 드러내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을지 걱정됐다.

“조호견 초인 사람 참 시원시원하던데요? 자본주의를 동경했던 모양이에요. 협조 요청하면 오히려 그걸로 되겠냐고···.”

조호견은 자치국 정부 임시 수반이었다.

자치국은 민주 공화제를 채택하기로 했다. 초대 정부 수반은 선거로 뽑기로 했다. 선거를 치를 때까지 조호견이 임시로 정부를 맡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서넛 정도 출마를 준비하는 것 같은데요. 조호견 초인이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입니다.”

“그렇겠죠. 여기까지 오게 한 게 그 양반 공로인데요.”

“그보다도 유지훈 씨랑 친한 덕분이라고 봐야겠죠. 사실상 나라 세운 게 다 유지훈 씨 작품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조호견은 영리하고 전략적이었다.

유지훈과 관계가 국가 건립까지라면 이자걸과 관계는 미래의 방위와 직결된 문제였다.

이자걸은 백만대군에 버금가는 거대 왕도마뱀 몬스터 군단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이니. 게다가 자치국 경제의 아버지 격이고.

“이제 여긴 내가 없어도 되겠네요.”

“귀국하시려는 겁니까?”

“가봐야죠. 강 국장도 여기보다는 돌아가서 쉬는 게 좋을 테고요.”

공식적인 대화라는 생각 때문인지 강 국장이라는 호칭을 쓰게 됐다. 뭔가 살짝 감추려는 의도가 포함된 걸까.

속내를 읽은 듯 이자걸이 빙긋 웃었다.

“신화의료원 VIP 병실 준비하라고 조치해 뒀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는 말씀하세요.”

“신화의료원이요? 전자만 남겨두고 다 매각한 거 아니었습니까?”

“신화의료원은 매각에 실패했습니다. 영리를 추구하는 병원이 아니다 보니 탐내는 곳이 없네요. 그냥 신화전자에서 지원하면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떠날 순간이 찾아왔다.

화무결 강은영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자걸과 이나연은 당분간 남아 자치국의 경제와 방위 문제를 좀 더 돌보기로 했다.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서려는 찰나, 조호견이 찾아왔다.

“바쁠 텐데 뭐하러 왔어? 들렀다 간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소. 그런데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왔소.”

“반갑지 않은 손님?”

“미국인들이오. 신원을 밝히진 않았지만, 정부 관료 같았소.”

조호견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정부 수반은 나라고 해도 굳이 유지훈 초인만을 찾고 있소. 만나고 싶지 않으면 무시하고 가시오. 내가 상대하겠소.”

“정부 관료라···.”

유지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집단이 있었다.

미친 마녀 린제이 탐슨을 만났을 때 주위에 있던 이들 가운데 CIA 요원들이 있었던 점에 생각이 미쳤다.

“가실 거면 여기서 작별 인사를 나누면 될 것이오. 인사차 찾아온 목적도 있소.”

“아니야. 만나볼게. 안 그래도 궁금한 게 있었어.”

찾아온 자들이 CIA 소속이라면 중국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실험체 문제를 거론할 터였다.

정보에 관해선 세계 최강인 CIA가 확보한 슈퍼 솔져 프로젝트 정보를 들어보고 싶었다.

조호견과 함께 정부 청사로 향했다.

잘 차려입은 미국인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지훈 씨. 반갑습니다. CIA 공작국 톰 슐츠 부국장입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악수를 청해왔다.

유지훈은 손을 잡으며 나머지 두 사내를 둘러봤다.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와 음침한 분위기의 사내. 톰 슐츠의 수하들로 보였다. 말없이 유지훈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톰 슐츠가 너털웃음으로 전환하려 했다.

“하하하. 공작국 요원은 신분을 밝힐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제가 규정을 어기고 신분을 드러내니 요원들이 불편한 모양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신분을 밝힐 수 없다면 흑색 작전 같은 데에 많이 투입되는 모양이군요? 흔히들 구린내가 진동하는 작전 같은 거요.”

유지훈이 비아냥대자 두 요원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톰 슐츠는 느물느물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아시는군요. 잘 됐습니다. 이야기하기 한결 편할 것 같습니다. 그 구린내 나는 작전 때문에 유지훈 씨를 찾아왔습니다.”

“중국의 슈퍼 솔져 프로젝트랑 관계있는 거겠죠?”

톰 슐츠가 빙긋 웃었다. 긍정의 웃음이었다.

“너무 잘 아시니 긴 대화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아는 건 여기까지가 다예요. 그럼 용건을 말씀해보시죠. 나를 왜 찾아오셨죠?”

톰 슐츠가 다시금 빙긋 웃더니 표정을 살짝 굳혔다.

“최근에 중국 옌타이시에서 저희 요원 셋이 희생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몹시 위중하게 보는···.”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유지훈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톰 슐츠가 혀를 차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일이라고는 안 하시는군요. 저희도 다각도로 확인을 마쳤습니다. 유지훈 씨가 그 무렵 옌타이시를 방문했다는 것을요.”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 문제 때문이라면 가봐야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거든요.”

유지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똑바로 말해. 다 알고 왔어.”

“뭐?”

유지훈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보다가 톰 슐츠를 돌아봤다.

“CIA에서는 요원들 머리에다가 무슨 짓 합니까?”

“네? 그게 무슨···?”

“뇌에 무슨 조작 같은 거 하냐고요? 겁대가리를 상실하게요.”

유지훈의 시선이 다시 사내를 향했다.

“내가 가만히 손만 뻗어도 이 새끼 대가리 사라져요. 도발하는 꼴이 대가리 으깨달라는 것 같은데요? 겁대가리를 상실하지 않고는···.”

“이 자식이!”

사내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려는 찰나, 톰 슐츠가 나서 만류했다.

“물러서게. 대화는 내가 진행한다고 했네.”

“부국장님!”

“싸우러 온 거 아닐세. 협의하러 온 걸세.”

톰 슐츠가 눈을 부릅뜨자, 마지못한 듯 사내가 물러섰다.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적절한 순간에 들어오셨어요. 저 새끼 총 뽑았으면 허리를 반으로 갈라버리려고 했거든요.”

“유지훈 씨도 지나친 언사는 삼가···.”

“셋 다요. 한꺼번에. 내가 시간이 없어서.”

중간에 치고 들어간 유지훈의 한 마디에 톰 슐츠가 데꿀멍이 됐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꺼냈다.

“유지훈 씨가 저희 장비를 강탈한 사실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강탈? 이거 말인가? 부서질까 봐 보관해둔 건데. 별 쓸모도 없는 물건을 강탈할 게 뭐 있어.”

유지훈이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톰 슐츠에게 던졌다.

받아든 톰 슐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 작전에 협조하십시오. 그럼 지금까지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협조?”

“실험체 확보 그리고 중국 내 작전의 순조로운 마무리입니다.”

유지훈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걸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유지훈 씨로 인해 입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건 다 너희가 나를 도발했기 때문이잖아. 나는 누가 도발해오면 가만히 안 둬. 처절하게 응징해.”

유지훈이 조금 전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흘깃 쳐다봤다.

“조금 전 도발을 참아준 게 후회되기 시작하는데? 이제라도 자근자근 밟아줘?”

“유지훈 씨가 대단한 능력을 지닌 거 우리도 모르지 않습니다.”

톰 슐츠가 조금은 격해진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생각하며 언행을 해야 할 겁니다. 유지훈 씨의 이런 언사가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그 입 다물라.”

유지훈이 비릿하게 웃었다.

웃음 이면의 시선은 싸늘했다.

톰 슐츠를 비롯한 CIA 요원들이 숨도 크게 못 쉴 정도의 위압감을 안겨주는 눈빛이었다.

“너희들은 한미 관계 생각해서 일본에 올인했나? 일본이 한국 집어삼키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거야?”

“그, 그건···.”

“그리고 미친 마녀인지 앞세워서 남의 여자 납치한 건 어떻게 설명할래? 생매장해놓고 협박한 건 한미 관계 생각한 거였어?”

“그 부분은 전적으로 다크 디멘션의···.”

“지랄하고 있네. 미친 마녀가 갖고 있던 단말기 너희 장비라며? 생각 좀 하고 말해.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녀?”

그때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벼락같이 권총을 뽑아 들었다.

“건방진 놈! 죽여버리겠다!”

탕! 탕! 탕!

연달아 세 발의 총성이 울렸고, 유지훈의 가슴을 관통했다.

몽글몽글 피가 샘솟았다. 이내 멈췄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네놈 몸뚱이엔 총알이 안 박히냐? 건방진 옐로 몽키 같으니···.”

사내가 권총을 허리춤에 갈무리하려는 찰나, 싸늘한 묵빛 기운이 그의 전면을 스치듯 지나갔다.

서걱!

뭔가 썰리는 소리와 함께 눈에 들어온 장면은 자루만 남은 권총이었다. 총신이 깨끗하게 잘려나간.

“젠장. 허리를 잘라버린다고 했는데, 애꿎은 권총을 베었네.”

유지훈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가슴을 내려다보고는 툭툭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총알이 안 박히냐고? 응. 안 박혔는데? 그건 그렇고 약속은 지켜야겠지. 궁금한 것 같아서 대답만 해준 거였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빛 기운이 사내의 허리를 갈라갔다.

쐐액!

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스치듯 지나갈 뿐이었다.

“이, 이게 무슨···.”

사내가 눈을 껌뻑였다. 몹시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세 번쯤 껌뻑일 때 기우뚱하더니 허리 위 몸이 분리돼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후에도 한동안 애처로운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북부전구의 괴담

약속을 지켰다.

총을 뽑으면 허리를 잘라버리겠다는 약속.

그나마 많이 양보했다.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놔뒀다. 기회를 준 셈이었다.

셋 다 자르지도 않았다. 일단 둘은 봐줬다.

그래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약속을 지킬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뭘 그렇게 놀라? 말했잖아. 도발은 처절하게 응징한다고.”

그제야 톰 슐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 여기고 안도한 듯했다.

그래도 여전히 정신은 못 차린 눈치였다.

“유지훈 씨가 우리 요원을 살해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큰 악영향을 초래할 것입니다.”

“뭐래? 여태 뭘 듣고, 뭘 본 거야?”

“제 눈으로 똑똑히 본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톰 슐츠가 겁먹은 기색으로도 애써 의연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분명 우리 요원은 유지훈 씨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위에서 알면 보복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

“나 참···. CIA 요원 되면 대가리부터 어떻게 하는 모양이네.”

“그러니 협조하십시오. 그럼 모든 걸 불문에 부칠 수 있습니다.”

“야!”

유지훈이 삐딱한 시선으로 톰 슐츠를 쳐다봤다.

“너 머리만 폼으로 달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눈도 폼이었구나?”

“유지훈 씨! 모욕적인 언사는 삼가십시오!”

“닥쳐! 나한테 모욕감을 준 건 너희들이야.”

유지훈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총알이 뚫고 들어간 흔적과 함께 핏자국이 진하게 번져 있었다.

“나한테 총알을 세 발이나 갈겼잖아. 몸뚱이에 총알 박혔다고 시시덕거리면서 옐로 몽키 타령까지 하고. 그런데 살려둬야 해?”

“그, 그건···.”

“머리랑 눈뿐만 아니라 귀까지 장식이었구나?”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그건 네 사정이고. 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야. 나한테 총질한 놈을 응징한 거라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죽일 것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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