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결이 침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하려는 찰나, 유지훈이 앞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너는 혈마의 실체를 본 적 있어? 나는 무림에 있는 50년 동안 들어본 적도 거의 없는데.”
“나도 실체는 본 적 없네. 나보다 20년은 앞선 시대 인물이라···.”
화무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배들을 통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당대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강자라고 했지. 아수라혈염기의 연성을 위해 폐관에 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주화입마에 빠져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던가?”
“그게 정설처럼 들려오긴 했지만, 다른 소문도 있었네.”
“뭔데?”
유지훈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화무결이 씁쓰레한 표정으로 답했다.
“폐관한 암동에서 의문의 폭발이 있었고, 혈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문일세. 주화입마로 인한 폭발이었을 거라고···.”
“주화입마로 인한 폭발이라···. 그게 언제였지?”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화무결이 미간을 좁히며 과거를 거슬렀다.
“내가 약관이던 무렵인 것 같군. 그러니까 50년 전쯤?”
“50년 전쯤이라고? 그럼···?”
“그래! 자네가 무림으로 넘어올 무렵이랑 얼추 비슷할 것 같네. 맞아. 자네가 오고 두어 달 지나서 들은 듯해.”
“으음···.”
이번엔 유지훈이 침음을 흘렸다.
“등가교환의 법칙인가···.”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그쪽으로 넘어갔으니, 그쪽에서도 누군가 이쪽으로 넘어왔을 수도 있다는 의미야. 그게 혈마일 수도 있다는···.”
화무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혈마가 여기 와 있는 게 신의 섭리라는 뜻인가?”
“신의 섭리라기보다 인과율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
유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가?”
“노화의 속도. 그쪽 사람이 이쪽으로 넘어오면 노화가 열 배는 빨라져. 5년이 흘렀으니 50년이 늙었다는 의미야. 너보다 스무 살쯤 많다고 했으니 지금 아흔 살이어야 해. 오늘내일해야 한다고.”
“내공으로 어느 정도 노화를 늦출 수 있네.”
화무결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사실 나도 넘어오는 과정에서 환골탈태하긴 했지만, 노화는 저쪽에서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네. 내공으로 어느 정도 억제하고 있지.”
“얼마나 억제 가능한 거야?”
“내공의 삼 할 정도를 사용하니 세 배 속도 정도? 만일 내공을 전부 노화 억제에 쏟아붓는다면 같은 속도도 가능할 걸세.”
유지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 정도 설명은 되는군. 그래도 미봉책에 불과해. 뭔가 방법을 찾아내려 했을 거야.”
“안 그래도 떠오른 생각이 있긴 했네. 이쪽이랑 연관되는 것까진 생각지 못했지만.”
화무결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실험체라는 것 말일세. 혈교의 술법으로 만들어지는 활강시가 아닐까 생각해봤네.”
“활강시?”
“말 그대로 살아있는 강시일세. 죽었지만 죽지 않은 존재인 동시에 죽일 수 없는 존재. 초절정 고수를 능가하는 무위를 지닌 데다가 재생 능력까지 지닌 무시무시한 놈이라네.”
“흐음. 혈교의 술법에 현대 과학을 더해 만들어낸 실험체라···.”
“만일 혈마가 실험체와 관련돼 있다면, 혹시 실험체를 통해 활강시를 스스로에게 적용할 계책을 꾸미고 있다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그렇군. 업그레이드된 혈마가 21세기에 재림하면···. 몬스터 못지않은 격변을 초래할 수도 있겠어.”
유지훈이 눈매를 찡그렸다.
혈마가 두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어차피 혈마의 아수라혈염기는 내공의 영역이었기에 소멸기와 반사기로 상대 가능했다. 재생 능력과 심검이 더해지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존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활강시는 문제일 수 있었다.
내공의 영역과 관계없는 존재이기에 소멸기와 반사기가 무용할 가능성이 컸다. 심검으로 벤다고 해도 재생 능력으로 회복한다면···.
유지훈에겐 상극의 상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만일 혈마가 활강시를 대거 만들어 군단을 형성한다면?
스스로에게 적용한 활강시의 공능이 혈마의 아수라혈염기를 내공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유지훈보다 우위에 선 능력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화무결과 협공에 나선다고 해도···. 어쩌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동원해야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일이 간단치 않겠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혹시 추적할 수 있겠어?”
화무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재로선 불가능하네.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네.”
“흐음. 추적기도 작동하지 않으니, 방법은 슈퍼 솔져 프로젝트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중국 정부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을 돕게 되는데, 도움을 청해야 하는 기괴한 상황인 셈이었다.
“일단 철수하자.”
“철수하자고? 안 쫓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아쉬울 건 없잖아. 짱개 놈들 땅이 초토화되든 말든. 아쉬운 쪽에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때 움직이든지 해야지.”
“허허허. 자네답군. 그래도 혈마랑 활강시는···.”
화무결의 우려에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전에 말했잖아. 인류 평화나 수호에는 관심 없어. 나랑 내 주위 사람들의 행복이 최우선이야. 인류 수호 같은 건 그 연장 선상에서.”
“그러니까 대가 없는 노고는 없다는 말이로군.”
“바로 그거야. 혈마건, 활강시건 처치하려면 죽을 고생을 해야 할 텐데, 공짜로 할 순 없지 않겠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하는 집단의 명분은 없다는 뜻이겠지. 여기 와서 자네한테 많은 걸 배우네.”
“그러니까 빨리 가자. 은영 기다리겠다.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데.”
“드디어 자네가 내자를 챙기기 시작하는군.”
화무결이 흐뭇하게 웃었다.
유지훈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빙긋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어이! 영감. 우리를 데리고 어디로 가는 거지?”
실험체 청년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질문 상대는 노인이었다. 굽은 허리에 주름투성이 얼굴,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늙은.
청년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노인에게 호되게 당하기라도 한 듯했다.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하거라. 저 아이는 조용히 잘 따라오는데, 네 녀석은 왜 이리 말이 많은 게냐?”
노인, 혈마 사마염이 실험체 여인을 흘낏 쳐다봤다.
말없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청년은 여전히 투덜거렸다.
“어디 가서 뭘 하려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보아하니 우리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나는 지시를 내리고, 너희는 따르면 되는 거다.”
“영감이 우리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그건 아니지. 그럼 재미없어. 우리도 가만히 못 있지.”
청년이 짐짓 우악스러운 표정으로 위협하려 하자, 노인이 가만히 걸음을 멈춰섰다. 빙긋 웃더니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이라도 외우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청년이 머리를 감싸 쥐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악!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따라가면 될 거 아냐!”
실험체 여인 또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비명 대신 이를 악물었다. 참다못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대상은 노인이 아닌 실험체 청년이었다.
“씨발아! 닥치지 못해. 몇 번 당했으면 됐지. 왜 자꾸 지랄이야! 그냥 조용히 따라가자고!”
노인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미안하구나. 나이를 먹었더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한 놈한테만 언령을 작동시키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아아악! 어르신. 뭔지 모르지만 빨리 좀 생각해내세요. 애먼 저까지 대가리 터지게 하지 마시고요.”
노인이 빙긋 웃더니 다시금 중얼중얼 주문을 읊조렸다.
실험체 남녀가 긴 한숨과 함께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이씨. 이게 뭐야. 동료 있는 줄 알고 왔더니, 이상한 영감탱이가 괴상한 소리나 씨부리고···.”
“그 괴상한 소리가 너희들 명줄이라 할 수 있다. 기껏 잘 만들어놓은 놈들 내 손으로 없애긴 싫으니 군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라.”
노인이 앞장섰고, 실험체 남녀가 뒤를 따랐다.
한결 공손해진 태도였다. 할아버지가 고향 집을 찾은 손주들을 데리고 마실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허름한 4층 건물이었다.
입구에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들이 경계를 서듯 모여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선 노인이 말을 꺼냈다.
“이곳이다. 너희들은 여기서 내가 하려는 일을 마칠 때까지 지시를 따르면 된다.”
“뭘 시킬 건데?”
청년의 질문에 노인은 답하지 않았다. 하던 말을 이어갔다.
“순조롭게 일을 마치면 너희들에겐 자유가 주어질 것이다. 원하는 곳으로 가서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되고, 계속 나를 따라도 된다.”
“괴상한 주문에서 해방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래. 언령을 풀어주도록 하마. 대신 일을 마칠 때까지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거역하면, 그 잘 생긴 대가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야.”
“알았어. 말 잘 들을게. 뭐부터 하면 돼?”
노인은 대답 대신 앞장서 걸었다. 입구로 향했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인을 맞이했다.
“장 박사 오셨네? 뒤에 애들은 뭐야? 작업할 애들인가?”
“쓸 만한데! 눈알부터 장기까지 버릴 것 하나 없겠어.”
“여자아이는 우리가 좀 데리고 놀다가 작업하면 안 될까?”
무표정하게 사내들을 지나쳐간 노인이 뒤를 돌아봤다. 실험체 남녀에게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눈에 띄는 생명체는 모두 지워버리도록.”
청년이 우악스럽게 손을 휘저었고, 여인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입구를 지키던 사내의 머리가 뽑혔고, 재가 돼 사라졌다.
***
적반하장에 대처하는 방법
조선족 자치국은 빠르게 구색을 갖춰갔다.
천재 소시오패스 이자걸의 합류가 여러모로 속도를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로 작용했다. 신화전자의 각종 사업체가 자치국에 지사를 설립했고, 가전 기기 공장 건립도 급물살을 탔다.
내친김에 이자걸은 반도체 공장 설립 계획까지 발표했다.
이전에 이나연이 진행한 물류 기지와 산업 단지 조성에 이어 사업체와 공장 건립까지. 자치국은 어느 정도 경제적 자립을 이루게 됐다.
“녀석들은 잘 있습니까?”
녀석들. 조선족 자치국에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백만대군을 능가하는 위세로 방위를 책임지는 존재들이었으니.
“너무 잘 지내서 탈입니다.”
이자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두 녀석이 알을 낳기까지 할 정도로요. 푸짐하게요. 머지않아 식구가 서른 마리에 이르게 됐습니다.”
“알을 낳았다고요? 서로 교미라도 한 겁니까? 근친상간을요?”
“그건 아니고요. 무성생식입니다. 어미도 무성생식으로 녀석들을 낳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본 듯한 상황이었다.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낸 공룡들이 종족 번식의 본능에 의해 무성생식으로 알을 낳고 2세를 탄생시켰다는 이야기.
몬스터의 시대에 같은 현상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었다.
“주황이가 여덟 개, 노랑이가 아홉 개를 낳았습니다. 두 녀석은 이쪽으로 불러들여서 부화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빨강이가 제일 큰놈 아닙니까? 동생들이 먼저 어미가 됐네요?”
“안 그래도 몹시 서운한 모양입니다. 시무룩해서 밥도 잘 안 먹고···. 달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주황이와 노랑이는 정부 청사 뒤뜰에 한가로이 엎드려서 낮잠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알을 품고 있을 터였다.
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인근 지역 주민들과도 제법 친해진 듯했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쓰다듬고 있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등에 올라타서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저래도 괜찮습니까? 위험하지 않을까요?”
“뛰어다니지만 말라고 했습니다. 알이 상하게 되면 녀석들이 예민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녀석들 덕분에 자치국의 영토도 적잖이 확장했다.
녀석들의 출몰에 접경 지역 중국인들의 대규모 도주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빈집털이에 들어갔고, 퉁화시와 지린시까지 자치국의 영토로 편입될 수 있었다.
중국 정부에서 별다른 항의는 없었다.
자기네들 처지에선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 무리인데, 조선족 자치국에서 알아서 하라는 듯한 양상이었다.
“조호견 초인이랑 말은 잘 통합니까?”
잠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조금이나마 염려했던 부분이었다.
자치국 정부 임시 수반 조호견과 이자걸의 충돌에 대한 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