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살며시 팔을 비틀더니 가볍게 털었다.
움켜쥐고 있던 히스패닉 사내의 손에서 귀신처럼 벗어났다.
“내가 도망이나 다닐 인사 같은가?”
노인이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눈빛은 더욱 붉어져 흰자위가 사라졌다. 눈동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혈안이었다.
몸 주위로 붉은 기운이 일렁이기까지 했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대는 양상이었다.
당장 히스패닉 사내가 반응했다. 엄습해오는 핏빛 열기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팽창하게 두고 볼 수 없다는 태도였다.
“당장 제압해야 한다!”
히스패닉 사내를 필두로 거구의 서양인 사내들이 노인을 덮쳤다.
사내들의 기세에 노인이 눌리는 형국이었다. 노인의 몸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여세를 몰아 사내들이 노인을 짓눌렀다.
완전히 제압당한 듯한 양상.
동양인 사내가 조소와 함께 내뱉듯 한마디 던졌다.
“그러게 제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좋았잖아요. 괜히 험한 꼴 당하고 이게 뭐예요.”
“킥킥킥.”
노인의 반응은 괴랄한 웃음이었다.
핏빛 기운이 짙어지고 커졌다. 짓누르고 있는 거구의 사내들마저 휘감을 정도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그냥 보내줬으면 서로 좋았을 텐데 말이야. 괜한 살상을 피할 수 있고.”
핏빛 기운이 폭발했다.
누르고 있는 사내들을 집어삼킨 데 이어, 주위를 지키던 이들까지. 일거에 날려버렸다.
***
“낯설지 않은 기운이군.”
산둥성 옌타이시에 들어선 직후 화무결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곳으로 건너온 이후 이런 기운은 처음인데···.”
“그래. 마나와는 달라. 음산하게 짙은 밀도가···. 무림의 내공, 어쩌면 마공인 것 같은데···.”
유지훈도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갸웃했다.
“천마의 마기 같진 않은데, 혹시···?”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어찌 이곳에···.”
화무결이 유지훈이 들고 있는 단말기를 들여다봤다. 실험체에 이식된 생체 인식칩을 추적하는 장치였다.
“실험체의 기운은 아닌 듯하군.”
단말기에서 실험체는 이동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상서롭지 않은 기운을 향하는 양상이었다.
“그쪽으로 가고 있네. 낯설지 않은 기운이 팽창하는 방향으로.”
“뭐지? 충돌인가? 아니면 이끌리는 건가?”
“알 수 없지. 어느 쪽이든 심상치 않은 건 마찬가지일세.”
“서둘러야 한다는 의미군.”
유지훈과 화무결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를 시작했다. 파란을 예고하는 장소를 향해.
***
사마염. 사마세가 가주의 서자였다.
사마세가 가주 사마휘가 몸종을 범해 잉태된 비운의 존재였다.
천재적인 무(武)의 재능을 타고났지만, 비천한 출신 때문에 가문의 주류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다.
압도적인 재능이 더 문제였다. 장차 가문을 뒤흔들 혼동의 씨앗으로 여겨졌다. 아버지인 사마휘마저도 그를 버렸다.
배척당한 천재에게 찾아온 건 죽음의 그림자였다. 재능이 드러난 열 살 무렵부터 끊임없는 살해 기도에 시달렸다.
급기야 어머니를 잃은 뒤 사마염은 가문을 떠났다. 탈출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열둘이었다.
제대로 된 가문의 무공을 배우지도 못했지만, 사마염은 손위 형들과 누나들보다 강했다. 아니 압도했다.
가문을 탈출한 소년의 삶은 한층 비루해졌지만, 자유로웠다. 얽매임 없이 싸웠고, 더욱 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창백한 인상의 노인에게 제압당했다.
앙상한 체구에 힘도 제대로 못 쓸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노인은 강했다. 사마염은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채 옴짝달싹 못 하게 됐다.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무공을 배워보지 않겠느냐?”
노인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일신의 무공을 전수할 제자를 찾아다니던 상황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거대 집단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계승과 부흥의 임무를 짊어진 인물이었다.
“나에게 무공을 배우면 너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질 것이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를 죽인 자들에게.”
“가능하다. 원수들의 씨를 말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가르쳐주십시오. 사부님.”
조건이 있었다.
집단의 계승자가 돼야 했다. 사부가 이루지 못한 부흥을 이뤄야 했다. 집단을 상징하는 무공도 연성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이백 년 전 무림 4대 세력 중 하나로 군림했던 집단의 영화를 되찾아야 했다.
집단의 이름은 아수라혈교. 무공의 명칭은 아수라혈염기였다.
소년 사마염에게 주어진 숙명은 혈마의 재림이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그렇게 사마염은 아수라혈교의 계승자가 됐다.
사부로부터 아수라혈염기를 익히기 위한 기반 무공을 전수했고, 불과 1년 만에 아수라혈염기에 입문했다.
전대 계승자들은 입문에만 5년이 걸렸지만, 사마염은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5년째 되던 해에 오 성에 가깝게 연성했다.
서른을 막 넘어섰을 때 사마염은 복수에 성공했다.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누나들···. 어머니를 죽게 한 이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사마세가의 멸문이었다.
아수라혈교의 부활을 천명했다.
대막에 근거지를 두고 암약했던 교도들을 규합해 기틀을 다졌다. 광풍사, 철궁보 등 대막 지역 사파들을 흡수해 세력을 키웠다.
마흔이 되던 해. 아수라혈교는 무림 4대 세력으로 도약하게 됐다.
사마염에게 남겨진 마지막 숙명은 아수라혈염기의 완성. 궁극적으로 혈마의 재림이었다.
교의 모든 일은 수하들에게 맡기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아수라혈염기의 십 성 연성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십 년이 되도록 연성에 이르지 못했다.
구 성 단계에 이른 뒤 벽에 부딪혔다.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벽을 넘을 순간이면 여지없이 주화입마의 위험이 함께 찾아왔다.
멈췄다가 다시 시도하길 수차례. 마침내 도박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넘을 수 없으면 뚫어야 하니, 주화입마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성공과 실패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 체내에 거대한 폭발이 이뤄졌다. 가로막았던 모든 게 무너졌다.
돌파에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찰나.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면 완전무결한 혈마의 신체를 얻었으리라 자신하면서.
깨어나니 낯선 장소와 시간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1세기 중국. 무림과는 확연히 다른 세상이었다.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진기한 문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도 사마염은 자신 있었다. 체내를 타고 흐르는 강렬한 기운, 아수라혈염기의 완성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마의 재림이 이뤄졌을 진데, 어떤 시간대의 공간이든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걸림돌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노화의 속도였다. 무림에서보다 열 배는 빨리 노화가 진행됐다. 신체의 노화가 새로운 공간의 시간 흐름을 좇아가지 못한 탓이었다.
아수라혈염기는 노화의 속도를 늦추는 기능으로 갈무리해둬야 했다.
동시에 노화를 막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21세기 중국에 혈마의 재림을 완성하기 위해.
장린펑이라는 신분으로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며 살아갔다.
이따금 사용한 아수라혈염기 덕분에 고레벨 각성자로 인정받았다. 북부전구 군부에서 중간 간부로 자리매김했다.
방법을 찾아냈다. 아수라혈교의 술법이었다.
활강시. 죽었지만 죽지 않은 상태의 괴물. 자연치유력에 괴력을 소유한 무시무시한 존재가 해답이었다.
다만 스스로 활강시가 돼야 하는 점은 문제였다. 죽었으니 노화는 진행되지 않을 테지만, 이지를 살려둬야 하는 점이 관건이었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설계자가 돼 퍼즐을 완성하기로 했다.
북부전구 주도로 연구진이 대거 투입돼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사마염은 최종적인 해답에 근접해갔다.
연구소장이 제어 장치의 미흡을 주장하며 제동을 걸기 전까지는 순조로웠다. 결국 프로젝트는 중단됐고, 실험체 폐기가 결정됐다.
사마염은 프로젝트에서 배제됐다. 퇴출이었다. 비밀 프로젝트에서 쫓겨난 이에게 주어질 대가는 자명했다.
사마염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활강시가 되든, 폐기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실험체를 기다리든.
무엇을 선택하든 일단 살아남아서 후일을 도모해야 했다.
폭발 사고에 의한 죽음을 위장해 옌타이시로 숨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제법 많은 아수라혈염기를 사용해야 했기에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의 모습에 이르게 됐다.
다행히 폐기 위기를 넘긴 실험체가 있었다. 걸어둔 언령에 의해 그를 찾아오고 있었다.
문제는 만만치 않은 강적들이 옌타이시로 몰려들고 있다는 점. 어쩔 수 없었다. 아수라혈염기를 끌어올려 제압할 수밖에.
21세기 중국으로 넘어온 지 5년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동안 그에겐 30년에 가까운 노화가 진행됐다. 갈무리한 아수라혈염기로 꾹꾹 눌러뒀음에도.
***
폭주하는 아수라혈염기는 반경 10m 일대 모든 걸 집어삼켰다. 생명체는 물론이고, 건물과 선박까지.
“으하하하. 네놈들이 자초한 것이니 원망하지 말도록.”
아수라혈염기를 팔 성 이상으로 끌어올렸기에 노화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될 터였다.
사마염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실험체. 슈퍼 솔져 프로젝트로 만들어낸 활강시가 가까워지는 기운이 뚜렷이 느껴졌다.
실험체를 만나 몇 가지 확인 과정을 거친 뒤 스스로를 활강시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면 노화와는 완전한 작별에 이를 수 있었다.
“저 늙은이를 죽여라!”
다시금 강적들이 몰려들었다.
이번엔 한층 많은 숫자였다. 그중엔 엄청난 강자도 둘이나 포함돼 있었다. 중년의 흑인과 히스패닉.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의 초인인 듯했다. 무림으로 치면 화경에 접어든 절세 고수에 비견될.
“허허. 이번엔 애 좀 먹겠군. 10년은 손해 볼 수도 있겠어.”
아수라혈염기를 십 성 가까이 끌어올려야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다. 어쩌면 노화의 속도를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될 터였다.
그때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 영감님 불구덩이 속에서 뭐해? 안 뜨거워?”
다크 디멘션의 두 수장 네이트 브라운과 카를로스 라미레스가 사마염에게 협공을 가하려는 찰나였다.
실험체 남녀가 살풍경한 파장을 일으키며 사마염에게 다가왔다.
***
보이지 않는 위험
“대체 이게 어떻게···. 허어.”
믿어지지 않는 참상에 유지훈은 헛웃음을 흘렸다.
화무결은 머리를 감싸 쥐더니 마른세수와 함께 탄식을 토해냈다.
“믿을 수 없군. 혈마의 짓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반경 20m 이내 일대가 초토화돼 있었다.
백 구가 훨씬 넘을 듯한 조각난 시신들, 무너져 내린 건물들 그리고 쪼개져 침몰하고 있는 선박들···.
주위엔 여전히 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모든 걸 집어삼키고도 부족한 듯 만만치 않은 여세를 남기고 있었다.
“아수라혈염기인지 하는 건가?”
“자네도 아는가? 경험해본 적이 없을 텐데···.”
유지훈의 질문에 화무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지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림에 있을 때는 그랬지. 돌아왔다가 잠시 다녀갔을 때 상대해 봤어. 악수창인지 하는 놈이랑 붙었을 때.”
잠시 무림으로 귀환했을 때 천마의 후예와 함께 화무결을 제거하러 왔던 자들 가운데 아수라혈교의 인물이 있었다.
아수라혈염기로 유지훈을 공격했다가,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유지훈이 차원 이동 과정에서 습득한 새로운 특성, 현장에서 두전성이라 불렸던 반사기에 당한 첫 번째 희생자이기도 했다.
“그랬지. 혈교의 대사제라는 놈이었어. 그 녀석의 아수라혈염기는 칠 성 수준에 불과했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십 성에 이른 것 같지? 내가 상대했던 수준을 까마득하게 넘어선 양상이야. 대사제의 수준을 이 정도로 넘어섰으면···.”
“혈마 본인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걸세.”
유지훈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인상적인 형태의 시신들을 자세히 살폈다.
“초인이 적어도 둘은 있었던 것 같군. 서양 놈들이 여기까지 와서 이 꼴이 됐다면···. 빌런 조직이겠어. 다크 디멘션인가 하는.”
“얼마 전에 상대한 미친 마녀랑 같은 소속이란 말인가?”
“그런 것 같아. 미친 마녀의 임무를 이어받은 모양인데.”
“임무라 하면···?”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실험체 확보겠지.”
유지훈이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주의 깊게 시신 하나하나를 둘러봤다.
“실험체라 할 만한 잔해는 보이지 않는군.”
“추적기를 살펴보게.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서 쫓아야 하지 않는가?”
유지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말기 화면을 화무결 쪽으로 들어 보였다.
신호는 사라지고 없었다. 생체 인식칩의 작동이 멎은 상태였다.
“더 이상 추적이 안 돼. 혹시 아수라혈염기에 당한 게 아닐까 살펴봤는데 실험체로 보이는 시신은 없어.”
“그렇다면···?”
“아수라혈염기의 주인이 실험체의 잔해를 거둬갔거나, 아수라혈염기가 생체 인식칩을 소멸시켰거나, 둘 중 하나겠지.”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