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50)

“오는 동안은 편안했지만, 도착해서 급격히 불편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이 녀석은 왜 사장이고, 나는 부사장이냐?”

“하하하. 죄송합니다. 저는 전달받은 대로···. 로저스 대표님께서 통보해주신 대로 모셨을 뿐입니다.”

로저스 대표. 다크 디멘션 서열 1위 수장 저스틴 로저스를 의미했다.

CIA 본부와 함께 이번 작전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다크 디멘션 측 브레인이기도 했다.

조직 내 서열에 맞춰 위장 신분을 만든 모양이었다. 서열 2위 네이트 브라운을 사장으로, 서열 4위 카를로스 라미레스를 부사장으로.

“끄응. 빌어먹을 흰둥이 자식···.”

카를로스 라미레스가 신음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브라이언 애시튼의 안내에 따라 준비된 대형 승합차에 올라탔다. 9인승 승합차에 운전자를 제외하고는 셋만 탑승했다.

널찍하게 자리 잡고 앉은 상황에서 승합차가 출발했다.

방음과 도청 방지가 철저하게 이뤄진 차량이었다. 위장 신분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목적에 대한 순서는 정리를 마치셨습니까?”

브라이언 애시튼의 질문에 네이트 브라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선적으로 실험체 확보. 성공한 뒤 인세인 위치에 대한 복수에 들어갈 거요.”

“역시. 중요도를 적절히 판단하셨군요.”

“헛소리 집어치워라!”

카를로스 라미레스가 버럭 했다.

“중요도는 린제이의 복수가 월등하다. 효과적인 동선을 고려해 순서를 정했을 뿐이다.”

네이트 브라운과 카를로스 라미레스는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어느 쪽을 먼저 실행할지에 대해서였다.

네이트 브라운은 실험체 확보, 카를로스 라미레스는 복수를 우선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타협점은 동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선전시에 도착한 뒤 복수를 위해서는 지린성으로 가야 했다. 이동 과정에서 실험체 확보가 가능한 경로였다.

일단 실험체를 손에 넣은 뒤 복수에 나서기로 했다.

네이트 브라운이 최손을 다해 협조하기로 약속하면서, 카를로스 라미레스도 실험체 선확보에 동의하게 됐다.

“우리 아이들은 언제쯤 합류하게 되는 거지?”

두 수장의 정예 수하 200명이 합류하기로 돼 있었다.

역시 신분 위장이 필요했기에 뿔뿔이 흩어져 입국한 뒤 작전 수행 장소에 집결할 예정이었다.

“아이고~. 그것 때문에 애 좀 먹었습니다.”

브라이언 애시튼이 짐짓 엄살을 떨었다.

“200명에게 위장 신분을 만들어주고, 각지로 흩어져 입국하게 하려다 보니, 동아시아 요원 전체가 투입될 정도였죠. 다들 무사히 입국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작전 장소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남은 건 작전 전개에 관한 브리핑이었다.

네이트 브라운이 깊은 관심을 두는 부분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라미레스의 관심사는 오직 복수였으니.

“설명해 주시겠소? 간략하게.”

“실험체의 행방을 파악하기 앞서서 연구의 최초 창안자부터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가능하면 손에 넣는 게 좋을 테고요.”

실험체의 행방을 파악할 위치 추적 장치는 유지훈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었다. CIA는 다른 추적 수단을 찾으려고 정보를 수집하다가,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최초 창안자의 존재를 알게 됐다.

“최초 창안자? 연구소 소장이면 중국 정부에서 보호하고 있지 않겠소? 정부와 충돌은 부담스러울 텐데?”

“연구소에서 축출된 인물입니다.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절벽으로 굴렀는데···.”

“그런데···?”

“살아 있었습니다. 폭발 현장에서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사고를 위장한 것이 아닌지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분을 위장한 채 숨어 있는데, 저희 요원이 위치를 파악해 감시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랭글리에서 파악했으면, 중국 정부 또한 알아냈을 수도 있겠군.”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브라이언 애시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정부에서 손 쓰기 전에 먼저 확보해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중국 정부에서 동원할 각성자 전력이 보잘것없다는···. 최근에 실험체들에 의해 몰살을 당했거든요.”

“다크 디멘션의 정예들로 충분하다는 의미로군.”

“차고 넘치겠지요. 그자가 실험체의 행방을 쫓을 방법을 알 수 있으니, 바로 추적에 들어가거나. 여의치 않으면 그자만 확보해 미국으로 보내도 작전은 절반 이상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자가 어디에 있소?”

“산둥성 옌타이시에 있습니다.”

“고양주로 유명한 곳이군. 마치는 대로 한 잔 해야겠어.”

카를로스 라미레스가 끼어들었다.

“고량주 말이오? 독하기만 하고 맛도 없는 술이 뭐가 좋다고···.”

“모르는 소리 마시오. 고량주와 고양주는 엄연히 다른 술이오. 옌타이의 고양주는 깊은 맛이 일품인 고급 전통주요.”

“하하하. 미스터 브라운께서는 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브라이언 애시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요원들에게 좋은 놈으로 수배해두라고 지시해놓겠습니다. 성공적으로 그자를 손에 넣으면 고양주로 축배를 들도록 하시지요.”

***

유지훈과 화무결은 위치 추적기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실험체의 행방을 추적했다.

“계속 서쪽으로 향하는 것 같더니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군.”

“그러게. 다행이야. 혹시 쓰촨성이나 칭하이성까지 가면 어느 세월에 쫓아가나 걱정했는데.”

산시성에 머무르던 실험체는 허난성을 거쳐 산둥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랴오닝성에 당도한 유지훈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산둥성 어디로 가는 거지? 죽일 거물이 있기라도 한 건가?”

랴오위안허가 남기고 간 말에 따르면 실험체들은 고레벨 각성자들을 찾아다니며 격살하고 있었다. 장웨이지의 무의식에 등장한 괴생명체의 선언을 실천에 옮기는 듯한 양상이었다.

재림을 방해하는 자 모조리 죽을 것이라는 선언. 초인을 비롯한 고레벨 각성자들을 재림에 방해되는 존재로 추측 가능한 대목이었다.

“그런데 자네. 여전히 그냥 알아보기만 할 생각인가?”

“응? 무슨 말이야?”

“우리가 우려하는 상황이 맞다면, 실험체인지 하는 것들을 없애야 하지 않나 해서 하는 말일세.”

“응. 대가 없는 행동은 없어. 옛 고구려 영토 내준다는 약속 없이는 그냥 알아보는 것으로 끝이야.”

“허허.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군.”

화무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랴오 사부인지 하는 녀석한테서는 아직 소식 없는가?”

“없어. 주석인지 만나서 대답 들으면 자치국으로 올 텐데, 왔다는 연락은 없었어. 연락처 남겨 놨으니 전화하든지 하겠지.”

“여기나 저기나 하나 같이 위정자들은 답답하군. 뭔가 빠릿빠릿하게 하는 법이 없어.”

화무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에서도 황실의 일 처리는 답답했다. 천마의 침공에도 황군 동원을 뭉그적거렸다. 중원 정도 무림의 피해가 커진 이유였다.

“그러고 보면 짱개 놈들 만만디에 막무가내인 거 어제오늘 일이 아닌 모양이다. 어쩌겠냐. 그렇게 생겨 먹었는데.”

“일단 가세. 가서 보고 뭘 하든 하도록 하세.”

일단 산둥성으로 향했다.

실험체들보다 먼저 당도해야 관찰하든, 제압하든, 방향을 정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

산둥성 옌타이시 외곽 어촌 마을.

뉘엿뉘엿 석양이 드리우는 가운데, 항구 어귀에서 조업을 마치고 회항하는 어선들을 바라보는 노인이 있었다.

허리은 굽었고, 얼굴엔 검버섯이 가득 피어 있었다. 깊게 펜 주름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진 인상이었다.

주름 사이에 묻힌 퀭한 시선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삶의 미련을 머금은 듯했다. 언제 떠나도 수긍이 될 법한 외모였다.

“어르신. 오늘도 아드님 기다리세요?”

노인이 마을에서 지낸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에서 노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귀항하는 어선들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노인의 외모가 눈에 확 띌 정도로 급격하게 늙어갔기 때문이었다.

처음 항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중후한 노인의 외양이었다. 불과 한 달 만에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어버렸다.

“아들? 나한테 아들이 있었던가?”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처음 항구에 나왔을 때만 해도 아들이 올 거라며 또렷하게 말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들의 존재를 잊은 모습이었다.

그랬다가 또 어떤 날은 손자를 기다린다고 했다가, 다음날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하고···.

마을 주민들은 항상 노인을 눈여겨봤다.

혹시나 불의의 사고로 변을 당하진 않을지 걱정스러워했다.

지나가다가 의미 없는 인사라도 건넸고, 터무니없는 대답이 나와도 웃으며 반겼다. 머지않아 떠날 사람에 대한 예의라 여기며.

이해하기 힘들 정도 빨리 늙어가는 것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의 병 때문이라 지레짐작했다.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빛에 담긴 고통이면 충분히 설명된다고 여겼다.

그렇게 노인은 마을의 명물이 됐다.

늙어가는 고통을 지독한 슬픔으로 상징하는.

“어르신. 이제 더 들어올 배 없어요. 이만 들어가셔야죠.”

어둠이 밀려들 무렵, 마지막 어선이 도착한 뒤, 항구 관리인이 퇴근을 서두르며 노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노인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눈빛이 형형했다. 쓸쓸하기만 했던 미소에도 활기가 깃들어 있었다.

“아닐세. 손님들이 오고 있네.”

“네? 손님들이요? 드디어 아드님이 오시는 겁니까?”

“아들? 내게 아들이 있다고 했던가?”

“그럼 누구···?”

항구 관리인이 주위를 둘러봤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인적은 없었다. 배의 이동도 없었기에, 갈매기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만이 흘렀다.

“자네는 참 둔감하군. 제법 여러 손님이 찾아드는데 말일세.”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굽어 곱사등이가 된 탓에 땅을 짚고도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항구 관리인이 부축해서야 가까스로 허리를 폈다.

“이곳은 다 좋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벗어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도 않고. 이제야 온다 싶긴 한데···.”

노인이 호흡이 버거운 듯 가쁜 숨을 내쉬었다.

“원치 않는 이들도 함께 오는 것 같구먼. 한발 앞서 오려나···.”

노인이 항구 관리인의 손을 잡더니 등을 토닥였다.

“자네는 이만 가보게.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을 듯하네.”

“네? 험한 꼴이요? 그럼 어르신도 같이···.”

항구 관리인이 잡아끌려고 하자, 노인이 손을 뿌리쳤다. 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항구 관리인의 등을 밀쳤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항구 관리인이 10m 가까이 밀려 날아갔다. 가볍게 착지했다.

“어르신···!”

“얼른 가게. 그동안 말벗해 줘서 고마웠네.”

어둠을 뚫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범상치 않은 기도의 사내들이 서른 명은 되는 듯했다.

노인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눈빛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기운

어둠을 뚫고 등장한 서른 남짓의 무리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서양인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하나 같이 고레벨 각성자인 듯했다.

그들 중 동양인 한 명과 서양인 두 명은 비교적 평범했다. 평범한 세 사람이 앞장서는 양상이었다.

동양인이 노인 앞으로 다가가 합장하듯 양손을 모았다.

“장 박사님. 모시러 왔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장 박사? 사람 잘못 찾은 것 같소만···.”

꼿꼿하게 허리를 편 노인은 제법 건장했다. 180cm는 넘을 듯했다. 어느 틈에 어깨도 떡 벌어져 있었다.

사뭇 위압적인 태도로 동양인 사내를 대했다. 충혈된 듯 붉게 타오르는 눈빛이 동양인 사내를 압도하는 양상이었다.

동양인 사내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왜 이러십니까? 다 알고 왔습니다. 피해 계시는 사정도 다 압니다. 저희랑 같이 가시면 안전하실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장가가 아니라 사마가라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으니 비켜주시오.”

노인이 지나쳐 가려 하자, 뒤에 있던 무리의 한 사내가 앞을 막아섰다. 육중한 체구의 히스패닉이었다.

동양인 사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맞아. 틀림없어. 백 번도 넘게 확인했어.”

“그 말 책임지도록. 나는 넘어가도 보스는 넘어가지 않으실 테니.”

“얼마든지. 대신 놓치면 그쪽이 책임져야 할 거야.”

히스패닉 사내가 노인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손자국이 패일 정도로 세게 쥐었지만, 노인은 그다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가벼운 코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놓는 게 좋을 걸세. 나는 참을성이 많은 편이 아니라네.”

히스패닉 사내는 무표정하게 노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중국어를 몰랐기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노인의 표정이 기이했지만, 신경 쓰진 않았다. 벗어나지 못하게 붙잡아두면 된다고 여겼다.

대화에 나선 건 동양인이었다.

“박사님. 얘들 무식해서 힘만 센 놈들이에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성질도 지랄 같아요. 박사님 다치게 할 수도 있어요.”

“성격이 지랄 같긴 나도 만만치 않다오. 정 이렇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는데···.”

“에이~. 왜 이러실까. 그냥 같이 가시면 모두가 행복할 텐데요. 당장 박사님도 도망 다니지 않으셔도 되고···.”

“허허허.”

노인이 허허롭게 웃었다.

“내가 도망 다닌다고? 어디서 이상한 말을 들으신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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