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50)

중앙 정부는 장웨이지를 비롯한 사부들에게 흑룡회 붕괴의 수습을 요청했다. 표면적으로 흉수를 찾아 제압해 혼란을 최소화하라는 당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흉수를 확보하라는 지시였다.

흉수.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실험체. 폐기해야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폐기되지 않고, 가동에 들어간 존재들이었다.

중앙 정부는 폐기가 아닌 확보를 요구했다. 흑룡회 용두를 격살할 정도로 막강한 존재를 그냥 버리긴 아까워서였다.

사부들이 제압한 뒤 제어 방법까지 찾아내 주길 바랐다. 세계 최강의 정신 계열 초인인 장웨이지에게 방법이 있을 거라며.

랴오위안허는 이번 작전에서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아니. 스스로 뒤로 물러서길 택했다.

유지훈을 겪은 이후 그의 특성인 습득기의 허상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남의 것에 의존한 능력, 내 것이 아닌 능력에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다.

은퇴까지 염두에 두고 두문불출하는 시간을 보냈다.

무당의 사부 장웨이지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장 사부가? 특성을 발동하셨는데도 변을 당하셨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특성은 성공적으로 발동됐다고 합니다.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게 도주자들의 공통된 전언입니다.]

무당이 전멸에 가까운 화를 입었다.

가까스로 도주한 제자는 열 명 남짓에 불과했다.

참극의 과정을 알려왔다.

단 두 명에 의해 무당이 사라졌다고.

사부는 특성을 발동했지만, 이내 자신이 지배하는 무의식의 공간에서 공포에 질렸다고.

가까스로 무의식의 공간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실험체의 손에 의해 목이 뽑힌 채 주검이 됐다고.

당장 무당의 본거지, 참상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특성 습득기를 발동했다.

미세하게나마 장웨이지의 기운이 남아있다면, 습득기 또한 발동이 가능했다.

다행히 남아있었다. 자취만 남은 장웨이지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절망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남은 사부들에게 알려야 한다.”

다급하게 각성자협회로 연락했지만, 돌아온 답은 절망적이었다.

[마 사부와 천 사부께서 초인들을 규합해 척살대를 꾸리셨습니다. 랴오 사부께선 동참하지 않으셨습니까?]

화산의 마샤오윈과 전진의 천쓰위안. 마지막 남은 사부들이었다.

남은 초인들을 규합했다면, 사실상 중국의 각성자 전력 전체가 투입된 상황이었다.

척살에 실패한다면, 오히려 척살의 대상이 된다면, 중국의 각성자 생태계가 개같이 멸망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마 사부, 천 사부, 그대들이 쓰러지면 파국만이 남게 되오···.”

간절하게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절망적인 예감은 현실이 됐다. 마지막 남은 희망을 찾아 무릎을 꿇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바로 연길시로 달려왔다.

한국의 귀환자, 유지훈에게 허리를 굽혔다.

“제발 도와주시오!”

유지훈은 대번에 눈살부터 찌푸렸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야? 그쪽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처지인가?”

“중국이 무너질 위기요. 중국이 무너지면 조선족 자치주 또한 안전할 수 없소. 아니. 당장 한반도도 중국과 마찬가지 신세가 될 거요.”

“이 영감이 사람 뭘로 보고···. 악담이나 할 거면 당장 돌아가.”

유지훈이 매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급기야 랴오위안허가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이렇게 부탁드리오. 내가 표현이 서툴렀소. 그만큼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의미였소.”

“됐어. 필요 없어. 중국한테나 위기지. 대한민국엔 전혀 위기 아니야. 중국 문제는 중국에서 알아서 하라고.”

유지훈이 귀찮은 듯 휘휘 손을 저었다.

노골적인 멸시를 담은 손짓이었지만, 랴오위안허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분기를 참는 기색도 없었다. 간절함만을 머금은 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화무결이 넌지시 편을 들어줬다.

“그렇게 내쫓기만 할 게 아니라 사연은 좀 들어보는 게 어떻겠나?”

“어이구. 곤륜이라고 호감이라도 느낀 거야? 그 곤륜이랑 이 곤륜이랑은 달라. 명의만 도용한 거라고.”

화무결은 청년 시절에 곤륜파의 장문인에게 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신세였다.

곤륜의 사부인 랴오위안허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가질 만했다.

물론 무림의 곤륜파와 현재 중국의 곤륜은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사실 유지훈도 랴오위안허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지난번 협상 때도 랴오위안허는 그럭저럭 예의를 갖췄었다. 속국에 관한 질문에도 비교적 모범 답안을 내놓기까지 했다.

중국의 위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도울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매정한 축객령으로 내쫓으려 한 배경엔 도와주더라도 그냥은 아니라는 이유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얻어내려는 큰 그림이었다.

“그래. 정 그러면 사연이나 들어보지 뭐. 어떻게 된 거야?”

랴오위안허가 말을 꺼내기 앞서서 단서를 달았다.

“흑룡회가 멸망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어. 거기 회주가 중국에서 가장 강한 초인이었다지? 그 말 할 거면 안 해도 돼.”

랴오위안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룡회의 붕괴 정도로 중국의 위기를 말하진 않소. 흑룡회는 암적인 존재들이라 차라리 잘 됐다고 할 수 있을 거요.”

“흐음. 그럼 제법 큰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지?”

“사부들이 모두 죽었소. 아울러 초인 대다수도···.”

유지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장웨이지인가 하는 영감도? 그 영감은 쉽게 죽을 인사가 아니던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특성을 발동할 수 있어서···.”

“장 사부도 당했소. 특성을 발동한 상태에서···. 자신의 공간에서 절망에 빠져들었소. 결국엔 흑룡회 용두와 같은 신세가 됐소.”

“자신의 공간에서 당했다고?”

유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장웨이지의 공간은 유지훈 역시 경험해 봤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철저하게 장웨이지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의도한 건 뭐든 이뤄지게 할 수 있는.

그 공간에서 절망에 빠져들었다는 의미는···. 상대에게 트라우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게 가능할까···.

“미욱하긴 하나, 내겐 상대방의 특성을 빌려 쓸 수 있는 재주가 있소. 장 사부의 특성 또한 마찬가지요.”

랴오위안허가 참상의 현장에서 장웨이지의 특성을 습득해 발동한 뒤 목격한 장면을 전했다.

“자취가 거의 사라진 상황이라 뚜렷하게 보진 못했지만, 괴기한 외모의 생명체를 볼 수 있었소. 전신이 불타오르는 듯한, 화염을 머금은 듯한 핏빛 시선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소.”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하는 괴물인 모양이군.”

유지훈은 짐짓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랴오위안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 괴기한 생명체는 재림을 언급했소. 방해되는 자 모조리 죽을 거라고···.”

“그 괴물이 문제가 아니잖아. 실험체 두 년놈이 문제인 거 아니야? 목을 뽑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다 두 년놈 짓이잖아.”

그때 화무결이 침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으음. 전신이 불타오르는 듯하다고 했나? 시선이 화염을 머금은 듯했다고? 예사롭지 않군.”

떠오르는 존재가 있는 눈치였다.

질문을 이어가려는 찰나, 유지훈이 끊었다. 앞서 물었다.

“위기라는 건 알았어. 그런데 맨입으로 도와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 그게 무슨···?”

“뭘 모르는 척해? 그쪽 같으면 공짜로 돕겠어? 그런 무시무시한 놈들을 상대하는데?”

유지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설마 지구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 어쩌고 하면서 아무 대가 없이 도와달라는 거였어? 그렇다면 사람 잘못 봤어.”

“아···.”

“인류의 안녕 따위는 나한테 관심사 아니야. 나는 그저 내가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바랄 뿐이야.”

유지훈이 화무결을 흘깃 쳐다봤다.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위기? 당연히 지켜야지.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중국의 위기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문제야. 나는 대한민국의 위기까지만 신경 쓰기에도 충분히 바쁘거든.”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도움을 구하는 쪽에서 알아서 제시해야 할 문제 아닌가?”

“그렇긴 한데, 어떤 걸 원하시는지 알 수 없으니···. 조선족 자치주의 독립을 인정하면 되겠소?”

“허허. 미친···.”

유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영감 바보야? 자치국은 이미 독립했어. 인정하고 말고 다 물 건너갔다고. 그게 대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 어떤···?”

“굳이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옛 영토? 동북공정은 중국의 착각이었다는 선언이랑 함께.”

“으음···.”

랴오위안허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가타부타할 수 없는 영역이오. 사실 주석께서는 내가 여기 온 것도 모르시오. 급한 마음에 달려온 거요.”

“역시 짱개 놈들은 막무가내네. 순서고 뭐고 없이 들이대면 된다고 여기나 봐? 돌아가. 주석인지 뭔지한테 제시할 수 있는 대가부터 받아오라고. 논의는 그런 다음에 해야지.”

유지훈이 손을 한 차례 튕긴 뒤 몸을 돌렸다.

이번엔 확실한 축객령이었다.

“한시가 급하오. 먼저 도와주신 뒤 조건을 논하면 안 되겠소?”

“맞고 갈래?”

단호한 일성을 남긴 뒤 매정하게 걸음을 옮겼다.

화무결이 씁쓰레한 시선을 랴오위안허에게 보냈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지훈의 뒤를 따랐다.

랴오위안허는 무릎 꿇은 자세로 한참 동안 자리를 지켰다.

유지훈이 돌아오지 않자, 장탄식과 함께 일어나 걸음을 내디뎠다. 향하는 방향은 국가 주석이 있는 곳일 터였다.

***

랴오위안허가 떠난 뒤, 유지훈이 굳은 표정으로 화무결에게 물었다.

“너도 같은 생각한 거 같던데?”

“무슨 생각 말인가?”

“장웨이지인지 하는 영감 무의식에 나타났다는 존재 말이야.”

전신이 불타는 듯하고, 화염을 머금은 듯한 핏빛 시선을 가진 괴생명체. 유지훈도 드는 순간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실험체라 하는 녀석들도 석연찮은 점이 있네. 아무래도···.”

“알아보긴 해야 할 것 같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

화무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도와준다고 하지 그랬나? 어차피 움직일 거면서···.”

“누가 도와준다고 했어? 그냥 알아보기까지만 할 거야.”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아까 말한 거 그냥 내뱉은 거 아니야. 인류의 안녕 같은 거 관심 없어. 물론 궁극적으로는 뭔가 하긴 하겠지. 그런데 공짜로는 안돼.”

“허허허. 자네 달라졌군. 무림에서는 공적으로 몰아세운 자들을 위해 천마와 맞서기까지 했는데···.”

“야! 그건 너 때문이었지. 그때 너 죽어갈 때 말했잖아. 나를 거둬서 50년 동안 무림에서 살게 해준 무결이 너에 대한 우정 때문이라고.”

“기억하네. 그렇긴 하네만. 결과적으로 자네는 무림을 구했네.”

화무결이 허허로운 미소를 그리더니 말을 이었다.

“어째 이번에도 자네는 인류를 구할 것 같군.”

“공짜로는 곤란해. 얻어낼 수 있는 거 다 얻어낼 거야. 안 주면? 몰라. 싹 다 망하든 말든···.”

무림엔 낭만이 존재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천마와 맞선 배경엔 화무결에 대한 우정 외에도 낭만을 지키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21세기 지구엔 낭만 따윈 없었다. 지독한 현실만이 존재했다.

어떤 식으로든 노력의 대가는 확실히 챙겨야 하는 현실이었다.

“일단 보자. 이놈들 어디에 있나.”

유지훈이 단말기를 꺼내 전원을 켰다.

빨간 불빛이 맹렬히 반짝였다. 실험체의 생체 인식칩이 작동해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

운명의 소용돌이

중국 선전시 바오안 국제공항.

예사롭지 않은 기도의 두 사내가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육중한 체구에 둥글둥글한 용모의 흑인과 호리호리한 체형에 날카로운 인상의 히스패닉이었다.

여권에 적힌 이름은 제임스 윌리엄스와 호아킨 로페스. 미국 소재 대형 IT 기업의 고위 임원들이었다.

신고서에 기재한 입국 목적은 비즈니스였다. 위장된 신분이었고, 입국 목적 또한 가짜였다.

이들의 실제 이름은 네이트 브라운과 카를로스 라미레스. 세계 제1의 빌런 조직 다크 디멘션의 수장들이었다.

입국 목적은 중국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실험체 확보와 린제이 탐슨의 복수였다.

빌런 조직의 수장이라는 신분을 드러낸 채 중국으로 들어올 순 없었기에 사업가로 위장했다. 외국인들의 출입국에 대한 통제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경제특구 선전시로 입국했다.

선전시에선 CIA 요원과의 접선도 예정돼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껄끄러운 상황에서 CIA 또한 대놓고 활동할 순 없었다. 선전과 상하이 등지에서 사업가로 위장한 채 암약했다.

실험체 확보는 CIA에게도 중요한 임무였다. 동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하던 요원들 대다수가 투입됐다.

총력을 기울여 수집한 정보를 네이트 브라운과 카를로스 라미레스에게 전달해야 했다.

이들을 맞이하러 공항에 나온 건 동아시아 그룹의 데퓨티 리더 브라이언 애시튼이었다.

“윌리엄스 사장님, 로페스 부사장님. 중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시는 동안 불편은 없으셨습니까?”

브라이언 애시튼이 위장된 신분을 들먹이며 이들을 맞이했다.

네이트 브라운은 빙긋 웃으며 브라이언 애시튼의 손을 잡았고, 카를로스 라미레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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