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150)

“화산과 곤륜만 남았습니다. 힘을 합쳐 상대해야 합니다.”

무당의 간부들이 장웨이지에게 피하라고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장웨이지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사부! 시간이 없습니다. 저들이 2층을 돌파했습니다.”

그제야 장웨이지가 눈을 떴다.

“물러서면 계속 밀릴 뿐이다.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한다.”

“가능하겠습니까? 흑룡회를 무너뜨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몰랐기에 당한 것이지. 우리는 대비하지 않았는가. 저들의 기세를 가늠해봤다.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다.”

장웨이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들이 제자들을 이끌고 둘 중 하나만 붙잡아두라. 내가 나머지 하나를 해치운 뒤 가세해 끝을 보겠다.”

“알겠습니다. 사부.”

장웨이지의 표정에 자신감이 엿보였다.

무당의 간부들은 장웨이지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가능하다면 가능한 것이었다. 믿음 이외에 다른 건 존재할 수 없었다.

“가자!”

장웨이지를 선두로 간부들이 뒤를 따랐다.

3층으로 내려갔다. 격전, 아니 학살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물러서라!”

장웨이지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제자들이 일제히 옆으로 비켜섰다.

양쪽으로 갈라진 제자들 사이로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드디어 진짜가 나타난 거야?”

청년이 반색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말려 올라갔다.

여인은 여전히 무심했다.

뭔가 못마땅한지 눈매를 살짝 찡그릴 뿐이었다.

“너희는 왜 이리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다니는 것이냐!”

장웨이지가 준엄한 어조로 물었다.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였다.

“무고한?”

여인을 흘깃 쳐다봤다.

“우리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나?”

“몰라. 그런데 그게 중요해?”

“그렇지. 아니지.”

청년이 다시 장웨이지를 바라봤다.

“그건 안 중요해.”

“그럼 대체 왜···!”

“시키고 있거든.”

청년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얘가 그러라고 시켜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큰일 날 것처럼.”

“뭐라!”

장웨이지가 눈을 부릅뜨고 청년을 노려봤다.

천진하게 웃음 짓는 청년의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렇지! 걸려들었어!’

장웨이지의 눈에서 눈동자가 사라졌다. 백안으로 바뀌었다.

청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웃음기가 사라진 눈에 흰자만 남았다.

장웨이지의 특성이 발동된 것이었다.

“시작하라!”

“여인을 제압하라!”

“잡아두기만 해도 된다! 사부께서 놈을 처치할 때까지.”

무당의 간부들이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여인이 청년을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모처럼 표정이 바뀐 양상이었다. 덮쳐오는 간부들과 제자들을 향해 양손을 휘저었다.

2차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장웨이지와 청년은 5m쯤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둘 모두 눈동자가 사라진 백안이었다. 마주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마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웨이지는 특성을 최대한 발동했다. 청년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트라우마 찾아내 정신을 헤집어놓기 위해.

어둠 속이었다. 아니. 안갯속이었다.

다른 이에게 특성을 발동할 때와 확연히 달랐다.

트라우마를 발견하면 어둠이 걷히고 빛이 도래해야 하는데. 짙은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트라우마 또한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장웨이지 자신이 안갯속에서 헤매는 양상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청년에게 트라우마가 없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청년을 가둘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장웨이지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청년이 지배하는 공간에 들어간 상황일 수도···.

‘안돼!’

장웨이지가 특성을 거두려 했다.

눈을 뜨려 했지만, 더욱 깊은 안갯속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잣 됐다···.’

누군가 다가왔다.

기괴한 복장의 노인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혈안. 전신에 핏빛 기운이 넘실댔다.

“방자한 영혼이군. 나의 재림을 막아서는 자, 남김없이 죽어 마땅할지어다.”

영혼을 불태울 듯 소름 끼치는 음성이었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느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까스로 눈을 뜰 수 있었다. 특성을 거둬들이는 데 성공했다.

“뭐해?”

눈앞에 청년이 있었다.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청년의 우악스러운 손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짧은 순간의 지독한 고통에 이어 다시금 짙은 어둠에 빠져들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진 무저갱의 암흑이었다.

“겁나 폼 잡더니 쥐뿔도 없는 영감이었잖아! 시시하게.”

청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인을 쳐다봤다. 모든 걸 태워 재로 만드는 학살에 한창이었다.

“이봐! 치사하게 혼자만 즐기기야? 같이 좀 즐기자고!”

***

이자걸이 거대 왕도마뱀 가족과 함께 연변으로 입성하면서 자치국 독립은 급물살을 탔다.

그냥 재앙 한 마리와 재앙급 몬스터 일곱 마리의 가세는 조선족 자치국엔 백만대군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오는 길에 숱한 업적을 남기기까지 했다.

“행색이 썩 좋아 보이진 않네요?”

연변에 도착한 이자걸은 몹시 초췌했다.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다.

“서둘러 온다고 어미 녀석 등에 타서 바다를 건넜더니···. 상당히 고된 여행이었습니다. 고속정이라도 구할 걸 그랬습니다.”

“육지에 도착해서는 별일 없었습니까?”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일단 랴오닝성이 발칵 뒤집혔다.

몬스터를 퇴치할 각성자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있다고 한들 거대 왕도마뱀 가족을 상대할 순 없겠지만, 재앙급 몬스터의 대규모 출현은 주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다.

북부전구 병력을 총동원해 퇴치에 나섰고, 대차게 깨졌다.

북부전구 병력의 절반 가까이 박살 났다. 병사뿐만 아니라 군사 장비까지 초토화된 처참한 박살이었다.

“지린성에 진입해서부터는 덤벼드는 놈들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오는 길에 있는 부대는 다 부숴놓고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역시 세계 제일의 소시오패스답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유지훈 초인만 하겠습니까.”

“에이~. 이자걸 대표가 더할 겁니다. 저는 부드러운 남자거든요.”

“설마요. 하하하.”

“정말요. 하하하.”

이제 자치국 독립에 걸림돌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옛 고구려 영토를 모조리 되찾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다만 사정을 전혀 모르는 조호견과 북한 각성자 부대는 일시적이나마 크게 동요했다.

“어마어마한 몬스터들이 몰려왔소!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놈들이오. 유지훈 초인께서 나서주시지 않으면···.”

“괜찮아. 우리 편이야. 당분간 짱개 놈들한테는 비밀이야.”

“아. 그렇소? 허허허. 든든하오.”

거대 왕도마뱀 가족이 이자걸의 애완 몬스터라는 사실을 굳이 중국에 알릴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긴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알리지 않은 채로 두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터였다.

거대 왕도마뱀 가족은 연변과 지린시 경계 벌판에 풀어놓았다.

그동안 지내던 무인도보다 100배는 넓은 공간이었다. 육지에서 지낼 때 서식지였던 에브리랜드보다도 50배는 넓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자유롭게 지내게 된 것이었다.

울타리를 쳐두긴 했지만, 녀석들을 가두기 위한 건 아니었다. 선량한 주민들이 접근했다가 화를 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자치국 국민들에겐 울타리 접근을 금지하라고 당부했다.

국경 너머 지린성의 중국 국민들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남의 나라 국민이 굳이 찾아가서 먹이가 되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지.

“드디어 제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자걸은 사뭇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동안 무인도에서 거대 왕도마뱀 가족과만 지낸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눈빛이었다.

“녀석들만 풀어놓고 그냥 가시게요? 기왕 오신 김에 신화전자 진출 관련 업무도 좀 보시지 않고요.”

“안 그래도 당분간 자치국에 머물 생각입니다. 공장 건립이랑 지사 설립 준비도 하고, 녀석들 잘 적응하도록 돌볼 겸해서요.”

이자걸은 틈만 나면 거대 왕도마뱀 가족한테 가서 이런저런 당부를 했다. 엄마가 아이를 가르치듯이.

“울타리 너머로는 가면 안 되고, 사람은 잡아먹지 말고, 들짐승이나 몬스터 사냥했을 때는 뼈까지 꼭꼭 씹어서 싹 먹어치우고···.”

먹이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교육은 특히 철저히 했다. 주워 먹은 몬스터나 들짐승이 변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대 왕도마뱀 가족은 꼬리를 흔들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르륵그르륵 반응하며 이자걸의 당부를 경청했다.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이자걸을 진짜 어미로 여기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자걸 대표 여기 눌러살아야 할 것 같은데···.”

완벽한 안보가 이뤄진 상황에서 자치국은 독립을 선포했다.

남북한 외교부 고위 관료들이 사절로 참석했고, 러시아에선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이 특사로 방문했다.

자치국에 신화전자의 대규모 산업 단지 조성이 블라디보스토크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덕분이었다.

중국 쪽에선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독립 선포 하루 전 지린시 시장과 북부전구 부사령원이 찾아와서 엉뚱한 소리만 지껄인 게 전부였다.

“조선족이 독립하면, 연변 지역에 몬스터가 출몰해도 지린성 정부와 북부전구의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거요.”

“당장 레벨 8을 능가하는 몬스터 여러 마리가 랴오닝성과 지린성을 휩쓸고 있소. 몰살당하고 싶지 않으면 독립을 포기하시오.”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버렸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댁들이나 잘 하쇼!”

그렇게 자치국 독립까지 순조롭게 마치고, 유지훈 일행이 귀국길에 오를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뜻하지 않은 손님이 자치국 정부를 찾아왔다.

자치국 정부 수반 조호견이 손님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에이~. 나는 이제 여기 일에서 손 뗀다고 했잖아. 이제 자치국 일은 그쪽이 알아서 좀 해.”

“정부 일이라면 당연히 그리 하겠는데, 이번 손님은 유지훈 초인께서 만나보셔야 할 것 같소.”

“누구길래···.”

접견실에 가니 침통한 표정의 낯익은 중년 사내가 있었다.

긴 백발을 단정하게 묶은 중년 사내. 곤륜의 사부 랴오위안허였다.

유지훈을 보더니 대뜸 무릎부터 꿇었다.

“유지훈 초인! 중국을 도와주시오. 아니 살려주시오!”

***

낭만이 사라진 시대

그동안 랴오위안허는 사실상 낙향하다시피 한 채 지냈다.

지린성 창춘시에서 유지훈을 만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고 인정한 이후부터였다.

팔대 사부 진영에서도 후위로 물러났고, 연변 조선족 자치국으로 진격하는 작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후방만 지키다가 주석의 요청에 따라 사부들이 퇴각한 뒤, 근거지로 돌아가 은인자중하는 생활을 했다.

랴오위안허는 곤륜의 사부였다. 과거 청해성 곤륜산에 기반을 둔 곤륜파를 계승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랴오위안허가 이끄는 곤륜의 근거지는 청해성에 위치하진 않았다. 산시성 타이위안시에 자리했다. 중앙 정부와 밀접한 연계하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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