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요! 린제이가 비참하게 당하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린제이는 다크 디멘션의 창업주나 다름없는 여인이오. 작전보다 린제이를 기리는 게 우선이란 말이오!”
네이트 브라운과 카를로스 라미레스 사이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저스틴 로저스가 중재에 나섰다.
“두 분 말씀이 다 맞습니다. 린제이에 대한 복수도 중요하고, 실험체 확보 실패를 수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랭글리 놈들은 뭐라고 하고 있소? 설마 우리에게 다 떠넘기려고 하진 않겠지?”
네이트 브라운이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저스틴 로저스는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랬다간 요원 절반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텐데요. 연합 수습 작전을 제안해 왔습니다.”
저스틴 로저스의 시선이 카를로스 라미레스 쪽으로 향했다.
“물론 작전에는 린제이의 복수도 포함됩니다.”
“작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소. 랭글리 놈들 다 집어치우라고 하시오. 나는 당장 저 년놈들을 찢어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소.”
카를로스 라미레스는 당장이라도 중국으로 날아갈 기세였다.
저스틴 로저스가 빙긋 웃으며 카를로스 라미레스를 다독였다.
“미스터 라미레스의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서둘러서는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철저히 준비해서 움직여야지요. 일정 부분 랭글리의 역할을 수용해야 합니다.”
“좋소. 린제이의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할 말 없으니 중국으로 떠날 준비나 하겠소. 작전이든 뭐든 정해지면 알려주시오.”
카를로스 라미레스가 화면을 끄고 퇴장했다.
네이트 브라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성미 급한 인사 같으니···. 그래도 나는 카를로스의 저런 열정을 존경하오. 언제부터인지 나한테는 돈이 최고가 돼버려서···.”
“미스터 브라운 덕분에 다크 디멘션이 풍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시 듣기 좋은 소리에 관해서는 저스틴이 최고로군. 그래. 작전은 어떤 식으로 전개하려고 하오?”
“랭글리의 동아시아 인력 전체가 투입돼 정보를 입수하고 있습니다. 우리 쪽에 최소 1인 이상의 수장 투입을 요구해왔습니다.”
“카를로스가 간다고 했으니 요구에는 부응하겠군. 저스틴은 어쩔 생각이오? 가실 거요?”
“그러고 싶긴 한데 만만치 않군요. 요즘 동부 지역이 심상치 않아서···. 린제이의 공백이 작지 않습니다.”
린제이 탐슨의 근거지는 시카고였다. 뉴욕의 저스틴 로저스와 함께 미국 동부 지역의 빌런을 총괄했다.
린제이 탐슨이 중국으로 떠난 뒤 정부군과 각성자들의 빌런 소탕 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크 디멘션 입장에선 자칫 동부 지역에서 근거지를 잃을 위기였다.
“저스틴은 다크 디멘션의 브레인 아니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지. 내가 가겠소.”
“미스터 브라운께서 직접 가신단 말씀입니까?”
“가야지 어떡하겠소. 카를로스는 복수에만 혈안이 돼 있을 뿐 실험체 확보에는 관심도 없지 않소.”
네이트 브라운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험체만 손에 넣었으면 북미를 넘어 유럽까지 확실히 제패했을 텐데···. 이번에라도 가서 확실히 확보해야 하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랭글리에는 두 분이 합류한다고 통보하겠습니다.”
“그런데 실험체의 행방은 파악할 수 있는 거요? 어디로 숨어버리기라도 하면, 괜히 중국의 심기만 건드리는 꼴이 될 텐데.”
중요한 대목이었다.
실험체에 이식된 생체 인식칩을 추적할 수 있는 단말기는 린제이 탐슨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저도 그 부분이 우려돼서 랭글리에 지적했습니다. 난항이 예상되긴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는 건 아니더군요. 이걸 한 번 보시죠.”
저스틴 로저스가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린제이 탐슨이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장면이 펼쳐졌다.
린제이 탐슨이 자신의 특성에 당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장면에서 저스틴 로저스가 화면을 정지시켰다. 느린 화면으로 재생했다.
이나연이 싸늘한 일성을 날린 뒤 파란 화염을 쏟아내기 직전, 유지훈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린제이 탐슨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너무 빠른 동작이어서 일반 재생에선 발견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으음···. 보면 볼수록 무서운 놈이군. 저놈을 처리해야 실험체의 행방 또한 알 수 있다는 의미로군.”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랭글리 요원들이 추격하고 있긴 합니다만. 만만치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으음. 어쩔 수 없군. 카를로스와 행동을 같이할 수밖에. 하긴. 나 또한 린제이의 복수는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으니.”
“그럼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브라운.”
저스틴 브라운과 네이트 브라운 모두 화면을 끄고 퇴장했다.
다크 디멘션의 두 수장이 유지훈을 노리고 정예와 함께 출격하게 된 상황이었다.
***
“중국에서 이쪽엔 신경도 못 쓸 상황이라는 거네요?”
이윤성이 수집해 분석한 정보는 조선족 자치국에는 고무적이었다.
중국 중앙 정부는 조선족 자치국 독립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북부전구 병력이 도사리고 있긴 했지만, 각성자 병력이 모조리 빠져나간 처지에서 섣불리 행동에 나서긴 힘든 양상이었다.
[실험체가 대단하긴 한 모양입니다. 굵직한 각성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학살을 이어가고 있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적당한 곳으로 몰아넣고 핵미사일이라도 때려 박으면 될 문제 아닌가요? 짱개 놈들 막무가내 생각하면 일도 아닐 것 같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네 영토에 대고 핵미사일을 쏘기엔···. 제거보다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긴. 그 정도 위력을 지닌 무기를 그냥 폐기하긴 아깝겠네요.”
[랭글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SVR과 이스라엘의 모사드도···.]
“잘 됐어요. 제대로 빈집털이하는 셈 치죠. 후딱 독립 선언해버려야겠어요. 아니지. 이참에 지린성 전부 다 먹어버릴까요? 하하하.”
유지훈은 유쾌하게 웃었지만, 이윤성은 걱정스러운 듯했다.
[그것도 좋지만, 자치국 사람들이 지킬 역량이 되겠습니까? 당장 유지훈 씨 돌아오면, 연변 지키기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그게 문제이긴 해요. 조호견 초인도 그렇고, 북한 각성자들이 패기는 있는데, 실력은 부족해서···.”
실제로 북부전구 병력은 유지훈 일행이 떠나기만 기다리는 눈치였다.
각성자 병력이 없다고는 해도, 유지훈 일행이 없는 상황에서 조호견이 이끄는 북한 각성자 부대 정도는 제압할 수 있다고 보는 듯했다.
답답한 사정이 또 하나 있었다.
당장 강은영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납치당해 무형의 족쇄에 꽁꽁 묶인 채 5m 깊이의 땅속에 묻혀 있었으니···.
관이나 다름없는 상자에 갇힌 상태였으니 사실상 생매장이었다. 트라우마가 안 생기면 이상한 상황이었다.
자치국으로 온 이후 강은영은 줄곧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잘 자는 것도 아니었다. 악몽에 시달리는 듯 자면서도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유지훈은 달려가서 곁을 지켜야 했다.
“그 실험체라는 것들 이쪽으로는 안 와야 할 텐데···. 이럴 때 오면 골치 아프지 않겠는가?”
세상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화무결도 실험체에 대해서는 적잖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유지훈도 그 점을 고려해 생체 인식칩 위치추적기를 확보했다.
“다행히 당분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안후이성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거든. 후베이성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아.”
“이쪽에서 멀어지고 있군.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
멀어지고 있긴 했지만, 불길한 존재들이었다.
미친 마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언젠가 마주칠 운명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뇌리에 인식된 것이었다.
무림에서 지낸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예감은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오길 기다리기보다 찾아가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위치추적기를 챙겼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찾아갈 수도 없고, 찾아와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장웨이지인가 하는 정신 계열 초인 녀석이 와도 난감할 것 같은데···.”
뭔가 묘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럴 때면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곤 했던 유지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떠올랐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
대한민국 서해안의 무인도.
컨테이너 지붕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사내의 안색은 초췌했다.
담배 한 모금을 빨아 내뱉는 연기가 유난히 짙어 보였다. 깊은 한숨을 머금었기 때문인 듯했다.
“하아···.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얘는 1주일이면 온다더니 한 달이 다 되도록 소식도 없고. 휴우···.”
컨테이너 세 개로 만든 거처는 나름 괜찮았다.
발전기도 설치했고, 웬만한 가전 기기도 최신 제품으로 싹 구비해 놓았기에 지내기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원격 근무 시스템까지 구축된 덕분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업무를 처리하는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사내는 나름 고독을 즐긴다고 자부해 왔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삶을 동경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무인도의 고즈넉한 삶. 1주일 만에 질려버렸다.
처음 이삼일 동안은 직원들로부터 업무 연락이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뚝 끊겼다.
쓸데없이 연락하는 일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긴 했지만, 완전히 끊어버릴 줄은 몰랐다.
주인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를 대견하게 여겨야 하는 건가.
단절의 삶이 주는 낭만은 딱 1주일이면 충분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삶이 그리워졌다.
바다에서 거대한 놈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몬스터들이었다. 여덟 마리나 됐다. 몸길이 20m쯤 되는 녀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고, 몸길이 50m의 어마어마한 녀석이 뒤따랐다.
“놀아달라고 하지 마라. 너무 커져서 무섭다. 잡아먹힐까 봐.”
안 그래도 녀석들은 입에 거대한 놈들을 하나씩 물고 있었다.
해양 몬스터를 사냥하고 돌아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너희들 덕분에 서해안이 몬스터 청정 구역이 됐구나. 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열흘 만에 오는 전화였다. 발신인은 더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유지훈 초인님!”
[이자걸 대표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섬에서 적적하지 않으세요?]
잘 못 지내고, 적적하지만, 일단 아닌 척하는 게 장사꾼의 섭리였다.
“잘 지냅니다. 낭만이 뭔지 제대로 느끼면서요.”
[녀석들 지내기에 좁진 않습니까?]
“좁긴요. 바다가 녀석들 놀이터인데요.”
[그렇군요. 아쉽게 됐네요. 여기 땅은 넓은데, 사람은 없어서요. 노는 땅에 녀석들 와서 지내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바로 가겠습니다!”
딴소리 나올까 봐 일단 전화부터 끊었다.
바로 비서실장에게 연락했다.
“실장님. 여기 철거 진행해주세요.”
[돌아오시는 겁니까? 대표님.]
안타까워하는 비서실장의 반응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여덟 마리 거대 왕도마뱀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얘들아! 이사 가자!”
교통수단 따위는 마련할 이유가 없었다.
몸길이 50m의 거대 왕도마뱀은 항공모함 못지않은 안전한 이동수단이었으니.
***
재림을 예고한 어둠의 존재
중국 후베이성 성도 우한시. 동호 인근 고풍적인 건물에 세련된 분위기의 젊은 남녀가 들어섰다.
청년은 뭐가 즐거운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여인은 냉막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좀 웃어. 이제 즐길 때도 되지 않았어?”
청년이 핀잔을 주듯 말하자, 여인의 표정은 한층 싸늘해졌다.
“즐기고 있는 거야.”
남녀가 로비를 지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서는 순간, 요란한 함성과 함께 사람들이 몰려 내려왔다.
검과 도 그리고 창을 휘두르는 사람들과 적수공권으로 무형의 기운을 발출하는 사람들 그리고 총을 쏘아대는 사람들까지···.
거센 파도처럼 남녀에게 밀어닥쳤다.
“환영 인사가 격하네!”
청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인은 무표정하게 코웃음만 흘렸다.
청년이 땅을 박차더니 밀려드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인은 무심하게 뒤를 따랐다. 우아하게 양손을 휘저으며.
“죽여라!”
무당의 각성자들이었다.
사부 장웨이지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키운 각성자 조직의 전사들이었다. 최대한의 마나를 뿜어내며 공세를 취했다.
“그나마 쓸 만한 놈들인데!”
청년이 흥겨워했다.
방어 따윈 없었다. 공격은 오는 족족 맞아줬다.
전신이 상처로 뒤덮일수록 입가의 웃음은 짙어졌다.
상처는 빠르게 회복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달려들어 손을 뻗었고, 잡히는 대로 머리를 잡아 뽑았다.
여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심하게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무당의 각성자들이 필사적으로 쏘아낸 공세는 대수롭지 않은 여인의 손짓에 위력을 잃었다. 공격 자체가 소멸했다.
여인의 손길이 스친 곳은 까맣게 타버렸다. 이내 재가 돼 사라졌다. 응축된 마나의 공세도, 마나를 발출한 사람도···.
학살이었다.
확연히 구분되는 두 분위기의 남녀에 의한.
***
건물 4층 중앙 넓은 공간에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운데 중년 사내를 호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의 변화를 감지하는 중년 사내. 무당의 사부 장웨이지였다. 실질적인 중국 최강의 초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부. 몸을 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사부께서는 후일을 도모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