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50)

“그래요. 인간 같지 않은 존재. 드래곤 헤드의 머리를 뽑아버리는 존재를 인간이라 할 순 없겠죠.”

“드래곤 헤드?”

“흑룡회의 수장, 드레곤 헤드 리자오슝. 중국 최강의 초인, 어쩌면 세계 최강의 초인일 수도 있는 자죠.”

린제이 탐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을 이어갔다.

“실험체예요. 중국 정부 차원에서 진행한 비밀 프로젝트. 이른바 슈퍼 솔져 프로젝트의 결실이죠. 나는 그걸 원해요.”

“중국 정부 차원의 실험이라고···?”

유지훈이 눈살을 찌푸리자, 린제이 탐슨이 빙긋 웃었다.

“감히 중국 정부의 자산을 탐내냐고 물으시는 것 같군요. 대답하기 전에 여기가 어딘 지부터 말씀드리는 게 좋을 듯싶네요.”

린제이 탐슨이 집을 죽 둘러봤다.

“랭글리의 비밀 가옥이에요. 못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다크 디멘션과 랭글리가 손을 잡고 진행하는 작전이에요.”

“랭글리? CIA?”

린제이 탐슨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뒤 설명을 이어갔다.

“거액을 지불하고 확보한 실험체예요. 랭글리와 다크 디멘션이 정확하게 반반씩 투자했죠.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일 줄 모르고 관리를 소홀히 했네요. 멸실됐어요. 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를 인질 삼아서?”

유지훈이 뒤에 있는 이나연을 슬쩍 돌아봤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였다.

일본에서의 기억. 이나연을 납치해 유지훈을 확보하려던 시도였다.

이나연에 의하면 엄청난 정보력을 지닌 조직이라고 했다. 빌런 조직도 연루됐다고 했고.

어째 지금 상황과 아귀가 맞는 듯했다.

이나연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사죄드릴게요. 그 방법이 아니고는 유지훈 씨를 움직일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요.”

린제이 탐슨이 싹싹하게 사과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저는 유지훈 씨한테 악감정이 있어요. 동생이 일본에서 임무 수행 중에 유지훈 씨 손에 죽었거든요.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동생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게요.”

유지훈이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실험체는 어떻게 찾지? 마냥 찾아다녀야 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다크 디멘션과 랭글리가 그 정도로 무모하고 무능한 조직은 아니에요. 실험체를 확보했을 때 생체 인식칩을 이식해뒀어요. 현재 위치는 언제든 파악할 수 있답니다.”

린제이 탐슨이 휴대폰 크기의 단말기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그럼 이제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매듭지을 때군.”

“뭐든 말씀하세요.”

“지금 그녀가 고립돼 있다고 했지? 얼마 동안 안전한 거지? 언제까지 가야 무사할 수 있는지 묻는 거야.”

“으음.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네요. 일단 음식이 공급되지 않는 점을 고려해야 하고···. 밀폐된 공간이니 산소 공급도 문제일 수 있겠군요.”

린제이 탐슨이 중얼중얼 뭔가를 계산했다.

“여기 오기 전에 밥은 든든히 먹였으니 그건 문제없을 테고···. 산소 부분은 넉넉잡아 이틀 정도겠네요. 그러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밀폐된 공간에 산소 공급이 문제라···. 관 같은 데 넣어서 땅에 묻어두기라도 한 모양이군.”

“잔인한 말씀이네요. 뭐. 비슷하긴 해요.”

린제이 탐슨이 긍정하는 반응을 보이자, 유지훈이 씩 웃었다.

“그럼 됐어. 넌 이만 죽어도 되겠어.”

유지훈의 손에서 거무스름한 빛의 검이 생성됐다.

심검의 특성이 발동된 것이었다.

“어림없어!”

린제이 탐슨은 감지 능력이 비상한 여인이었다.

대화 과정에서 유지훈의 태도 변화를 파악하고 준비하던 상태였다.

벼락같이 양손을 내질렀다. 특성을 발동했다.

린제이 탐슨의 특성 에테르 페터(Ether Fetter). 응축된 마나로 이뤄진 무형의 족쇄가 전신을 옭아매는 이능이었다.

일단 묶이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몸부림칠수록 더욱 강력하게 옭아매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에테르 페터가 유지훈을 덮쳐갔다. 심검이 완전히 발동되기 전이었다. 베어내기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게. 좋게 말로 했을 때 함께 하면 서로한테 좋았잖아요.”

린제이 탐슨은 에테르 페터가 유지훈을 꽁꽁 묶어버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가가서 제압한 뒤 협상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이제는 좀 더 많은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엇! 이게 뭐야!”

유지훈을 집어삼켰던 무형의 족쇄가 고스란히 돌아왔다.

린제이 톰슨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건 린제이 탐슨 자신이었다.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 이러면 그녀가 위험해요. 나 말고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상관없어. 이미 말했잖아. 넌 죽어도 된다고.”

유지훈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빛의 검을 치켜들었다.

***

연길시를 떠나 선양시로 향하는 길. 운전대는 유지훈이 잡았다.

촌각을 다툰다는 생각에 운전 내내 속도를 높였다. 어느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가?”

“유지훈 씨 무슨 일이에요?”

급브레이크에 놀란 화무결과 이나연이 물었다.

유지훈은 양손을 휘저었다.

“잠깐만. 뭔가 보여.”

“뭐가 보이는데?”

“나도 몰라. 가만히 좀 있어 봐.”

유지훈이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낯선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어둠. 서서히 확보되는 시야. 좁은 공간. 낮은 천장···.

장면들이 모두 지나간 뒤 떠오른 건 두 개의 숫자였다.

[41.7922277 123.4327855]

다시금 눈앞이 하얘졌다가, 눈앞의 사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위도와 경도 같은데···. 텔레파시라도 보낸 건가?”

“뭔데 그러는가?”

화무결의 질문에 유지훈이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들을 들려줬다.

“좁은 공간에 낮은 천장이면 커다란 상자 같은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세 명 정도 누우면 꽉 찰 넓이에, 앉으면 머리가 닿을 듯한 높이였어요.”

“은영 언니가 갇혀 있는 장소일 가능성이 크네요. 숫자들 좀 불러보세요. 위치 확인해 볼게요.”

유지훈이 차례대로 두 개의 숫자를 불렀다.

이나연이 휴대폰 위치 탐색 애플리케이션에 입력했다.

“선양시 동남쪽으로 나오네요. 산 중턱 같아요. 지금 우리가 가는 곳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이에요.”

“자네 내자가 갇힌 곳일 가능성이 농후하군. 그럼 지금 바로 이쪽으로 갈 텐가?”

잠시 고민하던 유지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미친 마녀한테 가보는 게 좋겠어. 갔다가 아니면 약속에 늦을 수도 있잖아. 만나서 넌지시 떠본 다음에 방향을 정하든지 하자고.”

“그게 좋겠어요. 미친 마녀가 당장 은영 언니를 해칠 리는 없으니까요. 유지훈 씨한테 도움을 청하는 처지에.”

일정 부분 핸디캡을 덜어낸 상태로 린제이 탐슨을 만나게 됐다.

다시 운전대를 잡은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은영의 특성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데,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도 있는 거였나? 특성이 진화한 거야?”

그런 과정을 거쳐 린제이 탐슨과 만났다.

대화 과정에서 은근히 강은영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관 같은 데 넣어서 땅에 묻었다는 부분의 확인이 결정타였다.

위도와 경도가 가리킨 산 중턱을 파헤치면 강은영을 가둔 상자를 찾을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미친 마녀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린제이 탐슨은 세계 최강 빌런 조직의 네 수장 중 하나.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유지훈의 태도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감지했다.

곧바로 특성을 에테르 페터를 발동해 선공에 나섰다. 유지훈의 반사기로 인해 무형의 족쇄에 묶이는 신세가 됐다.

수하들이 다급히 구하려 했지만, 화무결의 손짓 두어 번에 멀찍이 날아가 처박혔다. 진작부터 도움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를 해치면 그녀 또한 무사할 수 없을 거예요!”

발악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유지훈은 빛의 검이 그녀를 사정없이 갈라버릴 기세였다.

“잠시만요.”

이나연이 가로막고 나섰다.

린제이 탐슨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잘못 알고 있었어요.”

“뭐를···?”

“당신 동생을 죽인 건 유지훈 씨가 아니에요. 나예요. 당신 눈빛이 왠지 낯설지 않더니. 동생 눈빛과 닮았군요. 동생 만나면 전해주세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이나연의 손에 파란 화염이 생성돼 나왔다.

린제이 탐슨의 전신을 싸고돌더니 찬란하게 불꽃을 피운 뒤 소멸했다. 린제이 탐슨의 육신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서둘러 위도와 경도가 가리킨 장소로 달려갔다.

뭔가를 파묻은 흔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근처에 삽은 없었다. 다행히 이들에겐 화무결이 있었다.

포 크레인보다 수만 배는 강한 조공(爪功)의 소유자.

손짓 몇 번에 땅이 수북수북 파헤쳐졌다.

5m 가까이 파고 들어가자 커다란 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엔 역시 강은영이 있었다. 까무룩 잠든 채로.

“괜히 걱정했네. 잠만 잘 자잖아.”

“피곤했던 모양이군. 그럴 만도 하지.”

“은영 언니는 자고 있을 때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유지훈이 안아 들었다.

강은영이 뒤척이며 유지훈의 목을 감아 안았다.

“유지훈 씨예요?”

“응. 나야.”

“역시 와줬군요. 성공한 모양이네요.”

“응. 잘했어. 훌륭해.”

“미안해요. 내가 괜한 짓을 했어요.”

“알면 됐어.”

강은영이 눈을 꼭 감은 채로 입을 비쭉였다.

“나 책임지기로 한 거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

“혼자 있기 싫어요. 무서워요.”

“다 큰 어른이 무섭긴···. 오늘은 옆에 있어 줄게.”

유지훈이 강은영을 안아 들고 차에 태웠다.

“운전은 제가 할게요.”

이나연이 싹싹하게 운전석에 앉았다.

화무결이 혀를 끌끌 찼다.

“운전은 그냥 저 친구한테 맡기면 안 되겠는가? 도저히 눈꼴시어서 못 보겠는데···.”

“저도 그거 보기 싫어서 운전한다고 한 거예요. 운전하면서 저러면 위험하기까지 하잖아요.”

***

기막힌 묘수

거대한 화면에 린제이 탐슨의 최후가 공개되고 있었다.

화상 회의가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뉴욕과 LA 그리고 휴스턴이 연결된 원격 회의였다.

각 도시의 화면 앞에는 심상치 않은 표정의 세 사내가 앉아 있었다. 옆에는 무거운 안색의 수하들을 세워둔 채.

“여기까지가 랭글리에서 보내온 영상입니다.”

이나연의 파란 화염이 찬란한 광휘를 일으킨 뒤 린제이 탐슨과 함께 소멸한 장면에서 영상은 정지됐다.

뉴욕의 사내, 저스틴 로저스가 서두를 열었다.

서글서글한 용모의 백인 중년 사내, 다크 디멘션의 서열 1위 수장이었다. 화상 회의를 주재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겠군. 감히 다크 디멘션을 건드리다니. 당장 복수해야 하지 않겠소.”

휴스턴의 사내, 카를로스 라미레스가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날카로운 인상의 히스패닉 중년 사내. 다크 디멘션의 서열 4위 수장이었다. 폭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복수보다 중요한 건 작전 실패 아니겠소? 그 부분부터 수습하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

LA의 사내, 네이트 브라운이 삐딱한 어조로 반박했다.

느물느물한 분위기의 흑인 중년 사내. 다크 디멘션의 서열 2위 수장인 동시에 재정을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돈을 중시하는 성정이다 보니, 린제이 탐슨의 죽음보다 작전 실패에 방점을 두고 상황을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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