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우리 입장에서 나쁠 건 없네요. 중국 정부에서 조선족 자치국 독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긴 한데, 유지훈 초인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흉수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로 움직이는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그럴게요.”
유지훈이 순순히 응했다.
예전 같으면 조심할 게 뭐 있냐는 광오한 반응을 보였을 텐데, 장웨이지의 특성을 경험한 뒤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흉수가 어떤 놈인지 알려지는 대로 전해주세요.”
상대를 모르는 상황에서 섣부른 행동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부들인지 하는 작자들 대응에 대해서도 파악해주시고요.”
흉수와 사부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지켜보기로 했다.
흉수의 정체와 실력이 뚜렷이 파악되기 전까지는 자치국의 독립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국장님. 요즘 은영은 뭐합니까? 많이 바쁩니까?”
[강 국장님요? 글쎄요. 저도 연락 안 해본 지 제법 돼서···. 강 국장 근황도 파악해서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상황은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흉수의 정체는 뜻하지 않게 빨리 알게 됐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그것도 몹시 기분 나쁜.
***
전화가 왔다.
발신자 제한이 표시된 전화였다.
“여보세요.”
[유지훈 씨?]
낭랑한 음성의 여인이었다.
말투는 몹시 어색했다. 기계가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린제이 탐슨이라고 해요. 미친 마녀라고도 불리죠.]
“미친 마녀? 뭐야. 장난 전화야?”
끊으려고 했지만, 이어진 여인의 말에 수화기를 놓을 수 없었다.
[끊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랬다간 중요한 사람의 머리를 전달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중요한 사람?
대번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얼마 전부터 지독스럽게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유지훈에겐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신 뭐야? 장난이면 죽어. 장난이 아니어도 죽고.”
[호호호. 무서워서 말이나 꺼낼 수 있겠어요. 이미 말했듯이 저는 린제이 탐슨이에요. 미친 마녀. 그리고 장난 아니에요. 그래도 죽는다고 했나요? 선택권도 안 주면 저는 뭘 할 수 있을까요?]
린제이 탐슨이 잠시 유지훈의 반응을 기다렸다.
유지훈은 반응하지 않았다. 딱히 반응할 게 없었다. 주도권은 상대가 쥔 양상이었으니.
[좋아요. 대화할 준비가 된 모양이군요. 제가 말하는 게 많이 어색할 거예요. 통역기를 거쳐서 그래요. 한국말을 몰라서. 이해해주세요.]
“시끄럽고. 중요한 사람이 어쨌다는 거야. 빨리 용건이나 말해.”
[급하시긴. 아름다운 분이더군요. 실력도 뛰어나고. 다만 제가 더 강했어요. 그래서 제압된 거죠. 잘 모셔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은영이 그녀에게 잡혀있다고 엄포를 놓는 양상이었다.
[그분의 안위는 유지훈 씨에게 달려 있어요. 유지훈 씨가 잘 협조하면, 무사히 유지훈 씨 품으로 돌아가는 거고. 협조하지 않으면, 소금에 절여진 머리가 유지훈 씨 손에 쥐어지겠죠.]
“알았으니까 원하는 게 뭐야?”
[유지훈 씨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도움?”
[손에 넣어야 할 게 있는데, 제 능력으로는 버겁네요. 유지훈 씨가 나를 도와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군요.]
“손에 넣어야 할 게 뭔데?”
[전화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군요. 우리 만나죠. 이야기 들으면 유지훈 씨도 구미가 당길 거예요.]
린제이 탐슨은 중국 선양 교외의 전원주택을 만남 장소로 알려줬다. 시간은 5시간 후였다.
선양은 연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서두르면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참고로 저는 그분이 있는 곳을 약속 장소로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답니다. 그분은 일을 마칠 때까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곱게 모셔져 있을 거예요.]
“당장 가겠다.”
[굳이 혼자 오실 필요는 없는데, 허튼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소금에 절인 그분의 머리를 보고 싶으면 상관없지만요. 뭐. 그래도 아름다울 것 같긴 하네요. 같은 여자로서 부러울 정도로.]
전화를 끊자마자 이윤성에게 연락했다.
강은영의 최근 행적을 파악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유지훈의 음성에서 다급함을 읽은 이윤성이 최대한 서둘렀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결과를 알려왔다.
[국가안전본부에는 영훈길드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있다며 한동안 본부 업무를 볼 수 없다고 했답니다. 이틀 전 인천공항을 통해 중국 선양으로 출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휴대폰 위치 추적은요? 위성 전화를 가지고 다니니까 파악할 수 있지 않나요?”
[휴대폰 위치 신호는 선양공항 인근으로 잡힙니다. 선양에 있는 우리 쪽 사람에게 가보라고 해놓긴 했습니다.]
강은영을 잡아두고 있다는 린제이 탐슨의 말이 사실에 근접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며칠 전 통화 중 전화가 끊긴 일과 전화를 받지 않은 부분도 설명이 됐다.
강은영은 납치당한 것이었다.
“국장님 혹시 린제이 탐슨이라고 아십니까? 미친 마녀라고 하던데.”
[린제인 탐슨이라고요? 그 여자가 강 국장을 데려갔다고 합니까?]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윤성의 음성에서 경악이 전해졌다.
[인세인 위치. 미친 마녀 맞습니다. 다크 디멘션의 네 수장 중 하나입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크 디멘션이면···?”
[미국에 근거지를 둔 빌런 조직입니다. 흑룡회와 함께 세계 양대 빌런 조직이라 불리는···. 이제는 원톱 빌런 조직이 됐군요.]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흑룡회가 궤멸에 가까운 화를 당한 상황에 중국에 나타난 다크 디멘션의 수장이라니.
[심상치 않습니다. 흑룡회와 다크 디멘션 사이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흑룡회가 무너진 시점에 인세인 위치가 중국에 있다는 건···.]
“흑룡회의 붕괴가 다크 디멘션과 무관하지 않으리란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다크 디멘션이 관계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린제이 탐슨의 요구 사항이었다.
“미친 마녀가 손에 넣어야 할 게 있다고 했어요. 자기 능력으로는 버겁다며 도와달라고 하던데요.”
[흑룡회를 그렇게 만든 것과 관계있는 물건 같군요. 정보 조직을 총동원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좀 있으면 만날 텐데요. 바로 출발해야 할 형편입니다.”
[조심하셔야 할 텐데요. 혼자 가십니까? 필요하시면 마철진 초인이나 임정명 초인을 선양으로 가시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무결이랑 나연 씨가 함께 갈 겁니다. 셋이면 미친 마녀 일당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이윤성으로서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호언장담이었다.
팔대 사부에 초인들까지, 중국 각성자 전력의 절반 이상을 무참히 박살 낸 능력자들이었다.
다크 디멘션 전체가 몰려들어도 걱정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다크 디멘션의 궤멸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유지훈은 걱정해야 할 일을 다짐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번 일을 마치고 나면 다음 타깃은 다크 디멘션입니다. 지구상에서 말끔히 지워버릴 겁니다.”
미친 마녀가 사람 잘못 건드렸다.
***
강은영은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
몹시 좁은 공간이었다. 두세 명 누우면 꽉 찰 정도였다. 천장도 낮았다. 앉으면 머리가 닿을 높이였다.
커다란 상자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뭔가로 꽁꽁 묶인 느낌이었다.
형체가 없는 무언가였다. 특성에 제압당한 것이었다.
눈이 가려져 있었고, 입에도 재갈이 물려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코로 숨 쉬는 것 외엔.
이따금 재갈이 벗겨지고 입으로 먹을 게 들어왔다. 숨 쉬고 먹는 것, 그게 지금 강은영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에잇. 쓸모없는 년. 괜히 서프라이즈 방문을 한다고 해서···. 유지훈 씨한테 제대로 폐를 끼치게 됐잖아. 멍청한 년···.’
조선족 자치국으로 깜짝 방문해 유지훈을 놀라게 해줄 계획이었다.
선양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빌리러 이동할 때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아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양상이었다.
그리고 차에 태워졌다. 어디론가 이동해 여기에 감금당했다.
“유지훈 씨가 요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강은영 씨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낭랑한 음성의 여인이었다.
납치했지만, 신체적인 위해는 가하지 않았다.
대신 무시무시한 위협이 되는 한마디를 남겼다.
“유지훈 씨가 요구를 거절해도 강은영 씨는 유지훈 씨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머리만요.”
인질이 된 것이었다.
아무리 자책해도 소용없었다.
유지훈이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관심 밖이었다. 그저 자신으로 인해 유지훈이 위험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엄동력을 사용해 뭔가 해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움직일 사물을 지정할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손이 묶여 있으면 염동력을 발동할 수 없는 것일까?
특성이 둘이나 있으면 뭐하나. 꽁꽁 묶이면 써먹지도 못할 것을···.
또 하나의 특성이 생각났다. 인간 내비게이터.
발동한다고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발동해봤다. 유지훈을 떠올렸다. 위치가 머리에 떠올랐다. 차를 몰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시···?’
대상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의 반대도 성립할까?
특성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훈에게 알리는 방향으로도 작용할지 궁금해졌다.
‘궁금해할 필요 뭐 있어. 해보면 되지. 이도 저도 못하는 처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유지훈에게 위치를 알리려 기를 썼다.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를 하는 느낌이었다.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투명해졌다.
‘된 건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각성의 진화 (2)
“세 분이 함께 오셨네요. 물론 저를 도울 분들이시겠죠? 좋아요. 든든하군요.”
선양시 교외 작은 주택.
금발 미녀가 환한 미소로 유지훈 일행을 맞이했다.
린제이 탐슨은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손에 쥔 카드면 유지훈 일행을 자신의 의도 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습이었다.
전화를 통해 들려온 유지훈의 음성과 분위기에서 확신을 얻었다. 직접 만나 확인한 표정은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그녀는 어디 있지?”
유지훈이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무심한 눈빛 이면에 애써 초조함을 갈무리한 표정이었다.
질문하면서 집 내부를 살폈다.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집안에 그리 많은 인원은 없었다. 린제이 탐슨 외에 다섯 명의 여인 그리고 세 명의 남성이 전부였다.
여인들과 남성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여인들은 린제이 탐슨의 수하들로 보이는 반면, 남성들은 별개의 조직에 속한 듯한 인상이었다.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엔 없어요. 물론 안전해요. 저는 약속은 확실히 지키거든요.”
약속을 언급할 때 린제이 탐슨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의 약속, 강은영의 머리만 보게 될 거라는 단언을 상기시키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확인할 수 있지? 그녀의 안전.”
“신뢰도 없이 어떻게 큰일을 치를 수 있겠어요. 내가 안전하다면 안전한 거예요.”
린제이 탐슨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안전한 곳에 있어요. 바꿔 말하면 원만히 일을 마치고 가지 않으면 영원히 고립될 수도 있다는 의미예요.”
유지훈이 미세한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원하는 게 뭐지?”
린제이 탐슨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지훈의 코웃음이 신경 쓰인 듯했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나를 도와주셨으면 해요. 원하는 게 있는데 내 능력으로는 버거워서요.”
“다크 디멘션의 수장에게 버거운 게 있나?”
“호호호. 그래 봤자 똑같은 인간이에요.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손에 넣으려 하면 버겁지 않겠어요?”
린제이 탐슨이 빙긋 웃은 뒤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가 중국인 점도 버거운 이유가 되겠네요. 미국이면 있는 인원, 없는 인원 다 때려 박아서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인간 같지 않은 존재를 원한다고?”
유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흑룡회를 궤멸로 몰아넣은 존재···.
린제이 탐슨의 입에서도 같은 존재가 언급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