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50)

‘그래. 이제부터 머리를 쓰자. 머리를 들이대는 거야.’

진작부터 장웨이지는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유지훈이 애써 피하거나 막아온 상황이었다. 상처투성이의 팔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보호한 흔적이었다.

가드부터 내렸다.

팔이 자유로워진 순간이었다.

보법과 몸놀림에서 얽매임도 사라졌다.

탕! 탕! 탕!

쇄도하는 총탄을 가로질러 장웨이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장웨이지의 눈빛에 당혹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의아해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어찌 가드를 내리고 가장 취약한 부분을 훤히 드러내지?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장웨이지는 침착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유지훈이 면전에 다가왔지만, 당혹감은 잠시였다. 이내 차분하게 총구를 유지훈의 두상 쪽으로 향했다.

유지훈은 피하거나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기세를 몰아 더욱 가깝게 접근했다. 머리를 총구에 가져다 댔다. 동시에 총을 쥔 장웨이지의 손을 붙잡았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팔목을 비틀어 총열을 어긋나게 할 생각이었다. 총탄이 이마를 스치는 정도는 허용할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머리의 살을 내주고, 팔목의 뼈를 취하는 작전이 완성될 찰나였다.

“그렇지! 걸려들었어!”

장웨이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빙긋 웃었다.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탄식 섞인 외마디를 남기고는 자취를 감춰다.

유지훈이 움켜쥐고 있던 손 또한 모래알이 흘러내리듯 사라졌다.

“뭐야! 이건.”

잠시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이내 환해졌다.

장웨이지가 지배하던 공간, 무의식의 공간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져 있었다.

“허허. 이건 또 뭐야···.”

처참하게 도륙당한 수백 구의 시신.

그리고 수백 명의 각성자를 무참히 학살한 무림 천하제일인.

그가 치켜세운 검은 푸르스름한 강기를 머금고 있었다.

“자네 드디어 깨어났는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유지훈의 눈을 확인한 화무결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검의 강기 또한 스르륵 사라졌다.

주저앉은 자세로도 시선은 한 곳에 고정돼 있었다. 중국 각성자들이 퇴각하는 방향이었다.

역시 수백 명에 달했다. 화무결의 검에 죽은 숫자와 퇴각하는 숫자가 얼추 비슷해 보였다.

화무결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내공의 소모가 극심한 듯했다.

“적절한 순간에 깨어났군. 진원진기까지 끌어쓸 판국이었네.”

그제야 사부들이 이끄는 무리의 전술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장웨이지의 정신 계열 특성으로 유지훈을 무의식의 공간에 가둔 뒤 모든 인원을 투입해 몰아치는 작전이었다.

무서운 작전이었다. 화무결이 버텨내지 못했거나, 유지훈이 벗어나지 못했으면, 처참하게 당했을 터였다.

“어떻게 된 거야?”

유지훈이 퇴각하는 각성자 무리를 가리켰다.

화무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묻고 싶은 건데? 자네가 처치한 거 아니었나? 정신 계열 각성자인지 하는 놈을?”

“아닌데. 제압하려는 순간 빠져나갔어.”

“흐음···.”

화무결이 미간을 좁히더니 물었다.

“섭혼술인가?”

“비슷해. 트라우마를 공략하더군.”

“트라···우마?”

“트라우마는 처음 들어본 말인가? 그럼 마상.”

“마상? 그건 또 뭔가?”

“마음의 상처.”

“아하. 괜찮은 표현이군. 기억해뒀다가 써먹어야겠네.”

화무결이 시답잖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뒤 말했다.

“무림의 섭혼술과는 사뭇 다른 듯하네.”

유지훈의 전신을 뒤덮은 핏자국을 가리켰다.

총상에 의한 출혈의 흔적들이었다. 재생 능력이 발동해 상처는 사라졌지만, 핏자국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정신 계열의 특성으로 시공간을 왜곡한 것 같아.”

“시공간을 왜곡했다고? 어떤 특성이길래···.”

“무의식의 공간을 현실 공간과 일치시키는 능력이 아닐까 싶은데···. 과거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서···. 감당하기 쉽지 않았어.”

유지훈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겪은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화무결이 미간을 좁혔다. 사뭇 심각한 표정이었다.

“만일 내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극복할 자신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었다.

천마와 상대하던 순간이었다.

절대적인 힘의 차이에 압도당했다.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던 공포의 순간이었다.

“너로서도 만만치는 않을 거야. 나야 본체의 재생 능력 덕분에 어느 정도 핸디캡을 덜 수 있었는데, 그런 능력이 없으면···.”

“적당한 대응책이 없으면 상대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의미로군.”

화무결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당한 대응책이라···.”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정신 계열 특성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였다.

이 부분은 노련한 각성자들과 상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마음의 상처를 건드렸다고 했으니,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 상대하는 방법은 어떻겠나?”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린다고?”

가능한 방법 같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에 생각이 미쳤다.

딱히 떠오르는 순간은 없었다.

절대적인 힘을 보유하게 된 건 순간이라기보다 과정이었다. 그리고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거운 짐일 수도 있으니.

이런저런 순간들을 떠올리다가 한순간에 멈췄다.

피식 웃었다.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잖아.”

“뭔가 빼먹은 일이라도 있는가?”

“저놈들 어디로 가는지는 파악해봐야지.”

갑자기 퇴각한 이유를 당장 알 순 없었지만,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이유에도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인간 내비게이터에게.

“전화를 안 받네. 조금 전엔 갑자기 연결이 끊어지더니 이번엔 아예 받지도 않네. 무슨 일이야.”

몇 차례 더 걸어봤지만, 신호음만 이어질 뿐이었다.

찜찜한 기분이 없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특성을 두 개나 보유한 각성자인 만큼 문제가 생길 여지는 없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퇴각한 중국 각성자들의 위치 파악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래야 유지훈과 화무결 또한 다음 행보를 정할 수 있으니.

“이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우리도 쫓아가든지 돌아가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잠자코 지켜보던 화무결이 대안을 제시했다.

“멀끔하게 생긴 놈한테 알아보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정보를 다루는 놈이니 알아볼 방법이 있을 듯한데.”

“멀끔하게 생긴 놈? 아~. 이윤성 국장.”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받았다.

[유지훈 초인님. 별일 없이 잘 계십니까?]

“별일은 있어요. 설명하자면 기니까 나중에 말씀드리고요. 일단 뭐 하나 좀 알아봐 주세요.”

일단 이러쿵저러쿵 과정부터 설명했다.

이윤성은 스마트했다. 듣자마자 상황을 캐치했다.

[팔대 사부는 국가 주석의 지시만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갑작스럽게 퇴각했으면, 그쪽에서 뭔가 전달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하···.”

[중국 정부가 동요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파악해서 연락이 오려면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마냥 죽치고 기다릴 순 없는 형편이었다.

무엇보다 화무결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 초인 여럿을 포함한 수백 명의 각성자를 상대하면서 입은 상처들이 가볍지 않았다.

유지훈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생 능력이 발동됐다고는 하나 총상이 열 군데가 넘었다. 긴장이 풀리니 통증이 몰려왔다.

“일단 연변으로 돌아가자. 정비부터 해야겠어.”

장웨이지의 괴랄한 특성을 떠올리면, 둘로는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원의 재구성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었다.

***

연변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윤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국 정부에 비상이 걸린 듯합니다.]

“무슨 일인데요?”

[흑룡회가 무너졌다는 첩보가 입수됐습니다.]

“흑룡회라면···?”

미국의 다크 디멘션과 함께 세계 빌런계를 양분하는 거대 빌런 조직이었다. 초인급 빌런이 열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 정부의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정부의 비호하에 조직을 키워왔기에 실질적인 세계 최강의 빌런 조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너졌다니···.

[중국 정부 차원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긴 한데요. 회주를 비롯한 흑룡회 핵심 간부 대부분이 시체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흑룡회 회주면 중국 서열 1위라고 할 수 있는 초인 아닌가요?”

[맞습니다. 공식적인 인증은 받지 않았지만, 세계 랭킹 3위 안에는 거뜬히 들 거라고 평가됐습니다. 그런데 목이 뜯겨진 시체로···. 심지어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고 합니다.]

세계 랭킹 3위 안에 들 초인의 목을 잡아 뜯을 정도의 강자는···.

단언컨대 없을 것 같았다. 유지훈조차도 불가능했다. 심검으로 벨 수는 있겠지만, 잡아 뜯는 건 가능한 영역 밖이었다.

[흑룡회는 중국 각성자계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쪽 축이 무너진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부들이 몰려가서 수습해야 할 정도로···.]

“사부들이 몰려간다고 수습이 될까요···.”

중국 대륙에 혈풍이 불어닥칠 조짐이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

각성의 진화 (1)

흑룡회 궤멸에 관한 소식은 계속해서 전해졌다.

이윤성은 중국 내 휴민트를 총동원해 정보를 입수했다. 확인과 분석 과정을 거치는 대로 유지훈에게 전달했다.

[흑룡회에 소속된 초인급 빌런 12명 중 9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중엔 회주와 부회주 넷이 포함됐습니다. 남은 부회주 하나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이윤성의 정보에 따르면 사망자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머리를 공격당한 점이었다. 회주처럼 잡아 뽑힌 경우와 완전히 타서 재가 된 경우 두 가지였다.

[중국 정부에선 흉수를 둘이라 파악하고 있는 듯합니다.]

“달랑 둘이라고요? 둘이서 그게 가능해요?”

[말이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이윤성이 잠시 말을 얼버무리더니 너털웃음과 함께 마무리 지었다.

[당장 유지훈 초인님도 화 선생님과 단둘이 팔대 사부와 초인 무리를 궤멸 지경까지 몰고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나랑 무결이는 특별한 존재니까···.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대요? 내 행적도 조사하신 거예요?”

[그럴 리가요. 따로 조사하진 않았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파악한 사실이 전달됐을 뿐입니다. 저희 휴민트에 의해서요.]

당초 중국 정부는 흑룡회 간부들을 살해한 흉수로 유지훈 일행도 용의 선상에 뒀다. 행적을 수소문한 결과 아니라는 쪽에 무게가 실렸지만, 가능성은 열어둔 상태였다.

사부들을 소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조사를 위한 한편으로 사부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였다.

사부들을 통한 조사 결과 유지훈 일행은 흉수에서 배제됐다. 하지만 흉수가 둘일 수 있다는 점은 확인했다. 유지훈과 화무결 단둘이 수백 명의 각성자들을 척살한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흉수와 더불어 유지훈 일행에 대한 경계까지 추가된 상황이었다.

이윤성은 이 소식을 접하면서 유지훈과 화무결의 활약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 것이었다.

“흑룡회 쪽 피해자는 얼마나 된대요?”

[생각보다 적습니다. 고위 간부들을 제외하고는 오십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위 간부들을 타깃으로 한 모양이네요.”

[그런 듯합니다. 간부 외 희생자들은 간부들과 동행하다가 당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초인급 각성자만 노린다···. 재미있는 놈들이네요. 중국 정부가 제대로 골치 아프겠어요.”

[사부들과 초인들에게 대응을 맡기면서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고 합니다. 개별로 움직이다가는 당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유지훈이 돌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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