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정신 계열 특성이라는 건가? 섭혼술에 관해서는 무림보다 월등하군. 그나저나 이번엔 제대로 애 좀 먹겠는걸.”
소매를 걷어붙였다.
검까지 뽑아 들었다. 현대로 넘어온 뒤 검은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다. 그만큼 위기라는 의미였다.
내공을 끌어올려 검에 불어넣었다. 검 주위로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일더니 짙어졌다. 세 배는 커진 검의 형상을 이뤘다.
검강이었다.
“내공이 얼마나 버텨주려나. 안 되면 진원진기까지 써야지. 다른 놈도 아니고, 지훈이를 지키는 일인데···.”
화무결이 유지훈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눈빛은 사뭇 비장했다.
검강은 내공의 소모가 극심했다. 장시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검강 외에 답은 없었다.
유지훈의 곁을 단단히 지키면서 수백 명의 강적을 상대하려면.
“이 친구야. 빨리 이겨내게. 나 아직 좋은 만남도 못 해봤네.”
유지훈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고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오너라! 다 죽여버리겠다!”
***
무당의 사부 장웨이지는 망원경을 옆에 있는 중년 사내에게 건넸다.
망원경을 통해 유지훈과 눈이 마주친 직후였다. 2km나 되는 먼 거리에서 정신 계열 특성의 발동에 성공한 순간이기도 했다.
“장 사부. 성공하신 거요?”
중년 사내, 화산의 사부 마샤오윈이 망원경을 받아들며 물었다.
장웨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가 사라진 백안의 상태였다.
“그렇소. 그럼 부탁드리겠소.”
눈동자가 사라진 장웨이지의 시선이 유지훈이 있는 방향으로 고정됐다. 전신을 타고 은은한 기운이 일렁였다.
마샤오윈이 장웨이지의 주위를 살핀 뒤 소리쳤다.
“작전을 개시한다!”
세 개 건물에 나뉘어 있던 각성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초인들을 필두로 수백 명의 각성자들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여섯 명은 장웨이지와 마샤오윈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대들은 북두진을 전개하도록 하라.”
마샤오윈의 지시가 떨어지자 여섯 각성자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각각 북두칠성의 위치였다.
중심이 되는 북극성의 위치엔 마샤오윈이 자리했다. 일곱 명이 북두칠성의 형태로 장웨이지를 보호하는 형세를 취한 것이었다.
“장 사부께서 그자를 확실히 억제해주셔야 하오.”
마샤오윈의 시선이 유지훈을 앞을 지키고 선 화무결을 향했다. 푸르스름한 빛무리를 일으킨 검을 쥐고 있는.
“괴물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필승의 국면이니 말이오.”
***
맞으면서 유지훈은 쉴 새 없이 되뇌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현실이 아니라고. 현실일 수 없어···.”
현실이 아닌 이상 통증 또한 가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통증은 실제였다. 뼈에 사무치도록 고통스러웠다. 과거 치욕과 함께 느꼈던 고통 그대로였다.
“그때의 내가 아니야. 나는 강해. 누구보다 강하다고···.”
과거를 억누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현재의 자신, 귀환 이후 초인이 된 자신을 끊임없이 상기했다.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통증이 약해졌다. 과거에 그랬듯이 익숙해진 탓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견딜 만했다.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가렸던 가드를 풀었다.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퍽! 차강훈의 얼굴을 가격했다.
통증이 실제였듯 타격감 또한 진짜였다.
“어쭈! 반항하는 거야?”
차강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경멸을 머금은 채였다.
“버러지인 줄 알았더니 지렁이였네. 밟으니까 꿈틀하는 거 보니까.”
“닥쳐! 너같이 야비한 새끼한테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병신 새끼. 버러지나 지렁이나 다를 게 뭐가 있냐. 똑같아. 어차피 짓밟힐 존재일 뿐이야.”
유지훈이 연달아 양주먹을 내뻗었다.
퍽! 퍽!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차강훈의 안면을 강타했다.
“흐흐흐.”
입술이 찢어져 핏물을 뱉으면서도 차강훈은 비실비실 웃었다.
“이 새끼가 제대로 꿈틀대네. 확실히 밟아줘야겠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밟는 것만으론 안 되겠는데? 아예 짓이겨야겠어.”
“꿈틀거리긴커녕 기어 다니지도 못하게 만들어줘야지.”
그 시절 일진들이었다.
유지훈의 학창 시절을 처참하게 짓밟았던.
다시금 공포의 기억이 몰려들었다.
“너, 너희들이 어떻게···.”
다섯 명으로 이뤄진 무리였다.
중학생 시절부터 폭력 조직에 몸담았던 불량배들이었다. 일단 때리기 시작하면 실신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잔인한 놈들이었다.
공포의 기억이 유지훈의 정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죽여!”
구타가 시작됐다. 이번엔 집단 구타였다.
유지훈은 다시금 가드를 올린 채 맞기만 했다.
뇌가 진탕되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번엔 정신만은 잃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핏물을 삼켰다.
한편으로 떠올렸다.
‘나는 약하지 않다. 아니 강하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존재다.’
생각이 귀환 이후로 거슬러 올라갔다.
무림에서 돌아온 뒤 얻은 특성, 재생 능력.
아무리 맞아도,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에 시달려도, 심지어 심장이 칼에 뚫려도, 그에겐 말끔히 회복되는 신체가 있었다.
“푸후훗. 아무리 맞아봐야 의미 없었잖아? 게다가 내가 누구야?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은 박투의 신. 투귀잖아!”
순간 박투의 기술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전신으로 퍼져갔다.
가드를 내렸다. 맞을 때 맞더라도 때려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맞아서 상처가 생겨봤자 바로 나을 텐데···.
반격의 시간이었다.
한놈 한놈 때려눕혔다.
한 대 맞고 피를 뿜으며 쓰러진 놈,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놈, 그동안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놈···.
학창 시절 그토록 두렵던 놈들이 알고 보니 조밥이었다.
“지금부터 훈육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훈육의 결정판은 역시 싸다구 갈기기였다.
한놈 한놈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후려쳤다. 양쪽 뺨이 부어터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트라우마의 핵심인 차강훈은 좀 더 강한 훈육이 필요했다.
“지훈아. 잘못했어. 저 새끼들이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어.”
“응. 아니야. 네가 제일 나빠.”
수도를 들어 올렸다. 정수리를 내리쳐 쪼갤 찰나였다.
어둠이 밀려들었다. 모든 게 사라졌다. 어둠이 걷히고 빛이 찾아왔을 때, 눈앞엔 굳은 표정의 낯선 노인이 있었다.
“트라우마를 떨쳐냈군. 역시 대단해.”
“그쪽도 사부겠지? 두목 사부쯤 되는 건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욱하나마 그렇다네. 무당의 사부 장웨이지라고 하네.”
“하하하. 무당? 웃기지도 않는군. 게다가 장 씨네? 장삼봉의 후손쯤 되는 거야?”
조롱 섞인 일성에도 장웨이지는 허허롭게 웃었다.
“여긴 내가 지배하는 공간일세. 허상이지만 실제와 통하지. 이곳의 자네와 밖의 자네가 동일한 상태라는 의미라네.”
“그런 것 같았어. 아팠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안 아팠고.”
“심력이 대단한 자로군. 처음이야. 나를 불러낸 건. 이제부터는 다를 걸세. 내가 직접 자네를 상대할 테니.”
“이제부터 그쪽이 직접 처맞겠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허허허. 두고 보지.”
장웨이지가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권총과 단검이었다. 양손에 쥐고 유지훈을 겨냥했다.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권총과 단검 따위 심검으로 갈라버리면 그만이었다.
오른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빛의 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 공간은 내가 지배한다고 했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공간이지. 특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기도 하고.”
무심한 한마디를 끝맺자마자 장웨이지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굉음과 함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유지훈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지만, 총탄은 허벅지를 관통했다.
“날렵하군.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공간에서 죽으면 밖의 자네도 죽을 텐데. 그리고 내겐 무한한 총탄이 있고.”
유지훈이 눈매를 찡그렸다.
이내 입 주위로 빙그레 미소가 그려졌다.
“반대로도 성립하는 거 아냐? 밖의 내가 죽지 않으면, 여기의 나도 죽지 않는.”
유지훈이 몸을 날렸다.
무한 재생 능력의 소유자가 무한 총탄 보유자에게 선공에 나선 순간이었다.
트라우마의 공간 (2)
탕! 탕! 탕!
연달아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유지훈은 쉴 새 없이 장웨이지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장웨이지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장웨이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지훈의 집요한 추격을 장웨이지는 여유롭게 따돌렸다. 대충 겨냥해 격발한 총탄은 여지없이 유지훈의 신체 어딘가에 적중했다.
전신이 피로 물든 와중에도 유지훈은 악착같이 장웨이지를 쫓았다.
“어때? 이상하지? 왜 총을 맞았는데 안 죽을까? 슬슬 두려워지지 않아? 이 공간이 그쪽 공간이 맞는지 의심되지?”
총탄을 맞아 휘청이면서도 유지훈은 끊임없이 따라붙었다.
질릴 법도 한데 장웨이지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무심한 동작으로 물러서면서 방아쇠를 당겼고, 이따금 단검도 휘둘렀다.
격돌 양상은 심히 괴랄했다.
쫓기는 쪽이 계속 공격했고, 쫓는 쪽은 연신 공격을 허용했다. 쫓는 쪽은 피칠갑을 한 모습이었고, 쫓기는 쪽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수없이 총탄에 맞은 쪽은 기세등등했고, 계속해서 총탄을 격발하는 쪽은 하염없이 도망 다니는 양상이었다.
“의심해서 뭐 하겠는가. 어차피 여기는 내 공간인 것을. 언제든 원하면 나는 여길 벗어날 수 있다네.”
의미심장한 대목이었다.
장웨이지는 언제든 벗어날 수 있었다. 유지훈은 장웨이지가 벗어날 때까지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핸디캡이 이만저만이 아니군. 그렇다고 계속 저 늙은이 장단에 놀아줄 수도 없고···.’
이중고였다.
장웨이지가 벗어나야 유지훈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한편으로 장웨이지를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머무르게 한 상태에서 끝을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면 이만저만 골치 아픈 상대가 아니었다.
유지훈이야 어느 정도 효과적인 대응법에 근접했지만, 다른 이들에겐 아니었다. 당장 화무결만 해도 천마에게 당한 트라우마에 갇히면 목숨을 부지하기 쉽지 않을 형편이었다.
유지훈 역시 다음에 다른 트라우마로 접근해 왔을 때, 쉽게 물리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무림으로 가기 전 그의 인생은 트라우마로 점철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작전이 들어가야 하나. 그렇다면 지금 내게 내줄 수 있는 살은 뭐가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고민하는 지금도 장웨이지의 총탄은 그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기를 쓰고 맞지 않으려 보호하는 부위는 머리였다.
뇌가 총탄에 맞았을 때 재생 능력이 발동할지 자신이 없어서였다.
‘머리?’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한번 맞아볼까? 아니. 머리를 들이댄 뒤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제압하면 되지 않을까?’
그 정도 찰나를 파고들 신법은 갖춘 것 같았다. 체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제압이 가능할 듯했다.
‘확률은?’
머릿속으로 가능한 모든 상황과 동작을 그려본 결과.
‘30%를 조금 웃도는군.’
충분히 해볼 만한 숫자였다.
무림에서도, 귀환한 이후에도 유지훈의 삶은 확률 따위엔 구애받지 않았다. 확률을 지배하며 살아왔다.
고작 20% 부족한 정도는 가능의 영역이라고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