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50)

“너 하는 거 보니까 재미있는 것 같아서.”

여인이 여자 백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찌릿한 전류가 정수리를 타고 흐르는 듯싶더니.

빠지직! 여자 백호의 머리를 까맣게 태워버렸다.

피식!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재가 된 여자 백호의 머리가 가루가 돼 허공으로 흩어졌다.

미청년이 빙긋 웃었다.

“가자. 나랑 다니다 보면 기억날 거야.”

***

지린성 지린시. 강은영이 찍어준 좌표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근처에 별다른 기운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알려준 장소로 왔는데, 아무도 없어. 혹시 연변으로 향한 거 아냐? 아니면 어디로 도망갔나?”

[잠시만요. 알아볼게요.]

강은영이 특성 인간 내비게이터를 발동하더니 결과를 알려왔다.

[이동한 모양이에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지금 유지훈 씨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이에요.]

2km면 기감으로 감지하긴 쉽지 않은 거리였다.

한편으로 1분 이내로 당도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다.

“뭐지? 함정이라도 파놓은 건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왜? 뭔가 특이한 점이라도 있어?”

[인원이 늘었어요. 전에는 거기에 초인 셋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는데요. 지금은 아홉으로 늘었어요.]

“그 이야기는···?”

[적어도 두 무리 이상 그쪽으로 합류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당초 파악하기로 상대는 여섯 무리였다.

신원이 확인된 초인들이 각각 여섯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개 지역에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셋까지 분포된 모양새였다.

유지훈은 여섯 사부가 각각 하나의 조를 맡아 초인들과 휘하 각성자들을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 개 지역에 사부 한 명에 초인 대여섯씩이 배치된 것으로 보고 각개격파 작전을 진행했다.

첫 대상이 바이산시였고, 분석한 대로였다.

사부 한 명과 초인 여섯 명이 있었다. 100명 남짓의 각성자들과 그룹을 이룬 상태였다.

제압에 어려움은 없었다. 어느 정도 상대의 전력을 예상하고 움직인 결과였다.

물론 유지훈과 화무결의 압도적인 무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두 무리가 합류했다면···. 사부 셋이 함께 있다는 의미인가?”

[아시다시피 사부들은 인적 사항이 확인되지 않아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요. 적어도 셋은 함께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사부들은 베일에 싸인 존재들이었다. 초인들 가운데도 국제 공인을 거치지 않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확인된 초인이 아홉 명이라는 건 실제로는 스무 명에 육박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각성자까지 합치면 300명을 넘을 수도 있고.

“그런데 전화가 잘 안 들리네? 감이 영 안 좋은데? 어디야?”

[아 그게 그러니까···. 지금 이동 중인데요···.]

뭐라고 설명하는데, 뚜렷이 들리진 않았다.

급기야 전화가 끊어졌다.

“뭐야? 끊어졌네. 위성 전화가 왜 이리 통화 품질이 안 좋아···.”

고개를 갸웃한 뒤 서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2km 거리에 있다면···.

안력을 돋워 확인하려고 했지만, 특이한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낮은 높이의 건물들 서너 채만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가? 놈들이 그쪽으로 도망갔다고 하는가?”

화무결은 못마땅한 눈치였다.

단단히 별러서 왔는데, 상대가 없으니 허망한 탓이었다.

“응. 도망간 모양이긴 한데, 함정을 파놓은 것 같기도 해.”

“함정이라···.”

“저쪽 한번 봐봐. 특이한 거 뭐 없나.”

화무결은 내공으로 안력을 돋울 수 있었다. 내공이 없는 유지훈보다 훨씬 먼 거리를 확인 가능했다.

기를 끌어올리고는 유지훈이 가리킨 방향을 응시했다.

“으음···. 건물에 사람들이 제법 매달려 있군.”

“혹시 저격수라도 배치된 건가? 어떤 거 같아?”

“그런 것 같진 않군. 다만 우리가 온 건 아는 듯해. 관찰하고 있어.”

화무결이 양손으로 망원경을 보는 시늉을 했다.

화무결은 어느 정도 현대 문물에 적응을 마친 상태였다. 일본과 중국에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사 용어와 전술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저격수와 망원경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관찰한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차라리 쪽수로 밀어붙이면 애를 먹을 수도 있을 텐데···.”

유지훈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쩔 텐가? 그냥 관찰하게 둘 텐가?”

“무결이 너는 어쨌으면 좋겠어? 일단 우리 위치는 드러났으니 기습 공격은 튼 것 같은데.”

“어쩌긴 뭘 어쩌나? 대놓고 들이닥쳐야지. 암습 같은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네. 명색이 무신인데.”

“역시 그렇지? 그럼 가자.”

유지훈이 앞장섰다.

몇 발자국 내딛더니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걸음을 멈춰섰다.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네 왜 이러는가?”

지나쳐간 화무결이 돌아봤다가 미간을 좁혔다.

유지훈의 눈이 눈동자가 사라진 백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

공동의 사부 마오쥔제의 소식이 전해진 뒤 사부들의 수장인 무당의 사부 장웨이지는 기존의 작전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단둘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의 귀환자와 그와 함께 하는 중년 사내. 마오쥔제의 무리가 집결한 곳으로 찾아들었다는 보고였다.

마오쥔제 외에도 초인 여섯이 있었다. 심지어 한국의 귀환자에게 상극이 되리라 기대한 강화 계열 초인을 셋이나 투입한 무리였다.

거기에 나름 정예라 할 수 있는 각성자를 100명 이상 배치한, 전체 작전의 선봉 격이었으니.

한국의 귀환자를 해치우는 건 기정사실이라 예상했다.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가 관심사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보고는 없었다. 연락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바이산시 관계자를 급히 수배해 현지 상황을 파악했다. 몰살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귀환자와 중년 사내는 유유히 북쪽으로 향했다는 전언이었다. 또 하나의 선봉대가 집결한 지린시가 타깃이 될 터였다.

바로 나머지 사부들에게 연락했다.

팔대 사부 가운데 셋이 죽었다. 다섯이 남았는데, 곤륜의 사부 랴오위안허는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하긴. 특성 습득기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랴오위안허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랴오위안허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부를 지린시로 집결하도록 했다. 장웨이지 역시 지린시로 향했다.

후방의 랴오위안허에게 예비 병력을 맡기고, 주력을 지린시로 모아 일거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한국의 귀환자는 내가 맡겠소. 다른 분들께서는 그의 동료를 공격하는 한편으로 내 주위를 지켜주시오.”

작전의 핵심은 장웨이지와 유지훈의 맞대결이었다.

정면 대결은 아니었다. 특성을 활용한 우회 대결이었다. 서로의 생명을 건 위험한 대결이기도 했다.

장웨이지는 정신 계열의 각성자였다.

상대의 정신을 공격해 왜곡된 시공간으로 보내는 특성을 보유했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방식이었다. 정신 속으로 파고든 뒤 과거의 상처를 찾아내 그 시절 공간으로 보내 격돌하는 특성이었다.

시공간은 왜곡되지만, 그곳에서 격돌은 진짜다.

가상의 공간으로 보내지지만, 다치는 건 실제라는 의미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 상대는 물론, 장웨이지 자신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원래 집결한 장소에서 2km쯤 떨어진 건물에 주둔했다. 유지훈과 화무결이 오길 기다렸다.

예상보다 빨리 두 사람이 도착했다. 그때부터는 특성을 발동할 순간만을 노렸다. 조건은 눈이 마주치는 것이었다.

망원경을 들고 집요하게 유지훈의 눈을 응시했다.

마침내 유지훈이 무리가 집결한 방향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망원경에 반사된 빛을 감지한 것일까? 미간을 좁힌 채 망원경을 노려봤다. 망원경 속의 장웨이지의 눈과 마주쳤다.

특성이 발동했다. 왜곡된 시공간 속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됐다.

***

트라우마의 공간 (1)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빛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땐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나머지 감각에 의존해 길을 찾고, 빛을 감지해 나아가야 했다.

눈을 감았다.

“으음···.”

떠오르는 단상이 있었다.

친구의 모습이었다. 중학교 시절 급우.

친구라 믿고 손을 내밀었지만, 처절하게 믿음을 저버린 녀석이었다. 믿음을 배신당한 뒤에도 친구라 믿고 싶었기에 더욱 참담했던.

눈을 뜨니 그 녀석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강훈이? 차강훈 맞아?”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차강훈은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강렬한 경멸의 눈빛으로.

“변함없이 재수 없네. 유지훈. 좆도 아닌 새끼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폼이나 잡고.”

“뭐야! 너 아직도···? 그때 난 너를 도우려 했던 거야!”

“나를 도우려 했다고? 미친 새끼. 너 따위가?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가 나를 돕는다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차강훈이 다가오더니 뺨을 후려쳤다.

쫘악!

눈앞에 불빛이 반짝했다.

분명 현실이 아닌데, 통증은 현실이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좀 맞아야겠다.”

손찌검이 이어졌다.

저항할 수 없었다. 몸이 굳어버렸다.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 맞기만 했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트라우마였다.

차강훈. 유지훈을 지긋지긋한 학폭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 무려 5년의 세월 동안 헤어나지 못한 늪으로.

차강훈은 외톨이였다. 일진들이 먹잇감으로 점찍은.

유지훈의 처지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다. 유약하고 소심한 성격이었기에 주위에 친구가 많지 않았다.

유지훈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동질감 때문이었다. 그 역시 일진은 두려웠지만, 손잡고 함께 맞서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차강훈이 잡은 건 유지훈의 손이 아니었다. 일진들의 손이었다. 앞장서서 유지훈을 괴롭혔다. 먹잇감으로 만들었다.

처절한 학폭 피해자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5년도 더 지난 지금, 그 시절이 재현되고 있었다.

분명 실제가 아닌데, 실제보다 선명했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넌 벌레야. 밟아도 꿈틀거리지도 못하는. 그런 새끼가 나를 도와? 미친 새끼. 주제를 알고 나대.”

손찌검에 이어 발길질까지. 구타가 계속됐다.

유지훈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맞기만 했다.

대한민국 서열 1위의 초인에, 전세계를 통틀어 상대를 찾기 힘든 강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입 주위로 피가 흘렀다. 전신이 상처로 뒤덮였다.

***

“이보게. 지훈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화무결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위풍당당하게 적들이 집결한 장소로 향하던 참이었다.

앞장섰던 유지훈이 돌연 멈춰 서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사라진 벽안이 된 채 망부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지훈이. 정신 차리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유지훈이 멈춰 선 순간에 맞춰 적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떼를 지어 몰려드는 양상이었다. 앞장선 자들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임정명이나 마철진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초인들이었다. 열 명은 훌쩍 넘어 스물에 육박하는 듯했다.

“어허! 이거 난감하게 됐네.”

초인이 스물이라고 해도, 화무결이 감당 못 할 상대는 아니었다.

절세의 신법으로 치고 빠지면서 한놈 한놈 상대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몸을 뺐다가 기회를 노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영 고약했다.

유지훈이 석상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였다. 적들이 밀려드는 가운데 놔두고 움직일 수 없었다.

“섭혼술인가?”

화무결은 당장 무림의 기억부터 떠올렸다.

섭혼술. 사람의 정신을 간섭하는 능력. 무의식의 영역에 침범해 정신을 제어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술법이다.

가까이서 눈을 마주하며 구사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극강의 수준을 지닌 술사의 경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시전할 수 있었다.

파훼하는 방법은 시전자를 찾아내 제압하거나, 당한 자가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유지훈이 이겨내기 힘든 양상이었다.

급기야 몸 곳곳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입 주위로 피가 흐르기까지 했다. 유지훈의 표정에 고통이 짙게 아로새겨졌다.

“뭐야. 이건. 섭혼의 영역이 신체로도 반영된단 말인가?”

무림의 백전노장 화무결로서도 처음 접하는 장면이었다.

무림에서 섭혼술의 고수를 수차례 상대해봤지만, 정신에 국한된 공격이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