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의 변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지. 중국의 지방 정권, 속국이었단 말이다.”
순간 유지훈의 손에서 거무스름한 빛이 일어나더니 묵빛 검의 형상을 이뤘다. 순식간에 당이페이의 목으로 향하더니.
서걱!
단칼에 목을 날려버렸다.
두둥실!
당이페이의 목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이놈!”
리친청이 벌떡 일어났다. 맹렬하게 양손을 내질렀다.
파파파파파파팟!
무형의 탄환이 쏟아져 나왔다.
인비저블 머신건. 리친청의 특성이었다.
마나의 결집으로 이뤄진 무형의 탄환을 수천 발까지 쏟아낼 수 있었다. 탄환의 방향까지 조절할 수 있기에 대규모 살상에 적합했다.
소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몸을 벌집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특히 근거리에선 피하거나 막을 방도가 없었다.
수천 발이 한꺼번에 쏟아져 밀려오는데···.
청성의 사부 리친청은 치밀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순간부터 기회를 노렸다.
당이페이의 입에서 속국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기회라고 생각했다. 유지훈이 당이페이를 공격하는 찰나를 파고들려고 했다.
당이페이의 안위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유지훈을 쓰러뜨린 뒤 탄환의 방향을 나머지에 돌릴 생각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생성된 묵빛 검이 당이페이의 목을 가르는 순간, 특성 인비저블 머신건을 발동했다.
무형의 탄환이 유지훈의 전신을 뒤덮었다.
리친청은 일단 한 놈 해치웠다고 여겼다. 나머지 셋 쪽으로 탄환의 방향을 조정하려 했다.
그런데.
유지훈을 벌집으로 만들었어야 할 무형의 탄환이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층 거센 기세였다.
“으헉! 이게 뭐야!”
벌집이 된 건 리친청 그 자신이었다.
“헉!”
당혹한 비명과 함께 랴오위안허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빛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유지훈의 무심한 시선은 너덜너덜해진 리친청을 향하고 있었다.
“병신. 혼자서 무슨 지랄을 한 거야?”
유지훈이 랴오위안허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빛의 검을 랴오위안허의 목에 가져다 댄 채였다.
“저 녀석 왜 죽은 줄은 알지?”
당이페이의 죽음. 경고를 무시한 탓이라는 의미였다.
속국. 결코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되는 말이었다.
“저놈은···.”
유지훈의 손길이 리친청을 가리켰다.
“혼자 지랄하다가 죽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 빼먹은 경고 하나 추가할게. 실은 이게 더 중요하거든.”
랴오위안허는 침을 꿀꺽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훈이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었다.
“나는 먼저 도발하지 않아. 대신 도발해오면 처절하게 응징해.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유지훈이 다시 자리, 상석에 앉았다.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논의하자더니 잘 안 됐네? 협상은 결렬이라고 봐야겠지?”
“그, 그게···.”
“둘러댈 거 없어. 결렬이야. 그래도 그쪽은 안 죽일게. 명색이 사절이잖아. 딱히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도 없는 것 같고.”
랴오위안허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 부분만 확인할게.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야?”
“그, 그건···.”
랴오위안허가 주저하는 사이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밀려 들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사부님.”
사내들의 시선이 세 구의 시신에 멈췄다.
그중 둘은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사부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사내들이 일제히 공격 대형을 갖추려 했다.
랴오위안허가 제지하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손을 쓴 이가 있었다.
“조무래기들은 제거 처리할게요.”
이나연이었다.
가볍게 뻗은 손에서 파란 화염이 꽃처럼 피어나 날아갔다.
사내들 무리에 닿자마자 찬란한 불꽃을 피우더니 소멸했다. 사내들 역시 화염과 함께 소멸했다.
“윗사람들 말씀 나누시는데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지.”
랴오위안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걸로 협상은 완전히 결렬이라고 보면 되겠네. 이제 질문에 대한 답만 들으면 끝인 것 같은데?”
랴오위안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속국이 무슨 말인지 모르오.”
***
격랑의 징조
“이제 3시간 정도만 가면 군산항에 도착이오.”
초췌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선의 선장이었다. 중국 어선. 무단으로 한국 영해에 진입해 항해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롄항을 출발한 지 꼬박 이틀째였다.
한국 해경에 들켜서는 안 된다는 의뢰인의 지시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은 상태였다.
선장의 곁에는 우아한 분위기의 중년 여인이 있었다.
“선장님과 선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려요. 무사히 도착하면 별도의 보너스를 챙겨드릴게요.”
“군산항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한국 해경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소?”
“군산 에어베이스에서 미군들이 나올 거예요. 선장님은 화물만 넘겨주시고 떠나시면 돼요. 보너스는 현금으로 지급될 거예요.”
선장이 다시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이한 의뢰였다. 관처럼 생긴 나무 상자 하나를 다롄항에서 군산항까지 이송하는 일이었다. 사례비가 무려 100만 달러였다.
의뢰인은 젊은 미국 여인이었다. 금발의 미녀였다. 일행은 모두 여인이었다. 예의 바른 태도였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화물이 무엇인지 궁금해해선 안 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중국 공안이나 한국 해경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조건도 있었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100만 달러라는 사례금도 엄청났지만, 거절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의 지시 때문이었다.
“들어가서 눈 좀 붙이시오. 이틀 동안 한잠도 안 자지 않았소.”
의뢰인들 가운데 동행한 건 다섯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젊은 미인은 몇 마디 당부만 남긴 뒤 떠났다. 옆에 있는 중년 여인이 승선한 다섯의 지휘자였다.
항해하는 내내 뱃전을 지켰다. 한잠도 자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다. 식사도 선장이 챙겨다 줬다. 먹는 동안에도 시선은 바다에 고정했다.
“우리 아이들 역시 눈 한 번 못 붙인 건 마찬가진데요. 나 혼자 편할 순 없죠.”
중년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1주일 정도는 안 자도 끄떡없어요.”
중년 여인의 말대로였다.
동승한 네 명의 여인은 상자 곁을 지켰다. 잠시도 상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보기 힘들 정도였다.
대체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길래···.
“혹시 각성자라 불리는 분들이시오?”
오는 내내 궁금했지만, 묻기 어려웠던 질문이었다.
궁금해하지 말라는 조건 때문에 주저했다. 화물에 한정된 조건이었겠지만, 여인들의 정체 또한 포함되지 않을까 여겨져서였다.
중년 여인이 빙긋 웃더니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빠지직!
강렬한 전기가 바닷물을 때리더니,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허옇게 배를 까뒤집은 모습으로.
중년 여인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대답은 되고도 남았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려. 우리 선원들한테 집적거리지 말라고 당부해두길 잘 한 것 같소.”
그때 상자를 지키던 네 여인 중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실험체가 깨어난 듯합니다.”
“깨어났다고?”
“상자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열어줬어?”
“아닙니다. 셋이서 눌러놓고 있습니다.”
순간 덜컹하더니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여인의 비명이었다.
중년 여인과 수하가 황급히 달려갔다. 선장도 뒤를 따랐다.
“이게 무슨···.”
상자는 열려 있었다.
상자 옆에선 앳된 용모의 청년이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검은색 트렁크 반바지와 흰색 셔츠만 입은 채였다.
분위기는 천진했지만, 장면은 결코 천진하지 않았다. 흉악했다.
손에는 여인의 팔이 쥐어져 있었다. 주변으로 사지가 찢어진 여인 둘이 널브러진 상태였다. 나머지 한 여인은 처참하게 팔이 뜯어진 채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누구지? 또 여긴 어디지?”
중년 여인과 눈이 마주친 청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중년 여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에 당혹감이 번졌다.
선장을 쳐다봤다. 어쩌면 좋을지 묻는 듯했지만, 선장에게 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한숨을 내쉬고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우린 당신을 도우려는 거예요. 진정해요.”
“나를 돕는다고? 내가 누군데? 당신은 또 누구지?”
청년이 손에 든 여인의 팔을 집어 던지더니 중년 여인을 바라봤다. 초점이 없는 흐리멍덩한 눈빛이었다.
“당신은 나쁜 자들에 의해 험한 일을 겪었어요. 우리가 도울 거예요. 해결해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요.”
“나쁜 자들? 험한 일을 겪었다고?”
청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껌뻑였다.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상자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에라도 빠져든 듯했다.
중년 여인이 수하 여인에게 눈짓했다.
여인이 청년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청년 주위로 손을 휘저었다. 손에서 실 같은 형상이 나오더니 청년을 옭아맸다.
청년이 옴짝달싹 못 하게 되자 중년 여인이 안도했다.
“다시 상자에 넣어. 상자도 매직 스트링으로 단단히 묶···.”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청년이 눈을 번쩍 떴다.
팔을 꿈틀하자 매직 스트링이 맥없이 끊어졌다.
벌떡 일어서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
엄청난 파괴력의 비명이었다.
어선의 선장과 선원들이 귀와 눈 그리고 코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바로 절명했다.
매직 스트링으로 청년을 제어했던 여인은 가까스로 귀를 막고 버텼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이내 휘청하더니 피를 쏟아냈다.
남은 건 중년 여인 하나였다.
청년이 비명을 멈췄다.
중년 여인을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이 날 것 같아. 내가 누군지. 그런데 그쪽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군. 아니. 내 주위에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없지.”
중년 여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코와 귀에서 옅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타격을 입긴 했지만, 그럭저럭 버텨낸 양상이었다.
청년의 미국 이송.
조직 다크 디멘션, 아니 미국의 세계 제패가 걸린 임무였다.
다크 디멘션과 CIA가 손잡고 진행하는 작전이었다. 중국 비밀 프로젝트 연구소에서 빼낸 실험체를 이송하기 위해 주한미군까지 동원했다.
‘실험체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게 허사가 될 텐데···.’
중년 여인은 특성 발동을 주저했다.
특성을 사용하지 않고 청년을 제압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청년이 다가왔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덥석 어깨를 움켜쥐었다.
순간 중년 여인은 자신의 고민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달았다.
움켜쥐자마자 어깨가 바스러졌다. 왼팔이 어깨부터 뽑혀나갔다.
“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