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50)

거대한 화염과 함께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연구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버섯구름이 피어오를 무렵, 빠른 속도로 연구소로 내달리는 네 개의 인영이 있었다.

연구소는 폐허가 된 채 화염에 휩싸인 상태였다. 폭발도 계속되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에도 네 개의 인영은 몸을 사리지 않고 무너져 내리는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청색 옷과 홍색 옷을 입은 네 명의 남녀. 흑룡회 수장의 여덟 보좌 청랑(靑狼)과 홍사(紅蛇)였다.

“서둘러라. 실험체의 잔해라도 확보해야 한다.”

이들은 흑룡회 용두 리자오슝으로부터 실험체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연구소 장소에 관한 첩보를 취득해 움직였지만, 한발 늦었다. 연구소 폭발 직후에 도착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네 남녀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돌볼 여유 따윈 없었다. 명령의 미완수는 곧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폭발 진원지가 실험체가 있는 곳 같다.”

어렵사리 당도한 폭발 진원지는 폐허였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폭발이 이어졌다. 청랑과 홍사 또한 폐허 속에 파묻힐 위기였다.

네 명 모두 주저했다. 임무 실패는 죽음이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폭발에 몸을 던지려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청랑 중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저기!”

무너져내린 잔해더미 사이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이었다. 부질없는 움직임이었다. 잔해더미를 밀어낼 기력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둘러라!”

네 남녀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잔해더미를 치웠다.

실험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절하게 부서진 양상이었다. 사람의 형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약하게나마 맥박이 잡힌다. 본단으로 후송한다.”

홍사 중 남자가 조심스럽게 들쳐 멨다. 와중에 부서지기라도 할까 극도로 섬세하게 다루는 모습이었다.

다시금 폭발이 이어졌다. 청랑 둘과 홍사 중 여인이 몸을 던져 실험체를 업은 청랑 사내를 보호했다.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폐허를 빠져나왔다.

***

“이쪽이요? 너무 조용해서 심심할 지경이에요.”

연변 조선족 자치국 건국위원회에 머무르는 동안 유지훈은 거의 매일 이윤성과 전화를 주고받았다.

전화를 거는 쪽은 주로 이윤성이었다. 명목은 안부 파악이었지만, 실제로는 연변에 눌러앉을까 봐 우려돼서였다.

특히 이광진 대통령의 근심이 깊었다.

“유지훈 초인이랑 김주환 위원장이 너무 잘 통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러다가 북한으로 넘어가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윤성을 닦달했다.

유지훈의 의중을 파악해라, 객지에서 애로사항은 없는지 잘 들어봐라, 넘어가는 일 없도록 단도리해라···.

이윤성도 처음에는 대통령의 기우겠거니 여기고 흘려넘겼지만, 닦달이 이어지면서 우려가 전염됐다.

유지훈이 남북한 중립지대인 조선족 자치국을 거주지로 택하진 않을지 걱정하게 됐다.

심지어 작전명 광개토를 들먹이며, 북벌을 추진할 기세니···.

조선족 자치국 독립 선포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유지훈은 독립 선포 마친 뒤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돌아오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이 너무 조용했다. 조선족 자치국 건국 소식이 알려졌을 텐데 가타부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불안하신 건 아니죠?]

“불안하긴요. 좀이 쑤셔서 그래요. 한바탕하려고 준비 단단히 하고 있는데···. 혹시 좀 알아보셨어요?”

[휴민트를 총동원해서 알아보긴 했습니다. 명쾌한 이유는 파악되지 않았는데요. 세 가지 측면 정도에서 추측은 가능합니다.]

유지훈은 이윤성에게 SSG를 비롯한 정보기관 동원을 요청했다. 중국 정부의 조용한 대응에 대한 분석을 의뢰했다.

이윤성이 그 결과를 전하기 위해 연락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국과 미국의 갈등을 둘러싼 국제 정세 때문입니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해왔는데요. 우리, 아니 유지훈 초인님이 일본을 박살 내지 않았겠습니까.]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핵심인 일본이 한국에 의해 무너진 국면. 중국 입장에선 엄청난 호재를 만난 셈이었다.

한국에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기도 했다. 특히 결정적인 기여자인 유지훈에게는.

[미국과 갈등 국면에서 전략적으로 대한민국을 동반자로 대우하려는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굳이 심기를 건드려 갈등을 조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랬다가 우리가 미국이랑 손잡으면 피곤해질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북한과 관계가 어그러진 상황에서 자칫 미국이 한반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게 될 테고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분석이었다.

한편으로 못마땅하기도 했다. 중국이 미지근하게 나오면 작전명 광개토를 폐기하게 될 수도 있으니.

[또 한 측면은 중국 내부 문제입니다. 최근에 심상치 않은 일련의 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어떤 사고인데요?”

[흑룡회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알아요. 세계 양대 빌런 조직 중 하나라는.”

[최근에 간부 둘이 살해당했습니다. 수장의 최측근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흑룡회가 대외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는 소식입니다.]

북부전구에 투입되는 각성자는 대부분 흑룡회 소속이었다.

흑룡회가 대외 활동을 중단하면서 북부전구는 각성자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각성자 없이 유지훈 일행을 상대할 순 없는 노릇.

북부전구로서는 관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추측이었다.

“흑룡회 간부를 살해한 건 누구래요?”

[거기까진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중국 초인이라는 설도 있고, 외국 빌런 조직의 소행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세 번째 추측은 뭔가요?”

두 번째 추측도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역시 중국이 도발해오지 않을 거란 추측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숨겨둔 각성자 전력을 내놓으려 한다는 분석입니다.]

“오호! 듣던 중 마음에 드는 분석이네요. 숨겨둔 각성자 전력이라는 거 물론 대단한 거겠죠?”

[알 수 없습니다만. 대외적으로 드러낸 전력보다 강하지 않을까 추측되긴 합니다.]

중국은 그간 다른 나라 각성자와 체계를 달리해왔다.

국제각성자협회 가입도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각성자를 관리했다. 초인 또한 국제 인증 없이 자체적으로 인정해 등극시켰다.

1년 전에야 국제각성자협회에 가입했고, 초인 또한 국제 인증을 거치게 했지만, 그렇지 않은 초인이 더 많다는 게 정설이었다.

[팔대 사부라는 존재들이 있다는 정보는 진작부터 입수됐습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초인들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들이라는···.]

“팔대 사부라···. 좀 구리네요. 여덟 명인 모양이죠?”

[명칭이 좀 올드하긴 한데요. 내부적인 위상은 엄청나다고 합니다. 국가 부주석급의 지위가 주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요.]

국가 부주석이면 공식 서열 8위에 해당한다.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다음으로 높은 위치다.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존재들에게 국가 권력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했다는 의미였다.

“잠시만요. 조호견 초인이 급한 용무가 있다네요. 끊지 마세요.”

유지훈이 잠시 조호견과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통화로 돌아왔다.

“짱개 놈들이 보자는데요? 사부 어쩌고 하는 작자들이 왔다면서 당장 창춘으로 달려오라는데요. 이거 도발 맞죠?”

모처럼 흥에 겨운 음성이었다.

***

광란을 부르는 주문

중국 지린성 성도 창춘시. 지린성 당서기 자오쥔하이의 집무실에 중년 사내 셋이 찾아들었다.

하나 같이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냈다.

지린성 1인자 자오쥔하이는 안절부절못하며 대기하다가, 이들이 도착하자 고개를 조아리며 맞이했다.

“사부님들의 지린성 방문을 환영합니다.”

세 사내는 자오쥔하이의 인사에 대수롭지 않은 손짓만을 건넨 뒤 응접실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다.

상석은 긴 백발을 단정하게 묶은 사내의 몫이었다.

양옆으로 짙은 눈썹의 근육질 사내와 호리호리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차례대로 앉았다.

자오쥔하이는 감히 앉지 못했다. 상석의 사내 옆에 시립했다.

“당서기께서는 어찌 앉지 않고 서 계시는가?”

백발 사내가 심드렁하게 묻자, 자오쥔하이는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세 분을 여기까지 오시도록 폐를 끼쳤습니다. 감히 옆에 있기도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폐를 끼친 건 아는 모양이군.”

“내가 이런 촌구석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네.”

세 사내는 오만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중국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 여덟 명 중 셋이었으니.

국가 부주석급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들. 팔대 사부 가운데 셋이 지린성을 찾은 것이었다.

지린성 서열 1위인 당서기 자오쥔하이도 고위 인사였지만, 국가 서열 8위에 준하는 이들과 비교할 순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어지간한 부대 하나는 손짓만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다. 국가전략자산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었다.

팔대 사부는 대외적으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각성자였지만, 국제각성자협회에 가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인이었지만, 국제 인증을 받지 않았다.

대외 활동은 당연히 없었다. 세계적으로는 존재감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 내에서는 달랐다.

스승과 아버지를 아우르는 사부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중국 각성자 전체의 스승이자 아버지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이들은 중국의 유망한 각성자들의 스승이었다. 길드와는 또 다른 개념의 각성자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문파라는 조직이었다.

무당 화산 곤륜 종남 공동 청성 점창 전진이라는 이름의 팔대 문파. 중국 전통 무학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지닌 조직이었다.

팔대 사부는 팔대 문파의 수장이기도 했다.

백발 사내는 곤륜의 수장 랴오위안허, 근육질 사내는 종남의 수장 당이페이, 호리호리한 사내는 청성의 수장 리친청이었다.

팔대 사부들은 국가 주석을 면담한 뒤 중국의 초인 전원을 소집했다.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국제 인증을 받은 초인 28명에 비공인 초인 6명 그리고 팔대 사부까지. 42명의 초인이 참석한 회의였다.

회의 주제는 한국 귀환자와 북한 초인의 연수였다.

남북한의 두 거인이 손잡고 연변을 차지한 상황에 대해서였다. 조선족 독립에 대응책을 마련하는 회의였다.

“조선족이면 소수민족 중에서도 소수민족 아니오. 우리가 그딴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요?”

“맞소. 우리가 대륙 동쪽 끝 촌구석 일까지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한 인사들은 아니지 않소.”

“조선족 독립 따위는 북부전구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 아니오. 흑룡회는 대체 뭘 하고 있길래···.”

흑룡회에도 용두를 비롯해 8명의 초인이 있었다. 국제 공인을 거치지 않은 초인들이었다.

팔대 사부 주도 초인 집단과 흑룡회는 대립 관계였다. 무림의 정파(正派)와 사파(邪派)의 대립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들은 흑룡회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흑룡회의 영역인 동남부와 북동부 지역 문제에는 개입조차 꺼렸다.

조선족 독립 문제가 대두된 지린성은 전적으로 흑룡회의 영역이었다. 불만이 쏟아져 나오는 건 당연했다.

“북부전구가 참패를 당했소. 흑룡회 소속 각성자가 이백이나 투입됐지만, 몰살을 면치 못했다고 하오.”

무당의 수장 장웨이지의 묵직한 한 마디가 불만을 잦아들게 했다.

이어진 화산의 수장 마샤오윈의 발언은 참석자들의 입을 닫게 했다.

“주석의 뜻이오. 이번 일의 결과에 따라 상하이가 우리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소.”

사실상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하이는 흑룡회의 본거지였다. 참석자들 모두가 탐냈지만, 흑룡회가 건재해 입맛만 다셨던 지역이었다.

상하이에서 흑룡회를 몰아낼 수 있다면, 조선족 독립 문제 해결에 뛰어드는 수고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만했다.

“그래서 주석의 뜻은 뭡니까?”

“당장 움직이도록 합시다. 상하이에 진출할 수 있다는데···.”

참석자들의 표정이 바뀌었지만, 팔대 사부는 신중하기만 했다.

장웨이지가 우려를 전했다.

“그전에 간과해선 곤란한 부분이 있소. 한국의 귀환자가 일본 서열 3위와 5위의 초인을 한꺼번에 죽였다는 소문이 있소.”

“북부전구가 참패할 당시 죽은 흑룡회 각성자 중에 향주가 둘이나 포함됐다고 하오.”

마샤오윈의 부연 설명에 참석자들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일본 서열 3위 초인은 세계 랭킹 10위의 강자였다. 국제 공인을 거친 중국 초인 중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드는 이는 없었다. 가장 높은 순위의 초인이 22위였다.

물론 팔대 사부는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들고도 남을 강자들이긴 했다. 그래도 한국 귀환자의 실력이 예상을 훨씬 웃돈다는 의미였다.

“흑룡회의 향주 또한 초인들 아닙니까? 둘이나 죽었다는 건···?”

“한국 귀환자의 실력이 결코 경시해선 안 되는 수준임을 의미하오.”

“여러분들 오시기에 앞서 우리끼리 논의한 바로는 우리 중 셋은 나서야 그자를 제압할 수 있으리란 결론이 나왔소.”

곤륜의 수장 랴오위안허의 전언에 이은 전진의 수장 천쓰위안의 추정은 참석자들의 표정을 어둡게 했다.

“한국의 귀환자 옆에 누가 있는지에 따라 우리 여덟 모두가 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보고 있소.”

팔대 사부 전원이면 어지간한 국가를 전복시킬 전력이었다. 이들이 엄살을 떠는 것도 아닐진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회의 분위기가 새삼 진중해졌다.

“주석께서는 조용한 처리를 최우선으로 요구하셨소. 하지만 조용한 처리가 불가하면 확실하게 매듭지으라고 하셨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되, 싸우게 되면 확실하게 끝장을 보라는 의미요.”

주석의 요구 사항은 복잡했다.

일단 대외적으로 시끄럽지 않은 해결책을 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의 대대적인 중국 견제 움직임 때문이었다. 최근 미국은 일본을 앞에서 중국을 견제했다.

와중에 일본이 미국의 위세를 믿고 한국을 건드렸다가 박살 났다. 중국 입장에선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미국과 갈등을 고려할 때, 강경하게 한국을 대하기보다 잘 구슬려서 미국과 대립에 앞장세우는 게 유리했다.

팔대 문파 수장들에게 강온양면책이 주어졌다.

적당한 당근을 제시해 독립 선포를 막는 것이 첫 번째, 마땅치 않으면 확실한 제압으로 잡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해서 여기 계신 모두가 우리와 함께 움직여주셨으면 하오. 일단 우리가 나서서 조용한 해결을 추진하겠소. 여의치 않을 시 모두가 나서야 하오. 여차하면 한국을 무너뜨릴 각오로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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