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못 나가. 온 김에 독립 선포까지 하고 갈 거야.”
따지고 보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한인(漢人) 관료들이나 거주민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것에 불과했고, 연변의 인구 분포가 한족이 월등히 많았기에 더 많은 공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대한 평화적인 정권 인수가 필요했다.
“원래 여기 조선족, 아니 한민족의 영토였잖아.”
일단 용어 정리부터.
조선족은 중국에서 한국계 중국인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독립을 선포하게 되면 이곳 주민은 더 이상 중국인이 아니니, 조선족에 해당하지 않게 된다.
당연히 한민족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미. 조선족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너희 한족이 힘으로 빼앗아갔으니, 우리 한민족도 힘으로 되찾으려는 거야. 불만 있으면 힘으로 지켜봐.”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중앙 정부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소? 당장이라도 진압에 나설 것이오!”
실제로 중국은 티베트와 위구르 등 소수민족 독립 시도를 철저하게 진압하고 있었다. 이들에 비해 인구도 적고, 단합력도 약한 조선족의 독립 시도는 어불성설에 불과하다고 여길 만했다.
물론 여기엔 결정적인 착오가 존재했다. 조선족 독립을 주도하는 인물이 유지훈이라는 점이었다.
“응. 진압해 주면 더욱 환영이야. 이참에 고구려 시절 한민족의 영토까지 싹 되찾아버리지. 뭐.”
다음 진행은 정말 평화적이었다.
주 정부의 한족 관료들은 자발적으로 물러나도록 잘 타일렀다.
반항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성의(?)를 다해 잘 타이르니 다들 물러났다. 몇 명 다친, 머리가 깨지거나 어딘가 부러진 관료들이 있긴 했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다.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뤄졌다.
“떠날 사람은 떠나도 좋아. 챙겨갈 수 있는 건 다 챙겨가도 돼.”
연변의 한족 거주민들에겐 선택권도 부여했다.
집이나 토지 등 부동산을 제외한 재산은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연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한족 거주민들은 지역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의존해온 조선족들이 동요할 만한 조치였다.
여기에도 확실한 대안은 있었다.
“무턱대고 점령군으로 들어오려는 건 아니야. 경제부터 확실히 살리고 볼 테니까. 독립 이후 훨씬 살기 좋아질 거야.”
신화전자에서 지원에 나섰다.
신화전자 공장 건립을 약속했고, 물류 유통 등 산업 단지도 조성하기로 했다. 신화그룹 해체 과정에서 확보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 결과 조선족은 물론이고 한족 거주민들도 대부분 잔류를 결정했다. 떠나는 것보다 남는 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구 유입 방침도 발표했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들과 한국으로 건너간 조선족 동포들에게 귀향의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주 비용과 정착 자금을 지원하고, 신화전자가 투자하는 공장 등 산업 단지에 취업도 보장하기로 했다.
인근 지린성의 한족 등 이민족들에게도 심사를 거쳐 이주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경제적 지원은 조선족 이주민과 동일한 조건이었다.
“이주 수용 방침 발표 이틀 만에 신청자가 30만에 달하고 있소. 독립을 선포할 때쯤 되면 인구가 400만은 될 것 같소.”
조선족 독립국의 임시 정부 수반은 조호견이 맡기로 했다.
이미 임시 정부 전 단계를 꾸려본 경험이 있었기에, 제법 능숙하게 국가 체제를 갖춰갔다.
“인구 비율은 한민족이 50%를 넘도록 해야 할 거야. 여긴 엄연히 한민족의 나라야. 민족 기틀만큼은 한민족이 다져야 해.”
“알고 있소. 과거 발해의 경험도 모르지 않소. 한족 등 이민족의 이주는 한민족과 융화에 방점을 두고 철저하게 심사하겠소.”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웠다.
1주일 남짓의 진행 과정 동안 중국 정부의 움직임은 없었다.
물론 중국 정부에 공식적인 통보는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려지도록 한 뒤 독립을 선언할 계획이었다.
오는 과정에서 북부전구 병력 제압과 주 정부 진입 이후 한족 관료 축출 등 비공식적인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다.
중국 중앙 정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중국 정부가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우리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인데···.”
임정명의 우려였다.
일리 있는 우려였다. 다들 마냥 눌러앉아 있을 순 없는 형편이었다.
한국에도 고레벨 몬스터 퇴치와 빌런 제압 등 초인들이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장 임정명과 마철진에게 귀국 요청이 들어온 상태였다. 국가안전본부 간부인 강은영도 복귀가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아카데미 휴가가 끝나가는 유지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아가면 수료 후 초인 등극 시험을 치러야 했다. 중요한 시기였다.
“일단 돌아가야 하는 분들은 가는 것으로 해요. 여긴 나랑 무결이만 있어도 충분할 거예요.”
“저는 당분간 여기 머무르면서 신화전자 진출 문제를 맡기로 했어요. 본사에서도 곧 지원 인력이 올 거예요.”
이나연은 남겠다고 했다.
신화전자의 공장 건설 및 산업 단지 조성의 현지 책임자 역할을 맡게 된 덕분이었다.
“이자걸 대표는 안 온답니까?”
“글쎄요. 별 이야기 없긴 했는데요. 당분간은 국내에서 준비하려면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그 녀석들도 곁에서 보살펴야 하고요.”
“하긴. 이나연 씨가 여기 와 있으니, 이자걸 대표는 줄창 녀석들 옆에 붙어있어야겠군요.”
이틀 뒤 강은영을 비롯한 네 명이 귀국길에 올랐다.
임시 정부의 독립 선포를 정확하게 한 달 남겨둔 시점이었다.
“독립 선포하면 바로 돌아올 건가요?”
“별 잡음 없이 마무리되면 그렇게 되겠지.”
“조심하세요. 중국엔 초인만 서른이 넘어요. 공식적으로 등재되지 않은 초인까지 합치면 오십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쳐들어 와주면 오히려 고맙지. 싹 없애버리면 자연스럽게 광개토 작전도 완수되지 않겠어?”
“그랬다가 아예 못 돌아오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 그때는 은영이 와야지 뭐. 그런데 짱개 놈들 너무 조용해. 무슨 꿍꿍이인지. 폭풍 전야 같은 기분이야.”
***
“이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었어?”
금발 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테이블에 펼쳐놓은 자료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마주 앉은 중년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언니 판단이 맞았네요. 좀 더 정보를 확보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섣불리 움직였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금발 미녀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여인이었다. 어려 보이는 여인을 언니라 칭하며 깍듯이 존대하는 모습이었다.
인세인 위치 린제이 탐슨.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용모였지만, 실제로는 오십을 넘겼다. 나이를 잊은 듯한 외모 또한 그녀를 마녀로 불리게 한 요인 중 하나였다.
“나야 그저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였지.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이 정도면 다크 디멘션의 수장 둘이 와도 쉽지 않겠는데? 아니 셋? 설마 넷 다 와도 만만치 않으려나?”
“에이~. 네 분이 동시에 움직이면 어지간한 나라 하나도 전복시킬 수 있을 텐데요.”
“아니야. 이 녀석 지금까지 업적을 보면 나라 하나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닐 거야. 당장 일본 봐. 각성자 수준으로 세계 5위 안에 드는 나라가 멸망에 가깝게 당했잖아.”
린제이 탐슨이 혀를 내둘렀다.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이래서 판을 깔아주니 뭐니 했던 거군. 나한테 짐을 떠넘기려고. 그나저나 랭글리가 다른 자료는 안 보냈어?”
“보내왔어요.”
중년 여인이 브리프 케이스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린제이 탐슨이 볼 수 있도록 가지런히 펼쳐놓았다.
“흐음. 판다 놈들이 깜찍한 짓을 하고 있었네? 재미있는데?”
중국 북부전구에서 진행 중인 비밀 프로젝트에 대한 자료였다. 진행 과정과 장소 등이 제법 자세히 적혀 있었다.
“드래곤 헤드는 내가 아무것도 못 들은 줄 알 거야. 사실 그 늙은이는 제법 철저하게 방비했어. 같이 있던 머저리가 흘린 한 마디를 내가 캐치한 걸 몰랐던 거지.”
린제이 탐슨은 흑룡회 수장 리자오슝과 헤어진 뒤 곧바로 CIA에 연락했다. 유지훈에 관련된 자료를 보낼 때 북부전구의 비밀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파악해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사흘 뒤 자료가 도착한 것이었다.
“랭글리 놈들 밥만 축내는 버러지들은 아닌 모양이네. 제법 꼼꼼하게 조사했어. 여러모로 유용할 듯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어떻게 하긴. 작전 변경이지. 이거부터 손에 넣어야 하지 않겠어?”
“그럼 동생분 복수는···?”
“준비가 미흡하잖아. 복수는 확실히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중년 여인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랭글리에도 그렇게 전달할게요. 아마 공유하자고 할 거예요.”
“당연하지. 기술적인 부분은 걔네한테 맡겨야지. 우리는 결과물만 나눠 받으면 돼.”
“그럼 바로 시작하실 건가요?”
대답 대신 린제이 탐슨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건물 밖으로 나갔다. 돌연 거세게 양손을 휘저었다.
쿵! 쿵!
뭔가 둔중한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녀였다.
마치 뭔가에 묶인 듯 웅크린 채 굳어져 있었다.
“가기 전에 쥐새끼부터 처리해야지.”
린제이 탐슨이 두 남녀에게 다가가더니.
서걱! 서걱! 거침없이 목을 베어버렸다.
“블랙 베어(黑熊)들이야. 드래곤 헤드의 여덟 보좌 중 둘이지. 목은 잘 처리해서 돌려보내도록 해. 장난질 한 대가라는 메모 남겨서.”
***
폭풍 전야 (2)
랴오닝성 가이저우시 외곽 인적이 드문 장소의 허름한 창고 건물.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대형 특수 차량 다섯 대가 막 출발했고, 건물 안 사람들도 짐을 챙겨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들을 실어나를 특수 차량도 대기 중이었다.
북부전구의 비밀 연구소였다. 외양은 폐창고의 모습이었지만, 내부엔 초현대식 연구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연구소 보안 책임자 렌샤오는 직원들의 철수를 통제하다가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1000만 달러 입금이 표시돼 있었다.
“약속대로 바로 넣어줬군.”
빙긋 웃더니 한층 철저하게 직원들을 통제했다. 연구 자료를 개인적으로 빼돌릴 수 없도록 관리하는 작업이었다. 직원들의 개인 사물에 대한 점검을 마친 뒤 준비된 차량에 탑승하도록 지시했다.
전원 탑승을 마친 뒤 차량이 출발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이제 소장만 문제없이 내보내면 되겠어.”
렌샤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가장 안쪽 연구소장실로 향했다.
중년 사내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이었다.
“소장님.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연구소장 쉬웨이칭은 좀처럼 연구소를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미련이 가득한 시선으로 연구소 곳곳을 둘러볼 뿐이었다.
“소장님.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출발해야 폭발 위험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쉬웨이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여길 떠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 무고한 청년들에게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3년째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각성자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다. 숱한 청년 장병들의 희생을 거쳐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다.
마지막 관문만 넘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실험체의 제어였다. 좀처럼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근접했다가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길 십여 차례였다.
결국엔 상부에서 실험체 폐기 명령이 내려왔다. 연구 자료만 챙기고 연구소까지 폭발시키라는 지시였다.
“그들은 중국몽을 위해 장엄하게 희생된 것입니다. 소장님께서 성공하셔야 그들 또한 저승에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토록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거늘 어찌 흑룡회가···.”
실험체 폐기 결정은 흑룡회 때문이었다.
북부전구 부사령원 우덕칭이 흑룡회 용두를 만난 뒤 결정됐다.
흑룡회 수장 리자오슝이 한국 귀환자 처리를 부탁받은 뒤 비밀 프로젝트 실험체 두 구를 요구한 일에서 비롯됐다.
우덕칭의 보고는 중앙당으로 올라갔고, 결국 폐기 결정으로 이어졌다. 보안 통제에 실패한 연구는 일단 접고, 원점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상당 부분 연구는 후퇴해야 할 테지만, 위험한 연구 결과를 빌런 조직에게 넘길 수 없다는 고육지책이었다.
“흑룡회에 부탁했던 건 어찌하기로 했다는가?”
“한국의 귀환자 처리 말씀입니까?”
“그래. 연변 조선족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 같던데. 조선족이 독립을 선언하면 위구르나 티베트도 시끄러워지지 않겠는가?”
“주석께서 팔대 사부를 호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팔대 사부. 중국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의 각성자들을 의미했다.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존재들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선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중국의 진정한 힘이었다.
중국 중앙 정부는 이들에게 국가 부주석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국가 주석의 지시만을 따르도록 했다.
국가 부주석은 당 서열 8위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정치국 상무위원 7명 바로 아래의 높은 지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국가 주석의 팔대 사부 호출은 한국 귀환자에 의한 조선족 독립 시도를 국가 위기로 간주했다는 의미였다.
“각성자들이 더 많은 걸 요구하겠군. 당이 흔들리진 않을지 걱정되네. 그 전에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어야 했는데···.”
“지금은 우선 연구소부터 벗어나셔야 합니다. 소장님께서 안전하셔야 연구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렌샤오가 앞장섰다.
쉬웨이칭은 좀처럼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실험체를 보고 싶네. 작별 인사라도 나눠야 할 것 같아. 사죄라고 하고 떠나야···.”
“안 됩니다.”
렌샤오가 단호하게 막아섰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폭발 위험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강제로라도 소장님을 모셔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렌샤오가 쉬웨이칭을 들쳐 메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연구소 밖에 대기 중이던 차량에 내던지듯 태웠다. 기사에게 신호했다.
“출발하지. 서둘러야 할 것 같네.”
차량이 출발했다.
연구소에 남은 건 실패로 낙인찍힌 실험체들이 전부였다.
네 구. 본래 다섯 구였지만, 나머지 한 구는 렌샤오의 통장에 찍힌 1000만 달러의 대가로 어딘가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 실험체의 공백을 들키지 않으려는 렌샤오로 인해 쉬웨이칭은 사죄 및 작별 인사의 기회를 강탈당한 셈이었다.
차량이 달리는 내내 쉬웨이칭은 뒤 창문으로 연구소를 바라봤다. 연구소가 점이 돼 사라질 무렵 굉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