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50)

상하이 와이탄 지역 외곽 작은 공원. 평소 같으면 제법 많은 사람이 오가는 장소인데, 이날 따라 한적했다.

공원 중심부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내 외에는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벤치에 앉은 두 사내의 범상치 않은 존재감 때문이었다.

북부전구 부사령원 우덕칭 중장.

북부전구의 3인자였다. 남부전구 관할 지역인 상하이까지 올 일은 없는 인사이기도 했다.

특히 요즘처럼 북부전구가 격변에 휩싸인 시기에는.

하지만 옆에 앉은 사내의 위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상하이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까지라도 가야 했다.

흑룡회 회주 리자오슝.

아시아 최대 빌런 조직인 흑룡회의 주인이었다. 용두(龍頭 Dragon Head). 용의 머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지닌.

흑룡회는 북미와 남미를 아우르는 다크 디멘션(Dark Dimention)과 함께 세계 빌런 조직을 양분했다.

중국 공산당과 협력 관계를 구축한 덕분에 실질적인 위세는 흑룡회가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리자오슝은 전세계 빌런의 정점에 선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부사령원께서 상하이까지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 제가 딱히 도움을 드릴 만한 게 없는 듯합니다.”

나직한 어조였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건넸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실려 있는 기세는 우덕칭의 호흡을 가쁘게 했다.

리자오슝은 조직의 수장인 동시에 초인이었다. 실질적인 중국 최강인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힐 수준의.

빌런은 정식 초인으로 간주되지 않기에 세계 랭킹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만일 포함되면 1, 2위를 다툴 거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자오슝에게 용두라는 칭호가 더없이 잘 어울렸다.

“도와주십시오. 용두. 흑룡회의 도움 없이는 수모를 갚을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습니다.”

북한과 국경 일대에서 북부전구가 참담하게 패퇴한 사건이었다.

각성자 500명을 포함한 3000명의 병력이 지리멸렬했다. 중화기를 비롯한 군사 장비까지 모조리 박살 났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참패를 안긴 자들이 여전히 국경 지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연변 지역으로 향할 예정이라는 첩보도 들려오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쟁 국면으로 접어들 태세였다.

“우리 아이들을 제법 데려다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적지 않은 인원이라고 들었는데···.”

“그, 그건···.”

흑룡회 소속의 적지 않은 빌런들이 작전에 투입됐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회주를 통하지 않고 합류시켰기 때문이었다. 랴오닝성 지부 향주와만 논의된 사안이었다.

리자오슝 입장에선 불쾌할 법했다.

성공적으로 작전을 마쳤으면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향주를 비롯해 투입된 빌런 전원이 죽었다.

리자오슝이 책임을 물어도 꼼짝없이 수용해야 할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방법이 없었다. 벤치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을 수밖에.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야 했지만, 수모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왜 이러십니까. 보잘것없는 사람한테.”

리자오슝이 우덕칭을 일으켰다.

“전쟁은 군인들의 몫이다. 사령원의 확고한 지론 아니었습니까? 우리 애들 데려다 쓴 것도 후방 지원 정도라 여겼습니다.”

“사령원께서도 곧 찾아뵐 것입니다. 지원만 약속해주시면···.”

“우리 아이들을 그리 함부로 쓰시는데, 제가 선뜻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이들을 아낍니다. 소중한 존재들이에요.”

“지휘권을 공유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사령원께서도 동의하신 사안입니다.”

리자오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터에 장수가 둘이라···. 병사들이 어느 장단에 놀아야 하나.”

“그 말씀은···.”

“지휘권은 한쪽으로 집중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냥은 어렵겠습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저도 장사꾼인데···.”

“뭐든 말씀하십시오. 원하시는 것은 뭐든···.”

다 수용할 기세의 우덕칭이었지만, 리자오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북부전구에서 은밀히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제게 넘겨주시지요.”

“그, 그걸 어떻게···?”

실험을 통해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병사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가칭 슈퍼솔져 프로젝트.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프로젝트였다. 중앙당에도 아는 인사는 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아직 50% 공정에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능력을 심어 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제어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실험에 참여한 상당수 인사가 폐기를 주장하고 있기까지 했다.

“아직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위험합니다.”

“통제 문제 때문이겠지요.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리자오슝이 무심한 미소와 함께 우덕칭을 내려다봤다.

“실험체가 다섯이라고 들었습니다. 둘로 만족하겠습니다. 해결책을 찾으면 나머지 셋에게도 적용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제,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리자오슝이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우덕칭은 가슴이 철렁했다. 거절한 것도 아닌데, 손을 쓰려는 것으로 여겼다. 눈을 질끈 감았다.

리자오슝의 언짢음은 우덕칭을 향한 게 아니었다.

“아쉽지만 이만 대화는 마쳐야겠군요. 손님이 오셔서.”

“누, 누가···?”

우덕칭이 다급하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인적은 없었다.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공원 주변으로 휘하 군인들이 물 샐 틈 없는 경계를 펼치는 중이었다.

리자오슝의 호위들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손님이 찾아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입니다. 우리 이야기를 들어서 좋을 게 없는 분이기도 하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끄무레한 인영이 이들 곁으로 스며들듯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유령 같은 움직임이었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미있게 나누시는 건가요? 드래곤 헤드.”

실체를 드러냈다. 여인이었다.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금발 미인.

“흥미로운 내용인 것 같아서 엿들으려고 했더니. 제가 숨어있는 건 어떻게 아셨대요?”

“탐슨 여사의 기세를 어찌 모를 수 있겠소.”

리자오슝이 금발 미녀를 향해 미소지은 뒤 우덕칭에게 눈짓했다.

“오늘 부사령원과는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요청은 수용하시리라 믿겠습니다. 멀리 배웅하지 못함을 용서하시길.”

우덕칭이 리자오슝과 금발 미녀를 번갈아 쳐다본 뒤 굳은 표정으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기분 나쁜 눈빛이군요. 드래곤 헤드 아니었으면 당장 눈을 뽑아서 씹어먹었을 거예요.”

“여사의 고운 입에서 그리 험한 말은 어울리지 않는구려.”

“하하하. 왜 이러실까. 저 인세인 위치예요. 미친 마녀라고요.”

인세인 위치 린제이 탐슨. 다크 디멘션의 4대 수장 중 하나가 상하이 흑룡회 영역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것도 주인 앞에.

팽팽한 긴장이 예상됐지만, 둘 사이는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그래. 다크 디멘션의 수장께서 예까진 어쩐 일이시오?”

“미친 마녀가 무슨 일이겠어요. 미쳐 날뛰러 왔죠.”

“허허허. 재미있겠구려.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미친년 발광하는 게 뭐 볼 게 있다고요.”

린제이 탐슨이 샐쭉하게 입을 내밀더니 표정을 굳혔다.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도움을 원하는 거요?”

“그럴 순 없죠. 우리가 도움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듯하오.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도 않을진대.”

“도와달라고 해도 도와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허허허.”

웃음을 주고받았다.

“도움은 필요 없지만, 부탁은 드려야 할 것 같네요.”

“말씀하시오.”

“눈감아주세요. 드래곤 헤드의 영역에서 말썽이 있을 것 같거든요.”

“내 영역에서 말썽이라···.”

리자오슝이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쓰다듬었다.

“찾는 사람이 지린성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어요.”

“누군지 묻는 건 결례가 되겠소?”

“눈감아주신다고 하면 못 알려드릴 것도 없어요. 한국의 귀환자예요. 유지훈이라고 하던가···.”

린제이 탐슨의 눈매가 싸늘하게 빛났다.

“반드시 죽여버려야 할 놈이죠. 곁에 있는 놈들까지 싹 다. 미친 마녀 무리가 시원하게 칼춤 좀 추려고 해요.”

“제법 시끄럽겠구려.”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니 눈감아달라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보답은 다크 디멘션 차원에서···.”

“눈감아드리겠소.”

린제이 탐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자오슝이 수락했다.

“보답 같은 건 필요 없소. 여사께서 멀리까지 와서 몸소 칼춤을 추신다는데. 판 정도는 깔아드리는 게 도리 아니겠소.”

“하하하. 감사해요. 언제 미국 오시게 되면 말씀하세요. 귀빈으로 모실 테니까요.”

“허허허. 나는 여사처럼 담대하지 못해서···. 내 발로 호랑이 소굴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소.”

“하하하. 호랑이 사냥꾼께서 엄살은···.”

린제이 탐슨이 광기 가득한 웃음을 여운으로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리자오슝이 빙긋 웃었다.

“재미있게 됐군.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미친 마녀가 나서서 궁금증을 해소해주려고 하는군.”

여유로운 동작으로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여덟 개의 인영이 모여들었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대는 여덟 명의 남녀였다.

흑백청홍. 남녀 한 쌍씩 각기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검은색 용 문양만이 일치했다.

“흑웅(黑熊)와 백호(白虎)는 마녀의 뒤를 밟아라. 청랑(靑狼)과 홍사(紅蛇)는 실험체를 확보할 채비를 갖추도록.”

“존명!”

***

폭풍 전야 (1)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독립 국가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첫걸음은 진입이었다. 조호견과 휘하 부대를 앞세워 연변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주 정부 소재지인 연길시였다.

일단 정부 관계자부터 만나야 했다. 전복하든, 흡수하든 만나보고 결정할 문제였으니.

연길시로 향하는 과정은 비교적 순탄했다.

가로막는 이들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 대단하진 않았다.

앞선 패배 때문인지 북부전구는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병력을 동원하긴 했지만, 위협 사격 정도가 다였다.

유지훈 일행이 제압에 나서려고 하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물론 미약하게나마 위협이 되는 자도 있었다.

이윤성이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던 인물이었다. 몬스터를 부릴 줄 안다는 정신 계열 각성자.

열 마리 남짓의 몬스터를 앞세우고 등장했다. 주위로 스무 명 안팎의 각성자를 호위로 세운 모습이었다.

“저놈 레벨은 낮다고 했어. 주위에서 고레벨 각성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몬스터를 부리는 모양이군.”

몬스터의 레벨은 6에서 8 사이였다. 제법 높았다.

레벨 5에 불과한 각성자가 한참 위 레벨의 몬스터를 부리는 건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선봉에 있던 초인 조호견도 제법 고전했다. 휘하 각성자 부대원들도 제압에 애를 먹었다.

그래 봤자 유지훈 일행이 나서면 간단히 물리칠 수 있을 듯했다. 당장 화무결과 이나연만 해도 레벨이 무의미한 강자들이었으니.

유지훈은 이들을 나서지 않도록 했다. 나머지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오직 홀로 조호견의 각성자 부대 앞으로 나섰다.

심지어 심검도 일으키지 않았다.

‘반사기가 통하는지 확인해보고 일으켜도 되겠지.’

몬스터를 부리는 각성자의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다. 튀어나올 듯 노려보더니 유지훈을 겨냥해 맹렬하게 손짓했다.

조호견의 각성자 부대와 겨루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유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씩씩거리는 기세가 사뭇 흉흉했다.

하지만.

“반사!”

유지훈의 심드렁한 손짓 한 번에 그대로 뒤돌아갔다. 정신 계열 각성자와 호위 각성자들에게 돌진했다.

반사기가 정신 계열에도 통하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때? 신기하지?”

지난번에 독공을 되돌린 것을 신기하게 여겼던 화무결에게 물었다.

화무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하군! 두전성이로 몬스터까지 부릴 수 있다니. 자네 대체 못 하는 게 뭔가?”

앞을 가로막았던 각성자들은 그렇게 처치했다.

정신 계열 각성자는 몬스터의 먹이가 됐고, 호위하던 각성자들은 몬스터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죽거나 도주했다.

이후 연길시까지 앞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북부전구 병력은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보무당당하게 연길시 주 정부로 들어섰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오!”

“응. 여기 이 땅 원래 주인들한테 찾아주려고 온 거야.”

“당치 않은···. 당장 나가지 못하겠소!”

주 정부 관료들은 일단 저항부터 하고 봤다.

당연했다. 주 정부 관료 상당수는 한족(漢族)이었기에, 조선족 독립을 모토로 내세운 유지훈 일행을 환영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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