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긴 해도···.”
“그 방법 말고 뭐 있어? 뚱땡이 위원장이 그쪽 살려두려고 하겠냐고. 부하들은 살리고 싶다며? 이 방법 아니면 그냥 다 죽는 거야.”
조호견 입장에선 외통수였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좋은 방법이긴 했다. 명분과 실리 모두 취할 수 있는 절묘한 수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소수 민족의 독립 시도에 대해 극렬하게 진압하는 중국의 대응은 넘기 힘든 산이었다.
“중국 정부가 바로 진압에 나설 거요. 북부전구를 총동원해서, 아니 중부전구까지 끌어들일 수도 있소.”
“그런 거라면 좋은 대응 방법 있잖아.”
조호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도 동참해놓고 모른 척하긴. 각성자가 세운 나라라고 주장해. 각성자 문제는 각성자로 해결하라고 하는 거야. 짱개 놈들 논리 고스란히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니야?”
“하아. 그런 막무가내가 되놈들한테 통할 것 같소?”
“안 통하면 어쩔 건데? 막무가내를 막무가내로 돌려주는 거잖아. 지들이 하면 로맨스고, 내가 하면 불륜이야?”
유지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짱개 놈들 가만히 안 있으면 더 좋아. 나도 가만히 안 있을 수 있거든. 도발에는 응징이지. 처절한.”
어느 틈에 유지훈의 일행 모두 모여든 상태였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유지훈의 시선이 일행을 향했다.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사실 나는 연변만으로는 만족 못 해. 기왕 하는 거 조상님들 차지했던 땅 다 되찾아야지.”
“설마 만주를 다?”
마철진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유지훈은 대답 대신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가 먼저 침공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연변에 북한 각성자들이랑 조선족 독립 국가부터 세우는 거죠. 짱개 놈들이 진압한다고 밀고 들어오면 그땐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북벌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유지연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유지연도 오빠 못지않게 과격한 행동파였다.
“북벌 좋지. 그런데 표현은 조금 달리하고 싶네.”
“어떻게?”
“고구려부터 발해까지. 조상님들의 위대한 뜻을 받드는 것으로. 따지고 보면 우리는 광개토태왕의 후예들 아니겠어?”
강은영이 손뼉을 치며 환영했다.
“좋아요. 작전명은 광개토로 하면 되겠어요.”
“그렇지. 바로 내가 생각했던 거야. 역시 은영이 나를 잘 아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조호견은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벅찬 감격에 전율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화무결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더없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마음이 저리 잘 통하다니. 그런데 지훈이 저 친구는 왜···.”
임정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식 안 올렸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래도 볼 거 다 본 사이니. 식이 뭐 중요하겠는가.”
유지연도 슬며시 끼어들었다.
“볼 거만 다 본 게 아니라, 할 것도 다 한 사이에요. 오빠가 책임을 안 져서 문제지.”
“아. 유지훈 초인이 보기와 달리 매정한 사내였구나.”
“나쁜 남자가 멋있는 줄 아는 모양이에요. 그러다가 새언니 떠나고 피눈물 세게 흘려봐야 정신 차리려나.”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당사자는 못들은 듯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조호견에게 계획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알겠지?”
“알겠소. 가슴 벅차긴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오.”
“걱정할 거 없어. 다 계획이 있으니까. 우리 일행 봐봐. 걱정하는 사람 있어? 다들 당연하다는 표정이잖아.”
“유지훈 초인 일행은 모두 인간계 존재들이 아닌 것 같소.”
“됐고. 가서 부하들한테 계획이나 잘 알려. 나는 뚱땡이 위원장 문제 좀 해결할 테니까.”
김주환 위원장 문제도 넘어야 할 산 중 하나였다.
김주환 위원장에게 조호견과 특수부대원들은 반란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었다. 즉결 심판으로 사형에 처해 마땅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김주환 위원장 통치하에 있었다. 범죄에 대한 처벌의 최종적인 권한도 김주환 위원장에게 있었다.
남북 평화 무드에 찬물을 끼얹지 않도록 원만하게 해결해야 했다.
물론 이럴 땐 외교적 해결 방법이 최선이었다.
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유지훈 초인님. 그쪽은 별일 없으신 거죠?]
“이윤성 국장님. 부탁 하나 드릴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유지훈이 장황하게 통화하는 사이 임정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강은영의 질문에 임정명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벌이고 광개토고 다 좋은데, 좀 허황된 듯해서 말일세. 그런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 우려스러워하는 이도 없고.”
마철진이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네가 병석에 누워 있느라 안 겪어 봐서 그래. 일단 겪어 봐. 유지훈 저놈이 세계를 정복한다고 해도 그러려니 여기게 될 거야.”
***
“지금 뭐라고 했나! 독립 국가 세우는 걸 막으라고 보냈더니, 오히려 독립 국가 세우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는 건가?”
이광진 대통령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이윤성을 앞에 세워둔 채로.
“그것도 중국에다가? 조선족의 독립 영웅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아이고 머리야. 내가 미쳐버리고 말지.”
“고구려 영토를 싹 되찾겠다고 하길래 일단 제가 잘 타일렀습니다.”
“타이르긴 뭘 타일러!”
이광진 대통령이 버럭 했다.
“옳다구나 하고 도와줄 거 뭐 없냐고 했겠지.”
“들으셨습니까? 혹시 제 통화 도청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이고. 주위에 하나같이 멀쩡한 놈이 없냐.”
대통령이 뒷목을 잡기까지 했다.
“괜찮을 겁니다. 지금까지 유지훈 초인이 뭐든 해서 잘못된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걱정일세. 지금까지 잘못된 일이 한 번도 없으니, 확률상 잘못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야.”
“유지훈 초인은 자연의 법칙도 거부하는 능력자입니다. 확률 따위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유지훈에 대한 신뢰가 확고한 이윤성이었다.
이광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해결해달라고 던져준 숙제가 부담스러워 한숨짓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주환 위원장한테 조호견 초인에 대한 사면을 부탁해 달라는 건가? 연변에 데려가서 조선족 독립투사 만들겠다고?”
“사면이라기보다 망명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게 해달라는 셈이니까요.”
“자기가 세우는 나라로 가는 것도 망명이라 할 수 있는가? 중국은 또 어쩔 생각이라는가? 그것도 나한테 떠넘기려는 건가?”
“김주환 위원장님과 함께 해결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끄응.”
이광진 대통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도 저기도 짐만 떠넘기는 자들밖에 없으니···. 비서실장한테 전화 좀 연결해달라고 하게.”
이윤성이 서둘러 비서실장에게 달려갔다. 전화가 연결됐다.
이광진 대통령은 심호흡부터 했다.
“위원장님. 평양엔 잘 도착하셨습니까?”
[덕분에 잘 도착했습니다. 와 보니 골치 아프던 문제도 잘 해결됐고, 여러모로 대통령님께 감사드립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렵사리 설명을 마치고 났더니···.
김주환 위원장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약간의 숨소리 덕분에 전화는 연결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사과하려는 찰나.
[우하하하하하.]
전화통이 떠나갈 듯한 웃음이 들려왔다.
[유지훈 초인 역시 화끈합니다. 시원시원해요.]
“네?”
[안 그래도 조호견 그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는데요. 그런 해결책이 있었군요. 하하하.]
“아. 네···.”
[그 작자와 작당들 그냥 버리긴 아깝지 않겠습니까. 공화국에 얼마 되지도 않는 각성자들인데요. 영토를 휘젓고 다니는 몬스터들은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렇···죠.”
[조호견 그자가 연변에 지내면 군부 좀생이들 신경 안 써도 좋을 겁니다. 가끔 건너와서 몬스터들이나 처치해주면 됩니다.]
김주환 위원장 또한 조호견과 부대원들이 그런 선택에 이르게 된 배경은 모르지 않는 듯했다.
군부와 긴장 관계인 탓에 사정을 봐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북한 땅의 몬스터에 대해선 우리 쪽 각성자들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더 잘 됐습니다. 잘하면 공화국이 몬스터 청정 지역이 되겠습니다. 안 그래도 먹을 게 부족해서 몬스터도 많지 않은데요.]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요.”
[어쨌거나 한민족의 영토가 넓어진다는데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남조선 기업들이 연변에 투자 많이 하면, 공화국 살림에도 많은 도움이 될 테고요. 하하하.]
김주환 위원장이 다시금 화통하게 웃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량강도로 가봐야겠습니다. 출격하기 전에 연회라도 열어줘야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광진 대통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도무지 예측되지 않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하나는 지금 막 통화한 김주환 위원장이고, 또 하나는 전화하게 만든 유지훈이었다.
왠지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듯했다. 만나고 나면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할 것 같았다.
“이러다가 유지훈 초인이 북한으로 가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시름이 깊어지는 이광진 대통령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나도 량강도로 가야 하나?”
***
파란의 조짐
LA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오사카대학 조교수 가와노 유키오는 연신 몸을 뒤척였다.
불안함 때문이었다. 비행기가 무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지.
미국 서부 해안 지역에 비행 몬스터들이 기승이라고 했다. 항공기 관련 사고 소식이 심심찮게 전해지고 있었다.
가와노 유키오는 탑승 순간까지 이번 미국행을 고민했다.
교수로서 커리어가 걸린 일정이었지만,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지는 심히 고민스러웠다.
‘그래도 다녀오기만 하면 부교수 승진이 확실시되는데···.’
어렵사리 결심하긴 했지만, 비행기가 조금이라도 흔들거릴 때면 불안에 떨어야 했다.
비행시간 내내 창밖을 내다봤다. 혹시 비행 몬스터가 접근하진 않는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나마 활력을 주는 기억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공황장애의 재발로 숨이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마무라 레이코···.’
평소 눈여겨봤던 제자였다.
눈에 확 띄게 예쁘진 않았다. 청아하다고 하는 쪽이 어울렸다.
밝고 건강했다. 반듯하고 정숙했다. 학업에도 열정적이었다. 건전한 여대생 상을 대표할 만한 여인이었다.
한편으로 한 번쯤 안아보고 싶은 여인이기도 했다. 청초한 꽃을 꺾는 짓궂음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가와노 유키오도 몇 차례 시도해 봤다.
여인을 유혹하는 실력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던 차였다. 열 번 시도하면 아홉 번은 성공했으니.
은근한 분위기에서 노골적이지 않게, 교수와 제자 사이의 우월한 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면 넘어올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철벽이었다. 오히려 따끔한 훈계까지 들어야 했다.
그랬던 야마무라 레이코가 먼저 달려들었다.
교수 연구실에서였다. 막 정오를 지난 시간, 문을 잠그지도 않은 상황이었기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가까스로 문을 잠근 뒤 정사는 격정적이었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물고, 할퀴고···. 몸 곳곳에 상처를 남기기까지 했다.
마친 뒤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기이한 활력이 솟구치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 감겨진 붕대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손에 붕대는 뭐지? 다친 거야?”
“강아지가 할퀴었어요.”
“그래서 나를 그렇게 할퀴어댄 건가? 강아지 대신 복수 상대로?”
야마무라 레이코를 떠올리니 다시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전신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조바심 또한 잦아들었다. 계속 떠올렸다. 사라져 가는 불안감과 찾아드는 활력이 교차했다.
야마무라 레이코의 기억은 비행 몬스터의 존재를 잊게 했다.
그렇게 비행기는 무사히 LA 공항에 도착했다.
가와노 유키오는 활기찬 발걸음으로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공항 인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