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50)

불행히도 아니었다.

유지훈 일당은 기어코 국경을 넘었다.

“그게···. 보고에 따르면 초인님 일행은 국경을 넘어가서 침략군 기지를 초토화했다고 합니다. 살아 도망간 병력은 있지만, 병기와 군사 장비는 모조리 때려 부쉈다고···.”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유지훈의 지론.

먼저 도발하진 않는다. 대신 도발해 오면 확실히 응징한다.

“끄응. 그러게 짱개 놈들 왜 먼저 도발해 와서···.”

“와하하하. 남측의 초인 덕분에 제가 다 속이 시원합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김주환 위원장은 연회장이 떠나가도록 웃어댔다.

“올라가는 김에 화끈하게 베이징까지 밀어붙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통령님. 하하하.”

“그랬다가 진짜 전쟁이라도 나면 중국 놈들 당장 북한 땅으로 밀고 들어올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하하. 그럼 이판사판이지요. 되놈들한테 대고 있는 미사일 없는 미사일 다 끌어다가 갈겨버리면 됩니다.”

김주환 위원장이 호방하게 웃더니 돌연 정색했다.

“대통령님께선 저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김주환 위원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대통령님께선 미친놈이 왜 무서운 줄 아십니까?”

“······.”

“예측 불허의 행태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잃을 게 없는 지경에 이르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그때는 오히려 예측이 가능할 겁니다. 어디 다 죽어보자고 막 나가는 거죠. 되놈들이 아무리 막무가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 겁니다.”

김주환 위원장이 테이블의 북측 인사들을 둘러보더니 빙긋 웃었다.

“미제 조지려고 준비했던 미사일들 되놈들한테 모조리 때려 박는다고 하면 되놈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위원장님!”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그 정도까지 미친놈은 아닙니다. 되놈들이 그렇게 알아주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김주환 위원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되놈들도 알 겁니다. 선은 넘지 않을 테지요. 어쨌거나 공화국에 믿을 구석 하나는 사라지게 되겠군요. 이제 남측만 믿어야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환대 감사합니다.”

김주환 위원장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북측 인사 전원이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김주환 위원장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이광진 대통령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해도 너무 위험한 인물이구나.”

단순히 미친놈인 줄만 알았는데, 치밀하게 미친놈이었다.

세계 제1의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도 굽히지 않고 욕설을 퍼부어대는 깡다구에 이유가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유지훈과 잘 어울린다는 인상도 받았다.

어째 둘이 붙여놓으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불안하면서도 유쾌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제 우리만 믿겠다고?”

무거운 짐을 떠맡은 기분이었다.

물론 바람직한 짐이긴 했다. 남북한이 공존의 길을 가게 되는 확실한 계기가 될 테니.

그 과정에 닥쳐올 외세의 도전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짊어졌을 뿐,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지. 그래도 지금 우리 대한민국엔 같이 짊어져 줄 능력자들이 있지 않은가.”

유지훈을 비롯해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이들이 수두룩했다.

거기에 최근에 알게 된 천재 소시오패스까지···.

“그나저나 이 인간들 대체 뭘 하자는 걸까?”

떠올리면 가슴이 웅장해지지만, 당장 뭐 할지는 불안하기만 이광진 대통령이었다.

***

국경을 넘어왔던 북부전구 병력을 싹 정리하고 돌아왔다. 조호균의 각성자 특수부대 주둔지인 량강도 인민위원회 건물이었다.

국경을 넘어가서 제대로 한바탕하고 왔기에 제법 피곤했다.

적군의 사상자가 2500명에 육박하고, 박살 난 군사 장비가 수백에 이를 정도였기에 지칠 만도 했다.

“아이고. 짱개 놈들 뭐가 많아도 징그럽게 많더구나. 죽여도 죽여도 끝이 안 보였어.”

“자네가 얼마나 죽였다고 엄살인가? 대부분 유지훈 초인이랑 화무결 형님이 죽였지 않은가.”

“나도 역대급으로 죽였어. 내 평생 이렇게 많이 죽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고.”

마철진과 임정명이 옥신각신했다.

활약상을 평가하자면 두 사람은 일행 중 최하위권이었다. 둘이 합쳐서 죽인 숫자가 강은영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했다.

초인 서열 4위와 3위라는 위상이 무색한 실정이었다.

“화 형은 대체 어디서 온 분인가? 하늘에서 내려오기라도 했나?”

“몰라. 지훈이 녀석이 데리고 왔는데···.”

죽인 숫자로만 놓고 봤을 때 압도적인 1위는 화무결이었다.

유지훈과 이나연의 활약도 못지않았지만, 둘은 인명 살상보다 주로 군사 장비 파괴에 집중했다. 유지훈은 심검으로 잘라버렸고, 이나연은 파란 화염으로 소멸시켰다.

전반적으로 평가하면 유지훈 화무결 이나연이 상위권, 유지연 강은영이 중위권, 마철진 임정명이 하위권이었다.

어쨌거나 인명 살상에 집중하던 다섯 중에선 화무결이 압도적이었다. 그 결과 세 영감 사이에서 서열도 정리됐다.

“민증 깝시다.”

한국인 서열 정리의 끝판왕은 역시 주민등록증 공개였다.

마철진이 제안했지만, 화무결이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민증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르다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민증 나이로 하는 거지. 까보쇼.”

“한 대 맞겠나? 그럼 보여주겠네.”

주민등록증보다 우월한 건 힘이었다.

가볍게 서열이 정리됐다. 임정명과 마철진이 화무결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자네 내자가 귀띔해 주더군. 사내들 간에 나이로 서열 정할 때는 민증 나이를 내세우라고. 안 통하면 쥐어박으면 된다고 했네.”

“그 내자라는 말 좀 그만할 수 없어?”

“인정할 건 인정하게.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처지에.”

잠자코 듣고 있던 유지연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남자가 도무지 책임감이 없어요. 부둥켜안고 몸서리까지 쳐놓고 책임을 안 지려고 하다니···.”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위에 강은영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옆에서 듣고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지원군까지 생긴 마당에 책임지라고 끝을 보려 했을 테니.

그런데 그녀가 다가왔다. 서둘러 주제를 전환해야 했다.

“북한 각성자들은 말썽 안 부리고 잘 있나?”

“말썽은 안 부리는데 걱정은 많은 듯해요. 사실 나도 좀 걱정스럽긴 해요. 중국 놈들 저 지경을 만들어놨으니···.”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화무결과 유지연의 대화를 못 들은 게 다행이었다.

“신경 쓸 거 없어. 짱개 놈들이 먼저 밀고 들어온 거니까. 각성자 문제는 각성자로 해결하래 놓고 군대까지 동원했잖아.”

“그렇긴 해도 국경까지 넘어가서 부대를 박살 낸 건 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건 그렇고 조호견인가 하는 놈 좀 데리고 와줘.”

강은영을 보내려던 유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내가 가야겠다. 은영도 같이 가자.”

강은영을 화무결 유지연과 떼놓기 위해선 붙어서 데리고 다니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조호견과 휘하 각성자 부대원들은 대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굳이 감시하진 않았다. 몰아넣은 뒤 알아서들 있으라고 했다. 도망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다들 꼼짝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지훈 일행의 무시무시한 위용을 직접 목격했기에, 마음대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묵묵히 처분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조호견을 따로 불러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계획은 있어?”

“전쟁에서 패한 장수가 계획 같은 게 있을 수 있겠소.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오.”

“또 그 타령이냐? 여기선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냐? 아니면 삼국지를 너무 많이 읽은 거야?”

유지훈이 핀잔을 주며 몰아붙이자, 조호견은 고개를 푹 숙였다.

패장은 말이 없다를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각성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원대한 포부 세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왜 고개만 처박고 있나?”

“그게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소. 우물 안 개구리였지.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조호견이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또한 초인으로서 각성자의 정점에 올랐다고 자부했지만, 유지훈 일행의 활약상을 본 뒤 다른 세상을 확인했다.

유지훈이나 화무결 같은 절대적인 강자들은 둘째 치고라도, 나머지 인물들도 그와 차원을 달리했다.

각성의 수준은 아래로 보이는 강은영마저도 그보다 월등히 강했다.

“전쟁에서 패한 장수가 무슨 말을 하겠소. 처분을 따르겠소.”

“또 그 타령이네. 그래.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거지?”

“뭐든 시키시오. 죽으라면 죽겠소.”

유지훈이 빙긋 웃더니 처분을 내렸다.

“좋아. 그럼 그쪽이 원하는 나라 세워.”

“처분 따르겠···. 뭐, 뭐요? 지금 뭘 하라고 하셨소?”

“각성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나라 세우라고. 계획했던 대로 독립 선언도 하고.”

“그, 그게 무슨···.”

조호견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게 가능할 것 같소?”

“당연히 그쪽 꼴만 봐서는 불가능하지. 그래서 내가 도울 거야.”

“유지훈 초인은 위원장님과 이야기가 돼서 여기 온 거 아니오? 나라 세우는 걸 돕는다니 위원장님이 가만히 있겠소?”

유지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뚱땡이 위원장이랑은 상관없는 일인데?”

“그건 또 무슨···.”

“설마 내가 여기다가 세우라는 것으로 안 거야? 미쳤어? 기껏 종전 선언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했는데, 나가리 만들 일 있어?”

“그럼 어디에···?”

“어디긴.”

유지훈이 손을 뻗어 북쪽을 가리켰다.

“짱개 놈들 땅에다 세워야지. 예전에 우리 조상들의 땅이기도 했던.”

“설마 북진?”

조호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되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럼 나도 가만히 안 있지. 아니지. 이미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야. 짱개 놈들이 먼저 도발해왔으니까.”

유지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나 말고도 가만히 안 있을 인간 하나 더 있어. 알고 보면 나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인간이야.”

***

작전명 광개토 (2)

량강도로 올 때부터 유지훈에겐 계획이 다 있었다.

북한의 초인과 각성자들을 죽이지 않고도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조호견은 원하던 나라를 세울 수 있어서 좋고. 북한은 초인을 비롯한 각성자 전력의 소실을 막을 수 있게 된다.

한반도 전체로 놓고 보면 땅덩이가 넓어져 행복할 테고.

“말씀은 고맙지만 자신 없소.”

다만 조호견은 회의적이었다.

“지금 나를 따르는 이들을 다 해봤자 100명도 채 안 되오. 나라를 세우기도 힘들뿐더러 유지할 방법도 마땅치 않소.”

“원래도 200명 남짓밖에 안 됐잖아. 100명이나 200명이나 뭔 차이라고 엄살이야?”

“그래도 그때는 여기 량강도에 세우려고 하지 않았소. 우리와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인민들이 있는 곳 말이오. 되놈들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과는 천양지차요.”

일리 있는 걱정이었다.

량강도에 나라를 세우면, 처음엔 주민들의 저항이 있을지라도 하기에 따라 민심을 얻을 수도 있을 터였다.

반면 중국이 터전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역 중국인들의 극렬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엉뚱한 놈들이 나타나서 지배한다는데 환영할 국민은 없을 테니.

이 부분에 대해서도 유지훈에겐 역시 계획이 있었다.

“짱개 놈들만 사는 곳 말고, 우리 민족이 모여 있는 곳에다가 세우면 될 거 아냐.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알려줘야 해?”

“아···.”

조호견의 탄성을 강은영이 이어받았다.

“오호! 연변에 조선족 자치주가 있었군요! 그렇죠. 거기 조선족이 100만 명 가까이 살고 있어요. 거기다 세우면 되겠네요.”

“100만 명은 안 될 거야.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 떠난 사람도 적지 않고, 한족에 밀려서 쫓겨간 사람도 제법 있어. 정책적으로 차별도 존재한다고 하고. 이래저래 우리가 나설 이유는 충분해.”

연변 조선족 자치주.

길림성 동쪽에 자리한 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이다.

조선족 자치주라고는 해도 인구 분포는 한족이 월등히 많다. 200만 인구 중 조선족은 70만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 내 소수 민족 집단 거주 지역 중에서 홀대받는 지역이기도 했다. 원래 자치구였다가 자치주로 위상이 격하됐다.

면적은 경기도와 경상도를 합친 크기였다. 량강도와 비교해 두 배 이상 넓었다. 면적 대비 인구가 적어 개발 여지도 컸다.

현지 조선족과 융화만 이룰 수 있으면, 북한 각성자들이 나라를 세우기 좋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국 소수민족들 너도나도 독립하려고 하잖아. 조선족이라고 못할 거 없지. 그쪽이 가서 나라 세우고 독립까지 선언해버려. 조선족 독립을 내세우면 명분도 확실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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