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브레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린제인 탐슨은 최근 진행된 비밀 작전의 전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진행된 작전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작전이기도 했다. 미 정부에서 일본의 지원 요청을 거절한 뒤, CIA가 나서 비밀리에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투입된 인력도 비공식 요원들이었다. 이른바 블랙 요원이라 불리는.
블랙 요원 중엔 빌런 조직에 속한 인물들도 있었다. 특히 이번 작전엔 다크 디멘션 소속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그 블랙 요원이 인세인 위치의 친동생이라는 점이었다.
“그 작전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없소. 전적으로 동아시아그룹에서 독단적으로 진행한 작전이라···.”
“하하하. 동아시아그룹 나부랭이들이 차기 국장님도 모르게 작전을 진행했다고요?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예요?”
린제이 탐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그게 가능한지 알아봐야겠어요.”
“어, 어떻게···.”
“밖에 요원들 머리를 하나하나 열어보죠. 머릿속에 어떤 내용이 저장돼 있는지 들여다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냥 다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하나하나 죽이면서 아는 것을 털어놓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모르면 죽이고, 알아도 털어놓게 한 뒤 죽이고···.
그전에 제임스 브레넌이 알아서 내놓으라는 압박인 셈이었다.
“하아···.”
제임스 브레넌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의 귀환자를 포섭해 오는 작전이었소. 여의치 않을 상황에 대비해 블랙 요원들이 투입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래서요?”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요. 자세한 내용은 국장에게도 보고되지 않았소. 작전을 마친 뒤 보고하기로 돼 있었소. 하지만 작전에 투입된 인원이 모두 죽어서···.”
“하하하.”
린제이 탐슨이 미친 듯이 웃어댔다.
웃음을 멈춘 순간 그녀의 표정에 남은 건 살기였다. 시선만으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멀쩡한 내 동생을 이국땅에서 개죽음당하게 해놓고 그게 할 말이야? CIA가 우리에게 선전포고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어?”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소. 다크 디멘션과 우리는 협력 관계요. 탐슨 여사가 주도해서 만들어진 관계잖소.”
제임스 브레넌이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알아보겠소.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보고 알려드리겠소.”
“알아보는 정도로는 곤란해. 반드시 알아내. 어떤 놈인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예정인지. 샅샅이.”
린제이 탐슨이 제임스 브레넌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모처럼 화를 냈더니 배가 고프군요. 뭐 좀 먹고 와야겠어요. 그때까지 미스터 브레넌 책상에 내가 원하는 자료가 있어야 할 거예요. 확실히 하는 차원에서 약간의 경고를 남겨두고 가죠.”
린제이 탐슨이 사라졌다.
동시에 요원들의 비명이 비밀 아지트에 울려 퍼졌다.
***
“녀석의 변이 전파 능력이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은 모양이군요.”
이자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지훈으로부터 일본에서 어미 왕도마뱀의 행적을 들은 이후였다.
“예상을 뛰어넘은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 자체로 충분히 재앙이라 할 만했어요. 우리나라는 안전한 거 확실합니까?”
“제가 파악하기론 확실한데···. 추가적인 조치는 강구해야겠군요.”
이자걸에 따르면 변이는 배설물이나 분비물을 매개로 이뤄졌다.
어미 왕도마뱀의 배설물이나 분비물을 섭취한 몬스터 또는 들짐승이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미 왕도마뱀이 잡아먹은 몬스터나 들짐승의 잔해도 변이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했다.
“철저하게 격리하면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먹이는 남김없이 먹어치우도록 해야 할 듯하군요.”
이자걸의 시선이 어미 왕도마뱀을 향했다.
에브리랜드 한복판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곁에 일곱 마리 새끼가 어미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피곤한 모양입니다. 하긴. 일본을 오가는 동안 한잠도 못 잔 듯했으니까요. 이삼일은 저러고 있을 것 같군요.”
“완벽한 격리가 가능하겠습니까?”
질문을 던진 이는 이윤성이었다.
거대 왕도마뱀 가족 문제 논의를 위해 이자걸이 유지훈에게 정부 고위 인사의 방문을 요청했다.
대통령과 상의를 거쳐 이윤성이 방문하게 됐다.
이제 거대 왕도마뱀 가족의 실체는 이자걸과 유지훈 쪽 관계자들 외에 대통령과 이윤성에게까지 공개된 셈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선 쉽지 않겠죠. 아무리 완벽한 격리 시설을 갖춘다고 해도 접근하는 모든 생명체를 차단할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럼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서해에 적당한 크기의 섬을 하나 확보해뒀습니다. 원래 거주민들이 있었는데, 몬스터 서식지가 되면서 이제는 무인도가 된 섬이죠.”
“안전하겠습니까? 육지로 넘어온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충분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일본까지 헤엄쳐갈 수 있는 녀석인데, 서해안 섬에서 육지로 오는 건 언제든 가능할 터였다.
“그럴 일 없도록 잘 훈련시켜 둘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와 동생이 번갈아 가면서 섬에서 지내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말귀 하나는 기가 막힌 녀석들이니 그 부분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해양 몬스터를 정리해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해볼 수 있을 듯하고요.”
유지훈이 한마디 거들었다.
직접 경험해본 입장에서 거대 왕도마뱀 가족은 영리하고, 순종적이었다. 우리 편이라는 점만 보장되면 더없이 든든한 존재들이었다.
이윤성은 여전히 우려스러운 눈치였다.
“저와 대통령님은 유지훈 초인님과 이자걸 대표를 믿습니다만. 반대 진영의 인사들이 어떤 태도일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적 이슈로 공격해올 여지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외국을 끌어들여 공격하면 감당이 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섬으로 보내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가급적 눈에 안 띄게 하려는 의도라고 할까요. 사람들의 일상에서 최대한 고립된 곳에서 자생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려고요.”
“언제든 필요할 땐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할 테고요.”
유지훈이 첨언하자, 이자걸이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려고 공을 들인 건데요. 이미 충분한 성과도 보여줬고요.”
“엿에 관해서는 저만한 녀석들이 또 없죠.”
“아. 엿···.”
엿 이야기가 나오자 이운성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엿 좋습니다. 우리가 먹는 일만 없다면야···. 두 분께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물론 비밀리에, 비공식적으로요.”
거대 왕도마뱀 가족과 공존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됐다.
남은 건 공존의 지속 문제였다. 현시점에서 당면한 문제는 대통령의 자리 유지 여부라 할 수 있었다.
“국민투표는 문제없겠죠? 대통령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인기와 별개로 좀 애매한 상황이긴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합니다.”
***
대통령의 인기는 전적으로 유지훈 덕분이었다. 유지훈의 영웅적인 활약 덕분에 대통령 또한 동반 상승효과를 누린 것이었다.
대통령은 이 부분을 국민투표로 이어가려고 했다. 유지훈 영웅 만들기와 자신의 영웅 발탁 스토리를 연계해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유지훈 영웅 만들기는 성공했다.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다만 영웅 발탁 스토리는 효과가 엇갈렸다. 칭송이 유지훈에게만 집중된 탓이었다. 대통령의 업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기대에 못 미쳤다.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대통령의 반대 세력은 이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대통령이 유지훈 초인의 업적에 얹혀 가려 한다. 대통령이 한 게 뭐 있는가. 대통령은 동영상 협박으로 인한 국정 농단 책임을 유지훈 초인의 업적으로 가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반대 세력은 유지훈에게도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대통령이 유지훈 초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특히 자기면책권에 살인을 포함한 건 지나친 특권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대통령의 그릇된 판단이었다.]
반대 세력의 논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최근 대한민국이 거둔 성과는 전적으로 유지훈의 개인기 덕분이다.
대통령은 유지훈에게 필요 이상의 특권을 부여했다. 향후 국민들에게 위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대통령이 주장하는 업적들은 유지훈 초인에게 부여한 과도한 특권 덕분이고, 장기적으로는 대통령의 실책일 수도 있다.
따라서 대통령은 동영상 협박으로 인한 국정농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여론도 심하게 요동쳤다.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지만, 대통령직 유지에 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는 양상이었다.
국민투표 하루 전 비공식 여론조사에선 찬성 42%, 반대 43%, 기권 15%로 근소하게 반대가 높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했다.
“소신 투표하려고 했는데, 사회가 안 도와주네.”
유지훈도 결국 찬성표를 던지기로 마음을 바꿔야 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이광진이 대통령 자리를 유지해야 운신의 폭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민투표 당일 결과는···.
[찬성 42.3%, 반대 41.7%, 기권 16%]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실질적으로는 패배였다. 대통령과 함께 거취를 국민에게 맡긴 고위 공직자의 80%가 자리를 잃게 됐다.
특히 국회의원 쪽이 타격이 컸다. 재선거에 신임 여부가 달린 여당 의원 대다수가 낙선했다. 그 자리를 대통령의 반대 세력이 차지했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잃었고, 여소야대 국면으로 바뀌게 됐다.
“위대한 국민 여러분의 준엄한 목소리를 경청하겠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 오직 국민을 섬긴다는 각오로 국정에 임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자리는 지키게 됐지만, 입지는 한껏 위축됐다.
여당 내에서도 대통령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임기 2년을 남겨둔 시점에서 사실상 레임덕에 접어들게 된 셈이었다.
유지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양상이었다.
당장 야당에선 자기면책권의 범위 축소를 주장하고 나섰다. 유지훈의 손에 죽은 인물들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까짓거 초인이고 뭐고 때려치우면 그만이긴 하지만, 짜증 나잖아. 확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다른 나라로 귀화나 해버릴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아요. 나라 사랑으로 똘똘 뭉친 양반이 귀화는 무슨···. 그리고 유지훈 씨 귀화하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고요?”
“다 같이 귀화하지 뭐. 받아주는 나라 있지 않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귀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뭔가 상황을 뒤바꿀 반전의 계기가 있길 바랄 뿐이었다.
반전의 계기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
반전의 계기 (2)
[유지훈 초인님, 청와대로 좀 오셔야겠습니다.]
이윤성이 다급하게 유지훈을 찾았다.
“무슨 일인데요?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 하지 않아요? 청와대 들락거렸다가 괜히 비선 실세로 찍히기라도 하면 서로 골치 아프잖아요.”
[그럴 일 없습니다. 전화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일단 모시러 가겠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시죠.]
오래지 않아 이윤성이 영훈길드에 도착했다. 유지훈을 태워 청와대로 향했다.
국민투표 이후 강은영은 주로 국가안전본부 업무에 주력했다.
야당이 성토하는 유지훈에 대한 특혜 문제가 영훈길드로도 향하고 있었기에 몸을 사리는 실정이었다.
유지훈의 청와대행에 함께하기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귀한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유지훈 씨께서 반드시 만나셔야 할 분들입니다.”
“대통령 영감님 손님들을 제가 만나도 되는 겁니까?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요.”
“만나셔도 됩니다. 아니. 만나셔야 합니다.”
이윤성은 왠지 들떠 있었다.
뭔가 꼬여가는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계기를 찾은 인상이었다.
청와대 영빈관엔 대통령과 비서실장 외에 낯선 사내 둘이 있었다.
초췌한 인상의 중년 사내들이었다. 분위기가 묘했다. 무겁고 침울함에 찌든 느낌이었다.
반면 대통령은 애써 무게를 잡는 인상이었다. 밝아지는 표정을 자제하며 사내들의 분위기에 동조하는 듯했다.
유지훈을 보더니 반가워했다.
“오! 유지훈 초인. 어서 오시게. 그동안 본의 아니게 격조했네.”
자리를 청하더니 마주한 두 중년 사내에게 소개했다.
“두 분께서도 인사 나누시지요. 유지훈 초인입니다.”
사내들이 일어나 유지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손에 잡힌 굳은살이 예사롭지 않았다. 초췌하고 음울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강인했다.
사내들도 유지훈의 표정에 깃든 의아함을 놓치지 않았다.
“공화국에서 왔습니다. 위원장님의 특사 자격으로 유지훈 초인님을 뵙게 됐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칭 북한. 국무위원장 겸 조선노동당 위원장 겸 인민군 최고 사령관 김주환이 파견한 특사들이었다.
이광진 대통령이 부연 설명했다.
“두 분께서는 유지훈 초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 것일세.”
“저한테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요?”
“북한이 큰 곤경에 처했다고 하는군.”
대통령이 두 사내를 쳐다봤다. 동의를 구하는 눈치였다.
둘 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통일전선부장 강형택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윤경남 국제부장입니다.”
강형택이 일행까지 소개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대통령님 말씀대로 공화국이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유지훈 초인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을 것 같아 어렵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유지훈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니 대체 뭘까?
일단 궁금했다. 어떠한 문제든 해결할 방법은 다양하게 존재할 텐데, 굳이 유지훈을 콕 찍어 유일한 방법으로 지목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