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르륵! 크르륵!”
“네 친구는 우리가 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키릭키릭!”
“너도 같이 구하러 가고 싶다고?”
“크릉크릉!”
“안돼. 그럼 일이 복잡해져. 너는 가서 새끼들이랑 놀고 있어. 엄마도 너 애타게 기다리고 있단다.”
여기서 엄마는 물론 이자걸을 의미했다.
엄마를 알아들었는지, 녀석이 맹렬히 꼬리를 흔들어댔다.
“크리릭! 크리릭!”
“알았어. 너 도착할 무렵에 친구도 갈 수 있도록 할게.”
녀석이 꼬리로 땅을 박차더니 돌렸다.
힘찬 도약으로 산을 뛰어넘고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대한민국을 향해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손을 흔들어주던 화무결이 눈물을 글썽였다.
“뭐야 우는 거야?”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많아지는 법이네.”
강은영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은영은 또 왜 그래?”
“너무 감동적이에요. 인간과 몬스터의 우정.”
“왜들 이러는 거야?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녀석이 바다 저편으로 사라진 뒤, 강은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나연 씨요. 저렇게 박살 내놨는데, 납치해간 놈들이 해코지하거나 하면 어떡해요?”
“별걱정을 다하네. 괜찮을 거야.”
“진짜 걱정 안 돼요? 나연 씨 우리 동료예요!”
강은영이 발끈해 언성을 높였다.
화무결이 나서 강은영을 다독였다.
“나연 처자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네. 오히려 데려간 놈들을 걱정하는 편이 맞을 것 같네.”
“화 어르신은 또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떤 놈들이 데려간 줄 알고.”
“어떤 놈들이 데려갔든 상관없어.”
유지훈이 한심하다는 듯 강은영을 쳐다봤다.
“그놈들이 실수한 거니까.”
“그게 무슨···?”
“두고 보면 알아.”
“어쨌든 구하러 가야죠. 어디로 가죠?”
“그게 문제이긴 한데···.”
이나연에게 데려가겠다던 하시모토 대위의 목을 날려버렸다. 어미 거대 왕도마뱀이 대위의 부대까지 압살해 버렸다.
현재로선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짚이는 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뻔하지 뭐. 이런 짓 할 놈들이 야마가토 새끼들 말고 또 있겠어?”
“그럼 야마가토산업으로···?”
“가서 확 다 쓸어버리자고.”
“만약 아니면요?”
“앗 실수! 미안! 해야지. 뭐.”
“그럼 나연 씨는요?”
“나연 씨 걱정은 안 해도 된다니까! 알아서 연락 올 거야. 그러니까 운전이나 해.”
강은영이 운전하는 허머가 도쿄 한복판 야마가토산업으로 향했다.
***
“으음···.”
무거운 신음과 함께 이나연이 정신을 차렸다.
바다로 뛰어든 어미 왕도마뱀을 배웅할 때였다. 손을 흔들고 있을 때 산 너머로 포화가 쏟아지는 굉음이 들렸다.
돌아보는 찰나, 뒷덜미가 뜨끔했다. 정신을 잃었다.
어둑어둑한 장소에서 깨어났다. 의자에 앉힌 채 포박돼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창고 같았다.
일곱 명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인이 아니었다. 서양인들이었다. 멀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 둘과 건장한 체구의 사내 다섯이었다.
“깨어나신 모양이군요.”
밝은 갈색 머리의 정장 차림 사내가 그녀가 깨어난 걸 알아봤다.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모셔오는 과정이 다소 거칠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나연 대표님.”
이나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일본행의 명단에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입국 신고가 면제되는 특별 방문이었기에 그녀가 일본엔 온 것은 일행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대단한 정보력을 지닌 조직의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저희는 유지훈 씨와 이자걸 대표에게 용무가 있습니다. 일단 유지훈 씨를 이쪽으로 오도록 했습니다. 유지훈 씨만 잘 협조하면 이나연 대표님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인질이었다.
다만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잘못 알고 저를 데려오신 것 같군요.”
“하하하. 이나연 대표님이 아니라고 하시려는 겁니까? 저희를 너무 우습게 보시는군요. 당장 유전자 검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저는 이나연 맞아요. 대신 대표는 아니에요. 영훈길드 소속 헌터예요. 이틀 전부터.”
“하하하. 이나연 헌터.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갈색 머리 사내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내 정색했다.
“이나연 대표님, 아니 원하시는 대로 이나연 헌터님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이나연 헌터님이 각성자라는 사실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레벨 5? 어쩌면 레벨 6일 수도 있겠군요.”
갈색 머리가 뒤쪽의 건장한 사내들을 쓸쩍 돌아봤다.
“어떤 이유에선지 특성은 개화하지 않으셨더군요. 근래 들어 회사 일은 완전히 중단하고 단련에만 집중하신 까닭이 특성 개화를 위해서가 아닐지 추측하고 있긴 합니다.”
이나연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음을 과시하는 모습이었다.
“흐음···.”
이나연이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저에 대해 이토록 잘 아는 걸 보니 대단한 기관에 속하신 분인 듯하군요. 미국이 일본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고 들었는데, 지저분한 일에는 기꺼이 나선 모양이군요.”
날 선 언사였지만, 갈색 머리는 빙긋 웃었다.
“미국에 이익이 되는 일에는 기꺼이 나서야죠.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표정을 굳히고는 말을 이어갔다.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자는 확실히 제거합니다. 그러니 이나연 헌터님도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협조라···.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 미국의 이익을 위해 협조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 이유는 저희가 알게 해 드리겠습니다.”
갈색 머리가 이나연을 포박한 밧줄을 가리켰다.
“마나를 일으키실 생각이면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밧줄 강철로 만들어졌거든요. 레벨 7의 각성자도 묶어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건장한 사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게 맞습니다. 협회 소속 각성자들은 임무에 동참할 수 없는 상황이죠. 대신 비공식적으로 함께해줄 분들도 있습니다. 저기 계신 분들, 빌런이라 불리긴 하지만요.”
다섯 사내가 차례대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그린 채였다.
“이나연 헌터님이 순순히 협조하시면 저분들은 더없이 신사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협조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나올지 저도 모르겠군요. 저로서는 감당할 능력도 안 되고요.”
“솔직히 협조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몹시 마음에 들거든.”
사내 중 하나가 아랫도리를 툭툭 건드리며 씩 웃었다. 야릇하면서도 위협적인 표정이었다.
이나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려워해야 할 상황인데,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에서 꿈틀대는 기이한 기운 때문에 용기가 솟구치는 상황이었다.
‘뭐지 이게? 혹시 화 어르신이 말하던 공력이라는 건가?’
잠재된 공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던 화무결의 말이 떠올랐다.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라고 여겼다. 변종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쌓인 실전 경험 덕분에 조금씩 잠재된 힘을 활용하게 된 것 같았다.
돌아보니 경험이 문제가 아닌 듯했다. 자극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변종 몬스터에 의한 자극 그리고 납치와 억압을 통한 정신적인 자극. 잠재된 기운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유지훈 씨는 내 수준이 레벨 5가 아니라고 했었지. 못 미친다는 줄 알았는데, 훨씬 위라는 의미였나?’
가만히 기운을 움직여봤다. 전신을 타고 준동했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짜릿한 느낌이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일으켰다. 몸을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듯했다.
기운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향한 곳은 팔이었다. 가볍게 힘을 주자 강철로 만들어졌다던 밧줄이 맥없이 끊겼다.
“어! 레벨 7 각성자도 못 끊는 밧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갈색 머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이게 무슨···. 당장 제압하세요!”
아랫도리를 만지던 빌런이 이나연에게 달려들었다.
“기어코 맛을 보고 싶다는 거로군. 원한다면 기꺼이.”
이나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볍게 손을 내뻗었다. 몸부림치던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려는 동작이었다.
파란 화염 덩어리가 손을 뚫고 나왔다. 달려들던 사내에게 작렬했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화염 덩어리가 사내를 휘감았다. 순간적으로 거대한 광휘를 일으키더니,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사내와 함께.
“어! 특성을 개화한 모양인데요? 혹시 뭔지 아세요? 저는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나연이 싸늘한 미소와 함께 여섯 차례 손을 내질렀다.
여섯 개의 파란 화염 덩어리가 생성돼 남은 여섯 사내를 휘감았다. 그리고 찬란한 광휘와 함께 소멸했다.
***
영웅의 귀환
“아. 그러니까 나연 씨가 초인에 버금가는 능력자라는 말이군요?”
야마가토산업으로 향하는 동안 강은영이 석연찮은 표정으로 물었다.
유지훈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래. 나연 씨가 아는지는 모르지만.”
“이쪽 세상 무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나연 처자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건 확실하네. 모르긴 해도 마가나 서가의 아래가 아닐 걸세.”
화무결도 거들었다.
강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가나 서가가 뭔데요?”
“으음···. 아직 언어의 장벽이 존재하는군. 마철진인지 하는 초인이랑, 서원섭인지 하는 초인 말일세.”
“그러니까 무림에서 쓰던 말 좀 쓰지 말라니까. 사람들 못 알아듣잖아. 무틀딱들이나 알아듣는 표현이야.”
화무결은 무림에서 사용하던 표현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했다.
유지훈이 수시로 핀잔을 줘도 고쳐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70년에 걸쳐 익숙해진 표현들이니.
“저는 괜찮아요. 그윽한 정취가 있어요.”
강은영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러고 보면 길드의 젊은 구성원들, 특히 강민정도 화무결의 무림 언어를 좋아하며 따라 하곤 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해요?”
“뭐가?”
“나연 씨 본부 와서 각성자 테스트받았어요. 제가 알기로 레벨 4로 나왔던 것 같은데, 어떻게 레벨 8에 버금갈 수 있냐고요.”
이론상 불가능했다.
레벨은 장벽이었다. 일단 정해진 레벨은 고착되는 게 정상이었다.
마나를 증폭시키는 약물이 개발돼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순 있지만, 기껏해야 한 레벨이었다. 두 레벨을 끌어올린 사례도 극히 드물었다.
“그게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유지훈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이자걸이 이나연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라고 말할 순 없어서였다. 에둘러 말했다.
“소시오패스를 오빠로 두면 가능해.”
“소시오패스면 이자걸 대표요?”
강은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자걸 대표가 나연 씨한테 어떻게 한 거예요? 우와! 완전 미친놈 아냐! 어떻게 동생한테···. 나연 씨도 알아요?”
“몰라. 그걸 어떻게 물어봐. 그래도 소시오패스 녀석 나연 씨한테는 끔찍해. 알리지 않았어도 해롭지는 않게 했을 거야.”
“나연 처자가 무슨 실험 대상이라도 된 건가?”
화무결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곳에도 그런 일들이 제법 있었네. 혈교의 혈강시가 어쩌고저쩌고. 모산파의 미친 도사들이 얼씨구절씨구···.”
다시금 무림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꺼내놨다.
놔뒀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는데, 강은영이 막아 세웠다.
“무림 이야기는 나중에 한가할 때 해주시고요. 야마가토산업 도착해서는 어떻게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