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글러. CIA냐는 질문에 야마구치 히토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던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었다.
[한국의 귀환자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될지를 판단해보려는 것 같았습니다.]
“보통 놈이 아닙니다. 특작대가 전멸에 가깝게 당했습니다. 랭글리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미 그놈에 대한 분석은 마친 상태일 것입니다. 취약한 구석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게 그들의 전문 영역입니다. 육상막료장께서 우려하실 부분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육상막료장께 연락이 갈 겁니다. 요청하는 대로 지원해주시면 됩니다. 가급적 방위성에서는 모르도록 했으면 좋겠군요.]
“별반을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잃어버린 본국의 명예를 되찾을 기회입니다. 자원을 아끼지 말고 지원해주시길 바랍니다.]
전화를 끊었다.
잔뜩 찡그렸던 야다 히로쿠니의 입가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야마가토산업. 일본의 최대 권력 집단이었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 이후 권력의 뒤안길로 물러난 상태였다.
현재 일본은 야마가토산업은 배제된 채 총리를 위시한 내각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가 한국과의 굴욕적인 협약이었다.
야마가토산업은 밀려난 모양새였지만, 정확하게는 웅크리고 있다고 봐야 했다. 배후의 거대한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들 또한 도약의 채비를 갖출 터였다.
별반(別班). 육상막료감부 예하 정보부 특별근무반의 약칭이었다.
내각의 방위대신에게 보고 없이 육상막료장 임의로 움직일 수 있는 특수 조직이기도 했다.
야다 히로쿠니는 휴대폰을 들어 별반장 다케고지 시게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사이타마현으로 향하는 여정은 예상보다 더뎠다.
가는 길에 나타나는 변종 몬스터들을 처치하려 했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10분 가다가 멈추고, 10분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해야 했다.
“별거 아닌 놈들은 놔두고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보스 몬스터부터 처리하는 게 효과적일 것 같은데요.”
내각 정보요원들은 보스 몬스터 무리 쪽으로 서둘러 가길 바랐지만, 유지훈의 생각은 달랐다.
가는 길에 나타나는 변종 몬스터가 더 우려스럽다고 여겼다.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이놈들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변이가 확산되는 조짐이 발견되고 있거든요.”
기존 몬스터의 변종 외에도 일반 들짐승이 몬스터로 바뀐 경우도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변이가 몬스터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일반 들짐승을 거쳐 애완동물에까지 변이가 이어지면···.
“그 부분은 방위성 차원에서 대비하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을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도록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경고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애완동물에게 변이가 번지기 시작하면 수습 불가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유지훈이 가장 걱정하는 대목은 인간의 변이였다.
아직 보고된 사례는 없었다. 이자걸 또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모를 일이었다. 일반 짐승의 변이도 계산에 없던 사안이었다.
최대한 막아야 했다. 만에 하나 인간이 변이를 일으키면 확산은 시간 문제가 될 터였다. 최인접국인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한 건 당연지사일 테고.
“일단 보이는 족족 처치하고 갑니다. 본진 쪽에는 조금 늦어질 수 있으니 버텨달라고 당부해 놓으세요.”
가는 도중에 변종 몬스터를 처치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자걸의 당부 때문이었다. 이나연의 능력을 개화시켜 달라는 당부였다. 특성이 될지,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유지훈이 파악하기로, 이나연은 엄청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마나인지는 불확실했지만, 크기만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초인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다만 이나연이 사용하는 기운의 크기는 보잘것없었다. 지닌 기운의 30%도 채 활용하지 못하는 듯했다.
특성도 없었지만, 강은영에 맞먹는 위력을 발휘했다. 레벨 5의 각성자라는 이나연의 소개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수준이었다.
유지훈이 예상하기로 이나연은 이자걸의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각성자였다. 이잘걸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긍정에 가까운 미소로 답했다.
‘이나연도 자신이 실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물어볼 순 없는 문제였다.
대신 유심히 관찰할 필요는 있었다.
이자걸의 당부대로 능력의 개화도 유념해야 할 대목이었다.
어쩌면 이나연은 이자걸의 야심작이었다.
인위적으로 각성을 창조하겠다는 이자걸의 야심.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천재 소시오패스의 마스터피스가 될 수 있을 테니.
괴물로 변신하는 이자걸과 달리 이나연은 평소 모습 그대로 각성자의 위용을 과시했다.
능력을 개화하면 어떤 모습일까? 어느 정도까지의 위력을 발휘할까? 특성은 어떻게 될까?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작 당사자는 해맑게 웃으며 변종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각성자로서 처음 실력을 발휘하는 순간이 즐겁기만 한 모습이었다. 순수하게 힘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전히 잠재된 기운의 극히 일부분만을 활용하는 상태였다.
“소저는 가진 공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군.”
“제가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요. 어르신께서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공력이 뭐예요?”
이따금 옆에서 화무결이 도와주고 있었다. 소저니, 공력이니, 무림 시절 용어를 자꾸 사용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무림 천하제일인의 지도는 이나연의 능력 개화에 적지 않은 도움이 터였다.
이번 일본행을 마치고 나면 대한민국이 또 하나의 초인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들어진 초인. 신의 영역에 도전해 탄생한 초인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긴 하겠지만.
***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보스 몬스터 무리가 운집한 곳에 도착했다.
“와! 어마어마하네요.”
강은영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어마무시했다.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다.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새까맣게 무리 지어 있었다.
“이게 대체 몇 마리야? 다 세지도 못하겠는데!”
“저희가 모시러 가기 전에 파악했던 것보다 많아졌습니다.”
내각 정보요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파악된 바로는 500마리가 채 안 됐는데···.”
“지금은 1000마리도 넘을 것 같은데요?”
“변종 몬스터의 속성 때문일 거야.”
유지훈의 분석에 내각 정보요원이 눈빛을 반짝였다.
“변이시킨 개체를 우두머리로 인정하고 모여드는 속성이지. 저놈들 무리의 보스는 이 일대 몬스터 전체의 보스로 군림하고 있을 거야.”
“그 말씀은 계속 이쪽으로 모여들 거란 의미입니까?”
유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모여드는 게 아니고, 주위 개체를 변이시키면서 모여들 겁니다. 오면서 변종이 되는 놈들도 있을 거고요.”
“그럼 보스만 처치하면···?”
“능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여들던 놈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져버릴 테니까요.”
“아···.”
“일본 전역이 변종 몬스터의 서식지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각 정보요원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보스 몬스터만 퇴치하면 한 시름 덜 줄 알았는데, 더욱 골치 아픈 상황으로 번질 처지였다.
유지훈에겐 오히려 잘 된 상황이었다.
보스 몬스터, 거대 왕도마뱀을 죽이지 않고 동해로 몰아내야 하는데. 괜한 의심을 피할 구실을 얻게 됐다.
“보스 놈은 처치를 미루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그럼 어떻게···?”
“보스 놈을 인적이 드문 지역으로 몰아내면서, 조무래기들을 모여들도록 하는 겁니다. 최대한 많은 조무래기들을 해치운 뒤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그러기엔 문제가 있었다.
조무래기들에게 둘러싸인 보스 몬스터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 접근해야 자극해서 움직이게 할 텐데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니···.”
도쿄도 외곽을 지키고 있는 육상자위대 및 주일 미군과 합동 작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포화 물량을 때려 박아 조무래기들을 흩어지게 한 뒤 거대 왕도마뱀에게 접근하는 작전이었다.
내각 정보요원이 연락을 취했고, 사령부에서 승인이 떨어졌다.
“100m 밖으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5분 뒤부터 10분 동안 확보된 물량 전체를 쏟아붓기로 했습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습니까?”
“많으면 200마리, 적게는 100마리 정도일 거라 합니다. 놈들을 흩어놓기엔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이후엔 유지훈 초인님께 모든 게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각 정보요원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유지훈이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시선은 이나연을 향한 채였다.
이번 임무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의 인물이었다. 보스 몬스터, 거대 왕도마뱀의 친구이기도 했다.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막중한 임무를 앞두고, 이나연은 적잖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강은영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못 살아. 진짜 손을 꼭 붙잡고 있잖아.’
이윽고 변종 몬스터 무리에게 포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10분 뒤 포화가 멈췄다. 뽀얀 흙먼지가 걷혔다. 여기저기 몬스터 사체가 보였다. 포화를 피해 흩어졌던 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일제히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닥치는 대로 조무래기 몬스터들을 처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천지가 떠나갈 듯한 괴성이었다. 동시에 조무래기 몬스터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쿵쿵쿵!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놈이 달려왔다.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반가워서 저러는 거야? 잡아먹겠다고 저러는 거야?”
심상치 않은 여정 (2)
무지막지하게 달려오는 거대 왕도마뱀이 향하는 방향은 정확하게 이나연이 있는 곳이었다.
50m가 넘는 몸길이에 머리 높이만 3m에 달하는 엄청난 놈이었다. 날름거리는 혀의 길이도 5m는 족히 넘을 듯했다.
조무래기 몬스터들은 양쪽으로 좍 갈라져 길을 터줬다. 모세의 기적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저놈 설마 잡아먹겠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거대 왕도마뱀이 이나연 근처까지 오더니 앞발을 힘차게 휘둘렀다. 거센 바람과 함께 이나연을 덮쳐갔다.
“저, 저놈 친구라 그러더니···!”
유지훈이 다급하게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어진 광경에 멈춰섰다. 주위 조무래기 몬스터들 처치를 이어갔다.
거세게 휘둘러 가던 거대 왕도마뱀의 앞발이 이나연 앞에서 톡 건드리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친구에게 장난이라도 걸듯.
멀리서 보면 강하게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유지훈에겐 또렷이 장난으로 보였다.
“영악한 놈 맞구먼. 속임수를 다 쓰네.”
이나연은 앞발을 맞고 나뒹구는 시늉을 하기까지 했다.
몬스터와 사람이 쌍으로 속임수를 쓰는 명장면을 구현했다.
“친구야.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크르렁!”
“새끼들 보고 싶다고?”
“크르륵! 크르륵!”
“애들 너무 커져서 못 알아볼걸?”
“크릉크릉.”
대화를 나누는 동안, 거대 왕도마뱀은 앞발을 두 차례 더 휘둘렀고, 꼬리를 세차게 내리치기도 했다.
이나연은 펄쩍 뛰어 피했다가, 앞발에 맞아 주저앉는 장면도 연출했다.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연달아 펼친 끝에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네 등에 타고 집까지 갈까?”
“키릭키릭!”
“잠수해서 갈 거라서 안 된다고?”
“크르륵! 크르륵!”
이 와중에 이나연은 녀석의 등짝에 두 차례 주먹질을 날렸고, 녀석은 이나연을 떨구려는 듯 몸을 거세게 흔들어댔다.
한마디로 생쇼를 해댔다.
유지훈을 비롯한 일행들도 생쇼에 가담할 차례였다.
유지훈이 먼저 심검을 일으켜 공격하는 시늉에 나섰고, 강은영이 염동력으로 생쇼에 합류했다.
화무결은 장력을 일으켜 녀석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마침내 거대 왕도마뱀이 무리를 벗어나 내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동해, 일본의 서쪽 해안을 향해서였다.
“지금입니다! 조무래기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라고 하세요.”
유지훈이 정보요원에게 외친 뒤 허머에 올라탔다.
“물량을 조금 전에 다 투입했을 텐데요?”
“지원 병력이라도 불러들이도록 해야죠.”
“유지훈 초인님께서는···?”
“저희는 놈의 뒤를 쫓으면서 조무래기들을 처치하겠습니다.”
거대 왕도마뱀은 멀찌감치 맹렬한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등에는 이나연이 올라타 있었고, 화무결은 정수리 부위에 매달려 있었다.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더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조무래기 몬스터들이 뒤를 따랐지만, 속도의 차이가 현격했다.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양상이었다.
그러는 사이 강은영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량은 저희가 가져가겠습니다.”
“운전 못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얘는 할 줄 압니다.”
강은영이 차를 몰고 나갔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요원들을 향해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쫓아가는 조무래기들 확실히 처치해야 합니다.”
유지훈은 시키기만 하고 자신은 나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열심히 심검을 휘둘러댔다.
심검이 닿는 곳마다 몬스터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차가 지나가는 곳마다 도륙당한 몬스터들이 이리저리 내팽개쳐졌다.
요원들은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넋 놓고 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서두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