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50)

1000억 달러가 대한민국 정부 통장에 꽂히는 걸 확인한 뒤 다음 논의가 진행됐다.

사실 다음 논의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일본 총리는 일왕의 사죄 부분을 제외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일왕은 상징적인 존재이긴 했지만, 일본 국민들에겐 신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국가적인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명분 만큼은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지만, 앞선 논의 과정에서 명분의 무의미함을 깨닫기 어렵지 않았다.

바로 내각부 궁내청에 연락해 일왕의 사죄 성명 발표를 지시했다.

세부 사항 조율도 끝났다.

모든 게 대한민국의 의도대로 됐다.

그나마 일본 총리의 성과는 배상금 중 1000억 달러는 국가 채무로 처리돼 지급이 유예된 정도였다.

조인식이 진행됐다.

유지훈은 굳이 참석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초청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그저 귀찮아서였다.

“가지 그랬어요. 역사의 현장에서 후련했을 것 같은데···.”

강은영은 조인식에 참석하지 못한 게 아쉬운 듯했다.

유지훈은 우적우적 팝콘을 씹으며 피식댔다.

“TV로 보는 게 훨씬 나아. 표정 하나하나 생생하게 볼 수 있잖아. 일본 총리 똥 씹은 표정 같은 거 현장에선 못 봐.”

“하긴. 결과야 뻔히 나와 있는 거였고. 표정 보는 게 훨씬 재미있긴 하네요. 통쾌하기도 하고요.”

“대통령 영감님 우쭐하는 표정도 볼 만했잖아. 그나저나 국민투표 할 필요 있을까?”

“그러게요. 대통령님 인기가 연일 역대급을 경신하고 있어서···.”

이광진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일본과 관련된 국민감정을 후련하게 씻어내 준 덕분이었다. 단순히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준 결과였다.

“동영상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국민들이 있긴 할까?”

“그건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누구랑 찍혔는지가 원체 관심사여서요. 유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잖아요.”

“응. 유명 배우래.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이라던데.”

“유지훈 씨는 누구인지 아는 거예요?”

강은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알면 진작 말을 했어야죠.”

“나도 아는 건 그게 다야. 물어봤는데 안 알려주더라고. 적당히 기회 봐서 또 물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음을 접었다.

괜히 물어봤다가 주례 타령하면 골치 아파질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동영상은 남아 있잖아요.”

동영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박순덕이 죽으면서 숙제로 남겨뒀다.

“그러게. 이러다가 덜컥 어디선가 공개되는 거 아닐까?”

“대통령님은 아세요? 동영상 아직 있는 거.”

“모를 거야. 우리가 말 안 했잖아.”

“대통령님 임기 중에 공개되면 골 때리겠네요.”

“그때 대통령 영감님 표정 보는 것도 재미있겠네.”

***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날, 출동 인원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했다.

일본을 휩쓴 변종 몬스터 현황을 점검하고, 효과적인 대응 방식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핵심은 동영상 시청이었다.

전투기가 출격해 미사일 투하 작전을 펼쳤을 때 상공에서 찍은 영상이었다. 미사일이 빗발쳐도 끄떡없는 변종 몬스터의 실상이 담긴.

“와! 이게 대체 뭐래?”

마철진이 기함하며 혀를 내둘렀다.

변종 몬스터들의 보스, 거대 왕도마뱀의 어마어마한 실체 때문이었다. 몸길이만 50m에 달하는···.

“저건 레벨로 분류할 수 없는 놈이네. 그냥 재앙이야.”

영상 속의 거대 왕도마뱀은 물론 빨주노초파남보의 어미였다.

이자걸의 농간(?)에 의해 변종 몬스터에서 또 한 차례 진화했다. 변종 몬스터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었다.

작전 회의 참석자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장 약한 태광길드 마스터 권준성은 하얗게 질려 입도 벙긋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한민국 초인 서열 1위 서원섭도 한숨만 내쉬었다.

“우리가 간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시체만 더해주는 거 아니야?”

마철진이 회의적으로 물었다.

물론 상대는 유지훈이었다.

“그러니까 저놈은 저희 길드에서 맡는다고 했잖아요. 영감님들은 저놈 있는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세요.”

“너라도 뭐 다를까? 저놈 덩치 봐. 너는 그저 저놈 앞발 크기밖에 안 돼. 코끼리한테 달려드는 쥐새끼 꼴이라고.”

덩치도 덩치였지만, 코에서 뿜어내는 혈독은 더욱 무시무시했다.

수백 미터 상공을 날아다니는 전투기를 정확하게 가격해 기체를 녹여버렸다. 날개 부분이 녹아내리며 추락하는 전투기의 모습은 장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변종 몬스터들이 일반 몬스터들을 변이시키는 점인데···.”

최금강의 탄식이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이었다.

일본 정부가 건넨 정보에 따르면 변종 몬스터의 개체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발견되는 지역까지 전국 각지로 확산되는 양상이었다.

“저놈 말고 다른 변종들은 영감님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 겁니다. 퇴치하시면서 한국인 거주민들 귀국만 잘 챙겨주세요.”

유지훈에게 거대 왕도마뱀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자걸이 일본에 보낸 우리 편이나 마찬가지 존재였으니.

일본행의 목적도 퇴치가 아니라 귀국하도록 손을 쓰는 것이었다.

다만 녀석이 변이시킨 변종들은 문제가 될 수 있을 듯했다.

이 부분은 이자걸과 상의가 필요했다. 효과적으로 녀석을 귀국시킬 방법도 알아볼 겸해서 이자걸을 만나기로 했다.

***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제가 봐도 좀 너무하네요.”

영상을 본 이자걸도 기함했다.

어마어마해진 녀석의 덩치도 경악할 노릇이었지만, 주위 개체를 변이시키는 능력이 예상을 뛰어넘은 탓이었다.

“돌아오면 그 부분은 신경 써서 살펴봐야 할 것 같군요. 국내 몬스터들까지 변이시키면 곤란할 테니까요.”

“신경 쓰면 해결되긴 하는 겁니까?”

“정 안되면 격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른 몬스터들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

에브리랜드에 잘 모셔두면 격리는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쥬라기공원>처럼 고압 전류가 흐르는 우리를 설치하는 방법도 있을 테니.

“그나저나 안전하게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있긴 합니까?”

“적당히 몰아내시면 됩니다. 동해로 뛰어들게만 하면 알아서 헤엄쳐서 돌아올 겁니다.”

참 쉽게도 말하는 이자걸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몰아내냐고 묻는 겁니다. 나한테 덤벼들지 않겠어요? 그럼 저도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고요.”

“그건 곤란한 일이죠. 유지훈 씨가 녀석을 살려둘 리 없을 테니까요. 안 덤빌 겁니다. 유지훈 씨 알아볼 거예요. 영리한 녀석이라.”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때 섬에서 잠깐 본 거잖아요. 심지어 그때 나는 녀석을 죽이려고 했다고요.”

이자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당시 유지훈은 녀석을 베려고 했다가, 그의 만류로 검을 거뒀었다.

만일 녀석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유지훈을 보고 공격성을 보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잠시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겁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녀석과 몹시 친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겁니다. 녀석이 여기 머무는 동안 친구처럼 지낸 사람이죠.”

이번엔 유지훈이 눈살을 찌푸릴 차례였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였다. 동행하기 난처한.

“혹시···?”

“생각하시는 그 혹시가 맞을 겁니다.”

“하아···. 물론 조건이 있겠죠?”

“역시. 바로 아시는군요.”

이자걸이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조건을 꺼내놓았다.

“나연이를 영훈길드에 받아주십시오.”

“이자걸 대표가 가면 안 되는 겁니까? 녀석한테 어미 같은 존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기서 할 일이 많습니다. 새끼들이랑 같이 어미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고요.”

이나연의 영훈길드 합류.

강은영의 결사반대에 막혀 있는 상태였다.

가끔 운을 띄워보긴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나예요? 이나연이에요? 둘 중 하나 선택하세요.”

무림까지 데려가서 특성 두 개까지 안긴 마당에 강은영을 버리고 이나연을 선택할 순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라고 설득하면 받아들일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동행하는 과정에서 두 여인의 신경전을 어떻게 감당하나였다.

‘그냥 책임진다고 할까?’

***

진격의 서막

일본으로 향하는 유지훈의 일행은 단출했다.

물론 영훈길드 인원에 한해서였다. 다른 길드 인원은 많았다. 각각 50명씩 다 해서 150명에 달했다.

영훈길드는 유지훈 외에 마스터 강은영과 무술 사범 화무결 그리고 신입 길드원 이나연이 전부였다.

“영훈길드는 고작 네 명이 전부냐? 보스 몬스터가 이끄는 무리를 상대한다고 하더니···.”

마철진의 질문에 유지훈은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렇게만 가는 게 나아요. 나머지는 가봤자 짐만 돼요.”

“하긴. 영훈길드는 구성원 간에 전력 차이가 좀 심하지. 자네랑 저 친구만 해도 대한민국 길드 다 합친 것보다 강하기도 할 테고.”

마철진이 가리킨 저 친구는 물론 화무결이었다.

화무결의 나이는 70이 넘었기에 마철진보다 한참 형님이었다. 다만 차원 이동 과정에서 환골탈태해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화무결은 굳이 나이를 밝혀 윗사람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보이는 외모로 대우받길 원했다.

이유는 여인들과 좋은 만남을 위해서였다.

“여기 처자들은 왜 다들 이토록 아름다운가? 내 저쪽에서 만나지 못한 인연을 여기서는 반드시 만나야 할 것 같네.”

“정신 차려. 칠순을 넘긴 노인네가 인연은 무슨 인연이야.”

“내가 어디 칠순으로 보이는가. 자네 내자가 그러는데 서른이라 그래도 믿을 거라는군. 서른은 좀 그렇고, 마흔 정도로 살 생각이네.”

워낙 수려한 용모라 슬슬 인연을 만날 기미를 보이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현대 사회에 적응도 마쳐가는 와중에 영훈길드 주변 음식점 등에선 화무결에 대한 소문까지 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미남자가 능력까지 출중하다고.

엄덕대에 따르면 방송사에서도 간혹 연락이 온다고 했다. 이러다가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당할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런데 표정은 왜 그래? 못마땅한 거라도 있는 거야?”

마철진이 유지훈의 씁쓸한 웃음을 알아봤다.

물론 못마땅한 게 있었다. 길드원들의 태도였다.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변종 몬스터가 창궐한 곳에서 영훈길드 구성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데려가 달라고 조르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한편으로, 기대도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하고자 하는 녀석이 몇 명이나 있을지.

한 놈도 없었다. 다들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혹시 데려가겠다고 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못난 놈들. 돌아가면 뺑뺑이 제대로 돌릴 겁니다.”

“하하하. 뺑뺑이 돌릴 때 나도 꼭 불러라. 같이 돌리자.”

걱정됐던 두 여인의 신경전은··· 일단 괜찮았다.

이나연의 실체가 여우였던 덕분이었다.

우선 한국인의 첫 만남 필수 코스, 나이 확인에서 시작됐다.

강은영은 서른둘, 이나연은 서른하나. 강은영이 한 살 위였다.

“마스터님이 언니였네요!”

“그···렇죠. 제가 언니네요.”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홍길동도 아니고 언니를 언니라고 부른다는데 안 될 이유가···.”

“언니!”

그때부터 두 사람은 바짝 붙어 앉아서 수다를 떨어댔다.

이나연의 여우 기질이 본격적으로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니. 그게 말이 돼요?”

“뭐가요?”

“유지훈 초인님이랑 언니 말이에요. 그렇게 잘 어울리는데, 안 사귀는 게 말이 되냔 말이에요.”

“그, 그게 그러니까···.”

얼굴이 빨개져 머뭇거리는 강은영을 이나연은 제대로 몰아쳤다.

“유지훈 초인님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유지훈 씨가 눈이 좀 사시이긴 한데···.”

“이렇게 예쁘고, 능력 있고, 착하기까지 한 언니를 두고···.”

“그렇···죠? 내가 예쁘고 능력 있고 착하기까지 하죠···.”

이나연이라는 절세의 여우 앞에 강은영은 미련한 곰이었다.

한마디 한마디 던질 때마다 무장해제된 채 헤벌쭉 웃어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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