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50)

일본의 각성자 생태계가 박살 나버린 결과였다.

그 와중에 죽은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몬스터 무리가 기세등등하게 사이타마현을 지나 도쿄도까지 진격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제 육상자위대와 주일 미국 육군 병력을 총동원해 도쿄도 일대만 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주일 미국 공군 폭격기가 출격해 미사일을 쏟아붓는 방법. 몬스터 몇 마리 잡자고 민가를 쑥대밭으로 만들 위험한 수단이었다.

“한국에 다시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외무대신께서 다녀와 주시지요.”

일본 총리 와타나베 츠요시가 참담한 표정으로 외무대신 이노우에 후미오를 불러들였다. 이광진 대통령에게 전달할 친서를 건넸다.

기존의 요구 사항은 물론이고 추가로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항복 문서였다.

이노우에 후미오는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주한 대사와 함께 청와대로 달려갔다.

정문 앞에 나란히 무릎 꿇고 앉아 석고대죄에 들어갔다.

“제발 일본을 용서해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통령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내외신 할 것 없이 모든 언론사를 청와대로 불렀다. 일본 외무대신과 대사가 석고대죄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게 했다.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톱뉴스로 다뤄졌다.

유지훈 또한 영훈길드에서 뉴스를 지켜봤다.

“유지훈 씨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옆에서 뉴스를 보던 강은영이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뭐가? 또 왜 그래?”

“어떻게 한 놈 남김없이 싹 다 소멸시킬 수 있어요?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이라도 한 거예요?”

“내가 무슨 점쟁이야? 한일 각성자 수준 좀 바꿔놓으려는 거잖아.”

“수준을 바꿔놓은 정도가 아니잖아요. 일본은 각성자 생태계가 소멸했어요. 아예 씨가 말랐다고요.”

“은영도 찬성해놓고 이제 와서 왜 이래?”

“나는 나쁜 짓 저지른 놈들만 소멸시키라고 한 거였어요.”

“똑같이 나쁜 놈들이야. 누군 봐주고, 누군 처단하고, 구분할 놈들이 아니었다고. 공평하게 싹 다 소멸시키는 게 정답이었어.”

유지훈의 특성, 소멸기가 발동한 결과였다.

일본 각성자들을 억류할 때, 유지훈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일일이 만져줬다. 한 놈 남김없이 소멸기를 작렬시켰다.

일본 각성자들을 석방했을 때, 살짝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일본에선 각성자들이 돌아온다고 좋아했겠지만, 실은 비각성자들을 돌려보낸 셈이기 때문이었다.

내심 일본이 뒤통수쳐주길 바랐다. 그럼 개운하게 반사기로 뒤통수 후려치기를 되돌려줄 수 있을 테니.

역시 일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 결과 제대로 뒤통수를 처맞고 나가떨어진 결과가 됐다.

“이윤성 국장 전화 온다. 대통령 영감님이 찾는 모양인데.”

예상대로였다.

[유지훈 초인님. 청와대로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일본에 뭐 요구할지 정하려는 거 아닌가요? 저는 없어도 될 것 같은 듯한데요?”

[요구 사항은 그렇긴 한데, 일본으로 파견한 인원에 유지훈 씨가 빠져서는 안 될 노릇이라서요.]

“하긴. 당사자도 없는데, 가서 해야 할 일들 정할 수도 없겠네요. 은영도 데려갈게요. 영훈길드 마스터 자격으로요.”

[강은영 국장님도 일본에 같이 가시는 겁니까?]

“당연히 같이 가야죠. 두고 가면 농땡이나 부릴 텐데요.”

전화를 끊고 곧바로 청와대로 향했다.

강은영은 투덜대면서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또 왜 걸고넘어지는 거예요?”

“대통령 영감님 만나면 하고 싶은 말 있다며? 동영상 찍힌 거 따끔하게 한소리 하겠다고 펄펄 뛰었잖아.”

“그거야 우리끼리 하는 말이죠.”

“아니야. 오늘 가서 한마디 해. 여성 유권자를 대표해서 대통령 영감님 준엄하게 꾸짖어줘.”

“그러다가 쇠고랑 차면 유지훈 씨가 책임질 거예요?”

틈만 나면 책임지라고 파고드는 강은영이었다.

넘어갈 유지훈이 아니었다.

“응. 그럴 일 없어. 정신이나 바짝 차려. 좋은 구경 놓칠라.”

“무슨 좋은 구경···?”

눈앞에 펼쳐졌다.

일본 외무대신과 대사가 청와대 정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처박고 있는 광경이었다.

다 찍고 떠났는지 언론사 카메라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민들이 몰려들어 삿대질하고 있었다.

“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그런데 우리 외교관들이 외국 나가서 저러면 어쩌나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네요. 대통령님도 적당히 들어오게 해주시지.”

“일 년 열두 달 저래도 싼 놈들이야. 이럴 때 보면 은영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그러니까 유지훈 씨가 책임져요.”

역시 호시탐탐 책임을 부르짖는 강은영이었다.

유지훈은 이러다가 세뇌당하는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윤성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엔 이미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정부 고위 관료들 외에 서원섭 마철진 등 초인들과 최금강 권준성 등 길드 마스터들도 참석했다.

일본으로 지원 인력 파견이 결정되면 가야 할 인사들이었다.

초인 자격으로 참석한 유지훈은 마철진 옆에, 길드 마스터 자격으로 참석한 강은영은 최금강 옆에 착석했다.

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첫 번째 안건은 지원 인력 파견 여부와 규모입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파견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명분은 인도적인 지원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일본 내 한국인 거주민의 무사 귀국이었다.

규모는 200명 정도에서 조절하기로 했다.

우선 두 초인 서원섭과 마철진이 각각 길드 연합과 태광길드를 이끌기로 했다. 최금강은 금강길드와 함께하고, 유지훈은 영훈길드의 수장으로 작전을 진행하기로 했다.

“변종 몬스터 퇴치는 영훈길드에서 맡을 테니, 나머지 분들은 한국인 거주민들 귀국에 집중하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유지훈의 제안도 무난히 받아들여졌다.

다들 유지훈과 화무결의 어마어마한 실력을 목격한 바 있었다. 둘이면 재앙급 아니라 재앙 자체가 와도 문제없을 판이었다.

“다음 안건은 일본에 요구할 사항입니다.”

이것도 그리 오래 걸릴 논의는 아니었다.

기존 요구 사항에 몇 가지만 더 추가하면 될 일이었다.

다만 국제사회 통념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결정해야 했다.

“대마도 영유권을 요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대마도가 신라의 영토였다는 역사적 기록도 있으니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입니다.”

만장일치로 통과.

“야구계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프로야구단들이 겨울 전지훈련으로 오키나와를 많이 간다더군요. 한국 땅이 되면 비용 절감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야구 팬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되겠군.”

오키나와 영유권 요구도 만장일치로 추가.

“또 요구할 지역이 없으면 금전적인 부분을 논의하도록 하시죠.”

일제 침략기에 대한 보상과 각성자 회합을 빌미로 저지른 만행에 대한 배상 그리고 한국 각성자 파견 비용이었다.

일단 대차게 지르고 보자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이래저래 고려해서 이것저것 더하고 뺄 거 빼면, 2000억 달러쯤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2000억 달러면 240조 원이나 되는데, 일본에서 받아들일까요?”

“통장에 꽂히는 거 확인한 다음에 가겠다고 하면 일본 녀석들이 어쩌겠습니까?”

이것저것 다 더한 배상액은 2000억 달러로 결정됐다.

여기에 지금까지 일본이 저지른 모든 만행을 인정하는 일왕(日王)의 성명과 사죄도 추가하기로 했다.

일제 침략기에 대한 사죄에 더해 최근 저지른 만행도 포함했다.

야마가토산업의 몬스터 대상 실험, 각성자 회합을 빙자한 음모, 해상자위대 2개 호위대군의 동해안 침공 등.

역시 성명 발표 이후 지원 인력이 일본으로 출국하는 조건이었다.

이제 공은 일본으로 넘겨질 차례였다.

외무대신과 일본 대사를 불러들였다. 내용을 전달한 뒤 요구했다.

“총리를 한국으로 오라고 하세요. 정식 인준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인도적 지원이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총리께서 당장은 무리가···.”

“오기 전까진 아무런 지원도 없습니다.”

외무대신과 대사가 축 처진 어깨로 청와대를 나섰다.

그렇게 통쾌했던 회의가 끝났다.

대통령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러 다가왔을 때, 유지훈은 강은영을 앞세웠다.

“대통령님. 우리 마스터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오. 영훈길드 마스터. 해보게. 경청하겠네.”

강은영이 주저주저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동영상 찍힌 것 말인데요. 누구랑 찍힌 거예요? 유명한 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너무 궁금해서요···.”

대통령의 표정이 잠시 썩어들어가더니 너털웃음으로 바뀌었다.

“허허허.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 혹시 주례 필요하면 말하게.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겠네.”

강은영에게 다시금 기회가 왔다.

눈빛을 반짝이며 유지훈을 바라봤다.

“들었죠? 그러니까 책임져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는데···.

이러다 정말 넘어갈 것 같았다.

***

굴욕을 되돌려준 역사의 현장

일본 총리 와타나베 츠요시는 하루가 지나도록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위험한 작전을 승인했다.

항공자위대의 전투기 투입이었다. F-15J/DJ 전투기 30대를 투입해 변종 몬스터 집결 지역에 미사일을 쏟아붓기로 했다.

사이타마현 중심부 민가와 상업 시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작전을 마치고 나면 폐허가 될 터였다. 한국에 굴종하느니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할 각오로 작전을 진행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미사일을 쏟아부어도 보스 변종 몬스터는 건재했다.

주위의 조무래기 몬스터들만 죽었을 뿐이었다. 고레벨 변종 몬스터들도 그다지 상처를 입지 않은 양상이었다. 애꿎은 도시 중심부만 날려버린 결과가 됐다.

오히려 피해는 전투기 쪽이 컸다.

변종 몬스터들의 반격이 상상을 초월했다. 입, 코 등 몸뚱이에서 뿜어낸 독액이 전투기까지 날아왔다. 기체를 녹여버렸다.

출격한 30대 중 7대가 추락했고, 12대는 기체 이상으로 퇴각해야 했다. 남은 9대로 작전을 이어가긴 무리였다.

미사일 공격도 소용없었다. 공군 전투기 대응도 사실상 의미 없다는 점만 확인한 작전이었다.

일본 총리가 손을 들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한국에 안겨줄 선물을 싸 들고 김포행 비행기에 올라타야 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조건이 까다로워지는 건 총리께서도 아시겠죠?”

이광진 대통령은 의뭉한 미소와 함께 일본 총리를 맞이했다.

일본 총리의 표정에 당혹감이 번졌다.

“네? 그게 무슨···.”

안 그래도 수용하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거기서 더 까다로워지면 감당이 쉽지 않을 판이었다.

이광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총리께서 한국에 너무 힘들게 오신 듯해서요. 앞으로 편하게 오시라는 취지로 농담 한 번 던져봤습니다.”

이광진 대통령이 일본 총리를 조인식 장소로 안내했다.

창덕궁 흥복헌. 경술국치라는 굴욕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현장이었다.

조선 왕조 최후의 임금 순종이 마지막 어전회의를 진행했던 곳. 나라의 치욕이 기록된 장소에서 조인식이 거행됐다.

굴욕을 굴욕으로 되돌려주는 의미심장한 거사였다.

일본 총리도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그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조인식에 앞서 세부 사항에 대한 조율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에는 미군이 주둔해 있습니다. 미국과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한국에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미군 기지를 일본 본토로 이전하면 되겠군요. 그 부분은 대한민국이 알 바 아닙니다. 일본에서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주일 미군을 들먹인 오키나와 영유권 이전 거부. 이광진 대통령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정 힘들 것 같으면 돌아가십시오. 미국과 협의를 마치신 뒤 다시 논의하도록 하시지요.”

이광진 대통령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박차려고 했다.

일본 총리가 엉거주춤 일어나 이광진 대통령을 붙잡았다.

“아닙니다. 넘겨드리겠습니다. 미국과는 저희가 기지 이전을 협의하겠습니다.”

오키나와가 대한민국 영토로 편입되는 순간이었다.

“2000억 달러는 너무 과하다는 게 일본 내각의 판단입니다. 당장 일본에 그만한 여력도 없고···.”

“그럼 돌아가시지요. 여력이 될 때 다시 논의하면 되겠습니다.”

배상금 감액 시도 역시 대차게 까였다.

일본 총리에게 남은 방법은 분할 지급 정도였다.

“당장은 여력이 안 되니 10년에 걸쳐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제 임기가 2년 남았습니다. 아니군요. 어쩌면 1주일 후에 물러날 수도 있겠군요.”

동영상 사건으로 인해 국민투표로 거취가 결정되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었다. 문제의 발단, 박순덕의 배후에 일본이 있음을 절묘하게 꼬집는 언사이기도 했다.

“저는 제 임기 중에 이번 사안이 완벽하게 처리되길 바랍니다.”

“현재 일본의 여건이···.”

“그럼 돌아가셔야겠군요. 여건이 될 때 다시 논의하시는 것으로···.”

1000억 달러는 현찰로, 나머지 1000억 달러는 국채 발행으로 배상금 지급 문제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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