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자 회합에 참석하지 않은 두 초인은 해상자위대와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가 동해에 침몰한 함대와 운명을 같이했다.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동해 한복판에 수장된 상황에서 생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고 봐야 했다.
일본 각성자협회에서 급히 팀을 꾸려 대응에 나섰지만, 지리멸렬의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일곱 명의 초인을 비롯한 고레벨 각성자들 대부분을 한국에 투입한 야마가토산업의 야욕이 뼈아픈 상황이었다.
“현재 일본에 있는 각성자들로는 감당이 안 되는 실정입니다. 육상자위대를 투입해 막아보고 있지만, 불가항력에 가깝습니다. 몬스터들의 진군을 늦추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입니다.”
일본 대사의 하소연에 따르면 일본 열도가 쑥대밭이 될 형국이었다. 추세로 볼 때 열흘이면 변종 몬스터들이 일본 전역을 휩쓸 듯했다.
‘어미 몬스터 한 마리만 보낸 것 아니었나?’
유지훈 또한 의아해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자걸의 자이언트 엿이라고 짐작했다. 물론 거기까지는 맞았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변종 몬스터의 창궐이라는 대목이었다.
‘혹시···?’
과거의 경험에 비춰 유추해 봤다. 무시무시한 결과가 도출됐다.
처음 레벨 1 던전에서 사냥할 때 기억이었다. 당시 그는 변종 몬스터가 된 거대 왕두꺼비와 거대 황소개구리를 상대했었다.
만일 이들이 다른 변종 몬스터의 영향으로 자연적으로 변이된 개체들이었다면? 변종 몬스터가 일반 몬스터를 변이시켜 변종 몬스터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창궐이 설명되는 셈이었다.
‘어미 몬스터 녀석이 일본의 몬스터들을 변이시키고 있는 건가? 이 부분은 이자걸이랑 상의해 봐야겠군.’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일본 대사는 다시금 도게자를 박고 있었다.
“제발 일본을 도와주십시오!”
대통령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일본에는 우리보다 훨씬 가까운 미국이 있잖습니까? 죽고 못 사는 사이 같던데,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그러십니까?”
“미국의 지원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당연히 일본 정부는 미국에 먼저 손을 벌렸다. 변종 몬스터들을 퇴치할 초인과 고레벨 각성자 파견을 요청했다.
미국이 난색을 표했다. 일본으로 각성자를 보내기 힘든 형편이었다. 서부 지역에 출몰하는 비행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레벨은 높지 않은 몬스터들이었지만, 항공기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착륙에 어려움이 있었고, 어렵사리 이륙에 성공했다가도 비행 중에 추락하는 사고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로 인해 미국 항공 당국은 여객기 항공 편수를 대폭 줄였다. 아시아로 향하는 장거리 항공은 사실상 중단 상태였다.
비행 몬스터 퇴치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각성자고 뭐고, 일본으로 지원 인력을 보내기 힘든 실정이었다.
“항공 여건이 되더라도 초인이나 고레벨 각성자들을 파견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랬다가 국가 전략 자산에 손실을 생기기라도 하면···.”
마철진의 해석이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초인이라고 해봤자 레벨 8이었다.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의 변종 몬스터면 레벨 8을 상회할 터였다. 초인이나 레벨 7 각성자가 대거 나선다고 해도,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미국 입장에서 아무리 일본이 중요한 우방이라고 해도 국가 전략 자산의 희생을 감수할 정도는 아닐 터였다.
“미국에선 주일미군의 투입만 승인한 상황입니다. 주일미국의 육군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아 큰 도움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일미군은 주로 해군과 공군에 집중돼 있었다. 육군은 3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총동원해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다.
“주일미군의 공군 병력은 어지간한 국가의 전체 공군에 맞먹는 규모 아닙니까? 걔들 동원하라고 하세요.”
국방부 장관이 다그치는 어조로 말했다.
일본 대사의 안색은 한층 참담해질 뿐이었다.
“안 그래도 전투기를 투입해 미사일을 쏟아붓는 작전을 진행했습니다. 잔챙이들만 처치했을 뿐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근 민가만 초토화됐을 뿐입니다.”
공군도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둘 뿐 별무소용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에 뭘 바라는 겁니까?”
대통령의 질문에 일본 대사 고개를 조아렸다.
“한국에 억류된 일본 각성자들을 석방해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의 초인과 고레벨 각성자들을 파견해주십시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요청이라고 여기십니까? 일본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일련의 행태들을 생각해 보세요.”
“통렬하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요구를 하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공이 완벽하게 한국으로 넘어왔다.
이럴 땐 줄다리기가 좀 더 필요했다. 대통령은 밀고 당기기에 능한 수완가였다.
“당장 여기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사안이라서요.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도 살펴야 하고···.”
“일단 지난번에 대통령께서 요구하신 부분은 전적으로 수용할 방침입니다. 그 외에 요구하실 게 있으면···.”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추가로 요구할 부분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리 국민, 각성자들의 안전부터 검토해봐야겠습니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눈짓했다.
일본 대사를 회의장 밖으로 안내하라는 지시였다.
“지금부터 그 회의를 해야겠군요. 대사는 돌아가 계세요. 회의 결과는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발 일본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일본 대사는 나가면서도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일본 대사가 떠난 뒤 회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지금부터는 전혀 다른 사안을 논의해야겠습니다.”
대통령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깨에도 힘이 빡 들어갔다.
“어떻게 할까요. 보내줄까요. 말까요. 보내주면 뭘 더 요구해서 받아낼까요?”
뻘소리나 주절거릴 작자들은 진작에 회의장에서 내보내진 상태였다.
일본 대사가 들어와 도게자를 박는 순간, 유지훈이 나서서 대가리를 깨버렸다.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공언한 대로 목을 날려버릴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적당한 선에서 양보했다.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들어 매달린 이윤성과 국방부 장관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윤성과 국방부 장관이 사람 여럿의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보내면 안 됩니다. 우리 초인과 각성자들을 위험에 몰아넣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국가 전략 자산은 보호해야 마땅합니다.”
“이번 기회에 쪽발이 놈들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아예 멸망하게 두고 봅시다.”
다들 일본에 맺힌 게 많은 모양이었다.
일본 대사의 지원 요청에 극렬한 반대를 쏟아냈다.
한편으로 인도적인 지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일본에는 한국인 거주민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도 한국의 국민입니다. 그 부분을 배제해선 곤란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괘씸하지만, 일본 국민 중엔 과거사에 대해 미안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인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의 분위기는 가볍고 유쾌했지만, 찬반양론은 팽팽했다.
대통령의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의 분위기를 즐겁게 만든 당사자에게 발언권을 주려고 했다.
“유지훈 초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조용히 계시지만 말고 한 말씀 하시지요.”
“저야 뭐···.”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보내게 되면 그 누군가 중 하나는 당연히 그가 될 텐데.
누가 앞장설지, 또 어떤 명분으로 보내자고 할지···. NSC 위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였다.
“여러분들 말씀이 다 맞는 것 같아서요. 그냥 결정되는 대로 따를 생각입니다. 이번엔 뭘 요구하나 고민은 좀 해봐야 할 것 같고요.”
순간 지원 인력 파견을 주장하던 인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차! 하는 인상이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보내자고 하고 있었으니.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저도 인도적으로 지원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일본에 사는 우리 국민도 제법 있잖아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이윤성이 의견을 제시했다.
NSC 위원 중 직위는 말석에 가까웠지만, 유지훈과 친분 덕분에 실질적인 위상은 누구보다 높은 이윤성이었다.
대체로 조용히 자리를 지켰지만, 모처럼 내놓는 발언엔 적잖은 힘이 실렸다.
“일단 일본 쪽 사정이 급한 듯하니, 우선 대통령님의 기존 요구 사항이 수용되는 조건으로 일본 각성자들을 석방하는 겁니다.”
기존 요구 사항.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 인정과 일제 침략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었다.
“그거 얻어내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더 얻어내야지요. 일본 놈들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립니다.”
국방부 장관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이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 초인 분들과 각성자 분들의 안전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윤성이 유지훈을 비롯한 초인들을 슬쩍 바라본 뒤 말을 이어갔다.
“일본 각성자들이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 각성자들을 험지에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기존 요구 사항이 수용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일본 각성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면···?”
“그땐 엄청난 것들을 요구해야겠지요. 일본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될 테니까요.”
대통령이 흡족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괜찮은 생각이군요.”
나머지도 대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한 성정의 국무총리와 몇몇 인사만 눈살을 찌푸렸다.
“각성자들 보내주면 일본 쪽에서 딴소리하진 않을까요?”
“맞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표정 다른 게 일본 놈들의 전형적인 속성입니다.”
예전 일본의 행태를 떠올리면, 충분히 우려할 만한 대목이었다.
논란의 여지를 잠재운 이는 유지훈이었다.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국장님 의견대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회의가 종료됐다.
결정된 대로 신속하게 절차가 진행됐다.
일본 정부로부터 기존 요구 사항의 수용을 확인받은 뒤 일본 각성자들을 석방했다.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일본의 반응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 각성자들이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정부가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 각성자들을 인질 삼아 일본을 협박했다. 한국 대통령의 요구 사항을 수용한 건 협박으로 인해서였다. 정상적인 외교 절차가 아니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무효다.]
그런데.
일본이 일본 한 뒤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침통한 표정으로 청와대를 찾은 이들이 있었다.
다짜고짜 청와대 정문 앞에서 석고대죄에 들어간 두 사내.
“제발 일본을 용서해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금 고개를 조아린 일본 대사와 다급하게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 외무대신이었다.
***
뒤통수의 혹독한 대가
일본 각성자들을 우선적으로 석방하기로 한 뒤, 이광진 대통령은 유지훈을 따로 불렀다.
“괜찮겠나? 일본 놈들 평소 하던 짓 생각하면, 충분히 뒤집고도 남을 놈들일세.”
“그래 주면 더 고마운 일이에요. 어차피 자기 무덤 파는 결과가 될 테니까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면 돼요.”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라니···. 또 무슨 묘한 계책이라도 있는가?”
“계책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순리를 따르는 거죠. 순리를 저버리는 놈은 그냥 확!”
목을 그어버리는 시늉을 했다.
자신만만한 유지훈을 믿고, 대통령은 지체없이 NSC 회의 결정 사항을 실행에 옮겼다.
일본 총리로부터 기존 요구 사항을 수용한다는 문서를 받았고, 곧바로 일본 각성자들을 석방했다.
원칙대로 하자면, 일본 총리를 만나 직접 서명하는 인준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일본의 사정이 워낙 급한 만큼 인준 절차는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진행하기로 약조를 맺었다.
결과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진 약조였다.
일본 정부는 각성자들이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면을 갈아치웠다. 총리가 직접 보낸 문서를 협박에 의한 것이라며 원천적인 무효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역시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놈들이로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통령은 분개했지만, 유지훈은 유쾌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각성자 주력이 귀환했으니, 변종 몬스터 따위는 쉽게 퇴치할 수 있다는 거로군. 개호로자식들.”
“죄송합니다. 문서까지 주고받은 상황에서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대통령은 분을 가라앉히기 힘든 듯했다.
계획을 내놓은 이윤성은 죄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는 모습이었다.
직접 만나서 조인하는 절차는 미뤄뒀다고 해도, 양국 국가 원수 사이에서 문서가 오간 상황이었다.
심지어 국제적인 화제가 되기까지 했다. 독도 영유권이나 일제 침략기에 대한 보상은 아시아 국가들에 미칠 파장이 작지 않았다.
어지간히 뻔뻔하지 않고서는 안면을 바꾸기 쉽지 않은 상황. 그 어려운 걸 일본이 해냈다.
“국장님은 잘 하신 거예요. 두고 보시면 알 겁니다.”
“유지훈 초인님께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지금의 일본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일본에겐 계획이 있었다. 물론 뻔한 계획이었다. 국제사회의 비난은 감내해야겠지만, 실리는 확실히 챙길 수 있다고 믿은 계획이었다.
한국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억류된 각성자들을 돌려받는 계획. 초인과 정예 각성자들이 돌아오면 변종 몬스터 정도는 문제없이 퇴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다음에 한국의 뒤통수를 갈기겠다는 계략이었다.
누구나 의심할 수 있는 조악한 계략이었다, 한편으로 너무 졸렬해서 설마 하며 고개를 가로저을 계략이기도 했다.
과감하게 사용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쇄도했다. 얼마 전까지 한일 대립에서 일본을 지지하던 우방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기꺼이 감수할 각오였다. 비난은 순간이어도 실리는 영원하니까.
계획이 잘못됐다고 깨달은 건 신나게 처맞은 다음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초인이랑 고레벨 각성자들이 50명 넘게 투입됐는데 몬스터 한 마리도 처치하지 못한 거야!”
한국에서 돌아온 초인과 각성자들은 숨돌릴 틈도 없이 변종 몬스터 퇴치 작전에 투입됐다.
귀국 인원 전원에 잔류 각성자들까지 합류했다. 200명 규모의 퇴치단이 결성됐다. 초인 하나에 레벨 7 서른둘, 레벨 6 스물여섯 등 고레벨 각성자들이 총동원된 대규모 작전이었다.
사실상 일본이 보유한 각성자 전력 전체라 할 수 있었다.
결과는 전멸이었다. 무리를 이끄는 보스 몬스터 쪽으로는 가보지도 못했다. 주위 떨거지들에게 몰살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