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50)

“쪽발이 놈들이 또 뭔가 저지른 모양이네요. 가봐야겠습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자걸이 환하게 웃었다.

이면에 자이언트 엿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진 웃음이었다.

***

역전의 명수 (1)

해상자위대 제1호위대군과 제2호위대군이 동해 한복판에서 모조리 수장당한 상황. 일본은 발악에 나섰다.

모든 책임을 한국에 돌리는 적반하장의 발악이었다.

[한국은 변종 몬스터 퇴치 협력을 위해 외교관 자격으로 입국한 일본의 각성자들을 해치고 억류했다. 양국 각성자들의 우호 증진을 위해 힘쓴 일본의 선의를 저버린 비인도적인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일본 각성자들이 한국에 입국해 저지른 행태는 쏙 빼놓고, 한국이 각성자들을 제압하고 억류한 행위만 물고 늘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 각성자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평화적으로 나선 민간 선박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침몰시켰다. 이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넘어 몰상식한 짐승의 만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해로 출격한 해상자위대 2개 호위대군을 민간 선박이라 주장하며 한국 해군에 의해 침몰했다고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 사회에 간곡히 호소한다. 한국의 만행을 응징하고 일본이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 UN 차원에서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해 주길 촉구한다.]

철저하게 사실관계를 왜곡한 주장이었다.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한국에 대한 응징에 돌입할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적반하장의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지만, 국제 사회는 반응했다.

동북아시아의 묘한 정세 때문이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세계 3강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판세를 교묘하게 활용한 일본의 교활한 외교력이 통한 결과였다.

미국이 앞장서서 서방 세계를 이끌며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동북아시아 외교의 중심으로 한국이 아닌 일본을 선택했다.

반면 중국은 한발 물러섰다. 도움을 얻고 싶으면 뭔가 내놓으라며 한국을 압박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러시아는 러중 갈등 국면에서 미국의 지원을 요구하는 행태를 보였다. 미국이 러시아의 편을 들어주면, 일본의 요청에 응답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어쨌거나 국제 사회의 움직임은 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실정이었다. 이광진 대통령의 외교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형편이었다.

대통령직 유지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무거운 숙제가 던져진 상황이기도 했다.

“아니. 저 인간들은 왜 또 여기 나타난 겁니까? 그때 다 쫓겨난 거 아니었습니까?”

NSC 회의장에 도착한 유지훈은 눈살부터 찌푸렸다.

앞선 회의 때 대통령으로부터 퇴출을 지시받았던 인사들이 고스란히 돌아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윤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들 외교 전문가들이잖습니까. 지금은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 저분들을 배제하기 힘든 형편입니다.”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쫓겨났던 이들 모두 외교와 관련해 한 축씩 담당하는 인사들이었다.

대통령으로부터 참석하라는 말을 듣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NSC에 참석했다. 국무총리든 누군가의 요청을 받은 모양이었다.

회의 시작 후 이들은 대통령을 향해 날부터 세웠다.

“이게 다 대통령님께서 중국에 치우치는 외교 정책을 고수한 탓 아니겠습니까?”

“외교부 장관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우방은 미국인데, 친중에 쏠리다 보니 미국의 반감을 산 결과입니다.”

“미국 또한 이번 사안이 일본 책임임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건 외교 정책의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현란한 유체이탈 화법 신공이 펼쳐졌다.

외교 정책의 근본적인 철학이 대통령에게서 나왔다고는 해도, 실무는 각 부처 장관들이 진행했다.

책임의 소재가 자신들에게 있음에도 남의 일인 양 대통령 탓으로만 몰아붙이고 있었다.

대통령은 말없이 눈살만 찌푸렸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남북 관계의 진전을 위해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본 건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 거리를 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문제는 중국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었다.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지 않았다. 갈등을 유지하며 실리를 취하고자 했다. 한반도의 갈등을 이용해 동북아시아의 중미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외교 정책을 세운 것이었다.

한국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지만, 이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북한에 개입해 남북 갈등 고착화에 힘을 쏟기까지 했다.

이광진 대통령도 어느 정도 알긴 했지만, 남북 화해를 무엇보다 중시했기에 중국의 줄다리기 농간에 끌려다니는 모양새를 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극한적인 갈등 양상에서 결정적인 실착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되고 있었다.

“지금 누구 탓으로 몰고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보다 못한 국무총리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따지고 보면 두 분 장관님과 원장님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대목 아닙니까? 남 탓만 할 게 아니라 외교 전문가로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내도록 해주세요. 그러라고 여기 참석하신 겁니다.”

어쨌거나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유지훈 또한 대통령의 친중 편향 외교는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굳이 대통령을 두둔하진 않았다.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먼저 도발하지 않으면 굳이 응징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근거한 자세이기도 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당들이 대통령을 공박하고 있긴 했지만, 유지훈은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물론 건드리면 백배 천배 돌려줄 채비는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대통령의 맥없는 질문에 국가안보실장이 대답에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외교부 장관이 대답할 문제였지만, 외교부 장관은 호시탐탐 대통령을 다그칠 기회만 노리는 상태였다.

“UN 사무총장의 발표이긴 하지만, 사실상 미국의 의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안 그러면 UN 안보리 차원에서 제재에 들어가겠다고···.”

“일본의 요구는 뭡니까?”

“앞선 요구에 이번 민간 선박 침몰에 대한 보상을 추가했습니다.”

“뻔뻔한 놈들···. 해상자위대를 민간 선박으로 둔갑시키다니···.”

일본의 독도 영유권 인정에 일제 침략기 사과 언급 중단 그리고 내한한 일본 각성자들에 대한 피해 보상에 민간 선박으로 둔갑한 해상자위대 침몰 피해 보상까지가 일본의 요구였다.

피해 보상액은 최소 5조 원에서 최대 10조 원에 달했다.

“이번엔 수용하십시오. 저희와 지일파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보상 규모는 최소화할 수 있도록 협상해 보겠습니다.”

“정심회 소속 의원들이 이미 물밑에서 논의를 진행 중입니다. 대통령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공식적인 협상으로 들어가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퇴출파들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통령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이면 찾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대통령의 시선도 그 인물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유지훈이었다.

“유지훈 초인께서 지난번에 애 많이 써주셨습니다. 이번에도 혹시 뭔가 좋은 대응책은 없습니까?”

퇴출파들이 기다렸다는 듯 들고 일어났다.

“따지고 보면 유지훈 초인이 일을 망친 것입니다.”

“좋게 타협해서 해결했으면 우방들의 외면과 국제 사회의 비난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지훈 초인의 자격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무리하게 힘만 앞세운 결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됐습니다.”

유지훈을 제대로 도발하고 있었다.

도발에는 응징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준비는 확실히 돼 있었다.

“당연히 좋은 대응책이 있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말씀해보세요.”

반색하는 대통령과 달리, 퇴출파는 힐난하고 나섰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겁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유지훈 초인은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것입니다.”

“제발 대통령님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하십시오.”

유지훈은 말없이 퇴출파를 노려봤다.

눈빛만으로 숨통을 끊어놓을 듯 무시무시한 시선이었다.

시선을 받은 이들이 움찔해 고개를 조아렸다.

“말씀드리기에 앞서 조건부터 언급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조건부터 꺼내놓고 보는 유지훈이었다.

다만 이번엔 조건이 평소보다 과격했다.

“대한민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죽일 수 있는 권한, 이번에는 좀 더 폭넓게 적용했으면 합니다.”

“그 말씀은···?”

“명시적인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제 자의적인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대통령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 정도야 유지훈 초인의 권한 아니겠습니까. 자의적인 판단이라 해도 대한민국을 위한 결정일 것이라 믿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유지훈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몇 안 되는 주소록 인물 중 하나를 찾아 송신 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오. 유지훈 씨. 급한 일 있다고 가시더니 어쩐 일입니까?]

“혹시 선물 준비하신 거 없습니까?”

[하하하. 안 그래도 준비해놓고 연락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썩 괜찮은 놈으로 준비돼 있습니다.]

“언제쯤 확인 가능합니까?”

[글쎄요. 그 부분은 저도 확실히 말씀드리기가···. 금방 소식이 갈 것 같긴 합니다.]

“이번 선물이 자이언트 엿입니까?”

[하하하. 더 먹이려고 해도 먹일 엿이 없을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대통령을 바라봤다.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책을··· 찾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명쾌한 해결책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인지···?”

“잠시 기다려보시지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유지훈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념에 빠진 모습을 보여줬다.

누구도 보채는 사람은 없었다. 말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다들 눈치만 살피는 가운데 조금씩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원지는 퇴출파들이었다.

그때 회의 장소로 뛰어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 직원이었다. 비서실장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비서실장에 고개를 갸웃하며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님. 일본 대사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코웃음과 함께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돌려보내라고 하세요. 지금 일본 대사 만날 상황 아닌 거 비서실에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몹시 급한 용무인 모양인데요···.”

“지금 일본 대사 만날 급한 용무 같은 거 없습니다. 만날 생각 없으니 돌아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전하세요.”

그때 유지훈이 눈을 번쩍 떴다.

“아닙니다. 대통령님. 불러들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지훈 초인께서 일본 대사한테 볼일이라도···?”

유지훈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득의양양한 미소였다.

대통령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비서실 직원에게 손짓했다. 일본 대사를 데리고 오라는 지시였다.

이윽고 일본 대사가 회의 장소로 들어왔다.

“여기 대한민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진행되는 장소입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용건만 말하고 가세요.”

대통령의 싸늘한 언사에 일본 대사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안절부절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대사 때문에 회의 중단된 거 안 보이십니까? 여기 대사 면상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없습니다. 할 말 없으면 나가보세요.”

다시금 차갑게 쏘아붙이자 일본 대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주저하는 시선으로 NSC 참석자들을 둘러보더니 대통령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통령님! 부디 저희 일본을 도와주십시오!”

“응?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이 대통령을 향해 일본 대사는 납작 엎드리더니 급기야 도게자를 박기까지 했다.

“대통령님께서 요구하시는 건 뭐든 수용하겠습니다. 제발 일본 국민들을 살려주십시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영문인지. 대통령은 눈을 껌뻑였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NSC 참석자들 모두 어안이 벙벙해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시선이 집중된 방향은 역시 유지훈이었다.

“그럼 요구 사항을 실천에 옮겨도 되겠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던 유지훈이 입꼬리를 귀밑까지 말아 올린 채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

역전의 명수 (2)

난데없이 찾아와 NSC 회의 현장에서 도게자를 박은 일본 대사. 살려달라고 애걸하기까지 했다.

유지훈은 대략의 상황을 짐작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일어나세요.”

대통령이 당황해 일본 대사를 일으켜 세웠다.

살려줄 때 살려주더라도 영문은 알아야 했다.

국제 사회를 선동해 한국을 궁지에 몰아넣던 일본의 태도가 별안간 180도 바뀐 이유가 사무치게 궁금했다.

일본 대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사연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일본에 변종 몬스터가 창궐했습니다.”

“한국에 이어 일본에도···?”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변종 몬스터는 야마가토산업과 신화그룹, 한일 악덕 기업의 합작으로 탄생한 존재들이었다. 야마가토산업이 계략을 꾸며 한국에 풀어놓았다. 각성자 회합까지 연계된 음모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NSC 참석자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변종 몬스터라니. 그것도 창궐까지···.

“원인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흘 전 시마네현에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조금 전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나가노현까지 휩쓸었습니다. 사이타마현과 도쿄도가 머지않았다고 합니다.”

일본 각성자의 주력 대부분이 한국에 와있는 상태였다. 특히 초인 전원이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에 입국한 다섯 중 둘은 죽고 둘은 행방불명(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죽었고). 나머지 하나는 구금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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