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50)

“이제 저쪽에 남은 카드가 몇 장 없을 건데요. 뭘 꺼낼지 예상되네요.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

백척간두

야마구치 히토시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야마구치 가주로부터 직무 정지 통보를 받은 상황이었다.

한일 각성자 회합은 사실상 중단됐다. 예정됐던 행사 몇 가지가 남아있었지만, 요식 행위 정도로만 진행하기로 했다.

외무 회담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는 이유였다.

안건이 범상치 않은 외무 회담이었다.

한국 대통령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꺼내 놓았고, 일제 침략기 사죄와 보상까지 다시 화두에 올려놓았다.

이광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이번 기회에 두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겠다고 공언한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서 희생된 초인들과 각성자들의 보상 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제시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희생된 초인만 둘이었다. 초인 등극을 눈앞에 둔 신예도 목숨을 잃었다. 입국은 확인됐지만, 생사 불명인 초인이 둘 더 있었다.

초인은 국가 전략 자산이었다.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었다. 다섯이면 보상금이 수조 원에 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벨 6 이상 각성자들도 칠십 명 가까이 죽었다. 이들에 대한 보상금 역시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한일 양국 기세의 충돌이었다.

독도 영유권 인정과 일제 침략기에 대한 사죄와 보상에 맞선 외지에서 희생당한 국가 전략 자산에 대한 보상.

명분의 무게추는 한국 쪽으로 쏠렸지만, 실리의 무게추는 오히려 일본 쪽으로 기우는 양상이었다.

“나더러 외교관들 뒤치다꺼리만 하라는 건가···.”

각성자 내한단장 직무가 정지당한 야마구치 히토시에게 주어진 임무는 외무 회담에 참석하는 외교관들의 경호단장 역할이었다.

야마가토산업 각성자 그룹의 총괄인 야마구치 히토시는 내각의 어지간한 장관보다 윗급의 권력자였다.

외무 회담의 책임자인 외무대신과 동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경호단장 역할이나 수행하라니···.

“수치스럽게 연명하느니 명예롭게 죽겠다.”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명예롭게 죽는 방법은 이미 머릿속에 뚜렷이 그려져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시의 주저도 없이 발신 버튼을 눌렀다.

“작전을 진행하겠다.”

[알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지시하신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

***

서울 외곽의 허름한 모텔.

투숙하고 있던 사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장한 분위기의 세 사내를 비롯해 스물 남짓이었다.

모텔 전체를 빌린 상태였기에 투숙객은 이들이 전부였다. 세 사내에 비하면 나머지의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무거운 짐을 덜기라도 하는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바로 이동하면 되는 것 아닌가?”

비장한 분위기의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물었다. 왼쪽 뺨에 길게 난 칼자국이 도드라진 사내였다.

“단장님께서 직접 이쪽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히토시 상이 직접 이쪽으로 온다고?”

사내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예정에 없던 사안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셋이 각각 지정된 장소로 이동해 임무를 마치게 돼 있었다.

“히토시 상은 우리와 거리를 두겠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와 함께 있는 모습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곤란할 텐데···.”

“어떤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장님 상황이 썩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었습니다.”

“상황이 썩 좋지 못하다···.”

사내가 미간을 좁혔다.

비장한 분위기의 세 사내는 인위적으로 특성을 부여받고 한국으로 온 저레벨 각성자들이었다.

뉴클리어 밤. 핵폭탄을 특성으로 탑재한 채 자살 테러에 뛰어드는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특명 가미카제 특공대였다.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 임무였다.

세 명의 특공대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자폭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임무 장소는 금강길드와 태광길드 그리고 국가안전본부였다.

반경 10km를 초토화하는 뉴클리어 밤으로 한국 각성자의 중심지를 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혼란을 빚어진 틈을 타 일본의 각성자들까지 투입돼 한국의 각성자들을 학살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 각성자 생태계 압살 작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동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설마···?”

사내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무시무시한 생각이었다.

“마나의 전이?”

레벨 7의 각성자인 야마구치 히토시가 자신의 마나를 자살 특공대 대원들에게 쏟아붓는다면?

자폭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질 터였다.

야마구치 히토시의 마나가 더해진 세 명의 가미카제가 동시에 자폭하면···?

“히토시 상이 서울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려는 건가?”

때마침 야마구치 히토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명의 자살 특공대보다 더욱 비장한 표정이었다.

“계획은 변경됐다.”

“어떻게···?”

“그대들의 임무에 나도 동참한다. 아니. 내가 주도한다.”

사내의 예상대로였다.

마나의 전이를 통한 자폭 규모의 확대였다.

야마구치 히토시가 결심한 명예로운 죽음의 실체이기도 했다.

“그, 그럼 이 일대 반경 50km는 폐허가 될 수도···.”

자살 특공대를 감시하던 인력들이 기함했다.

그들 또한 죽음을 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까지 자살 특공대 임무에 동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임무는 10분 후에 시작한다. 그때까지 너희들은 최대한 멀리 이동해라. 생사는 전적으로 너희들에게 달렸다.”

“네? 네!”

감시 인력들이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도 다 챙기지 못한 채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기 바빴다.

하지만 차를 출발시키지 못했다. 중형 SUV 한 대가 나타나 주차장 입구를 가로막은 탓이었다.

이어 승합차 두 대가 따라와 SUV 옆으로 정차했다.

“어디들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SUV에서 내린 사내가 삐딱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젊은 미녀와 중년 미남자가 사내 옆에 와서 섰다.

물론 사내는 유지훈이었다. 강은영과 화무결이 그와 동행했다.

“당신은···?”

자살 특공대 셋이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마구치 히토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아는 자들인가?”

물론 그는 유지훈을 알았다. 옆의 미녀와 중년 사내 또한 면식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나타난 것도 놀라웠지만, 자살 특공대원들이 이들을 알아본 것은 한층 당혹스러웠다.

“얼마 전에 저희를 찾아와 백화점 상품권을 준 분입니다. 정심회에서 보냈다며···.”

“그놈의 백화점 상품권!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냐!”

야마구치 히토시가 분노를 쏟아냈다.

유지훈에게 놀아났다는 기분 때문에 치솟는 노기를 다스릴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특공대원들을 잡아끌어 곁에 바짝 붙어 있게 했다.

“네놈이 우리를 놀림감으로 만들었구나.”

“아니. 멀리 와서 수고하길래 성의를 표시한 건데? 다들 시내 한복판 좋은 호텔에 묵는데, 이 사람들만 허름한 데서 고생하고 있잖아.”

“흥! 네놈이 뭘 알아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어차피 잠시 후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야마구치 히토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 물기가 맺혀 있기까지 했다. 비장하게 삶을 마치려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네놈이 내 일을 모두 망쳤다. 그래도 이렇게 기어들어 왔구나. 내 눈앞에서 네놈이 갈가리 찢어져 죽는 걸 볼 수 있게 돼 기쁘다.”

“뭐라는 거야?”

“하하하. 어리석은 놈. 기왕 죽을 거 어떻게 죽을지 알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야마구치 히토시가 자살 특공대원들에게 눈짓했다.

네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마나를 전이시키기 위한 자세였다.

“이제 곧 서울은 불바다가 돼 사라진다. 네놈은 지금 발화점이 되는 곳에 서 있는 것이다.”

“뭐야? 자살 테러라도 하려는 거야? 설마 너희들 가미카제 특공대라도 되는 거야?”

유지훈이 짐짓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반면 옆에 있는 강은영과 화무결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야마구치 히토시의 비소가 짙어졌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아는군. 그걸 아는 놈이 여기까지 오다니. 네놈도 어지간히 멍청한 놈이구나.”

“해봐. 좋은 구경 하겠네.”

유지훈이 가소롭다는 듯 손을 까닥였다.

야마구치 히토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아는가. 조국을 위해 이 몸뚱이 따위 기꺼이 바칠 수 있다.”

야마구치 히토시가 마나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맞잡은 손을 통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하라!”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없었다.

고통스러운 신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으으···. 이게 왜 이러지?”

“끄윽···. 특성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끄아악.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셋 모두 특성 뉴클리어 밤을 발동시키지 못했다. 체내로 침투해 들어오는 야마구치 히토시의 마나에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놀고들 있네.”

유지훈이 다가가 야마구치 히토시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야마구치 히토시는 특공대원들에게 마나를 쏟아낼 뿐이었다. 부질없는 헛짓인 줄도 모르는 채.

그러는 동안 유지훈의 소멸기는 완벽하게 작렬했다.

“알아서 자살 테러 계획을 털어놓아 주다니 고맙네. 정직한 점은 마음에 들어. 그래도 깜빵은 가야지.”

강은영과 화무결이 나서 나머지 인원들을 제압했다.

이윤성이 이끌고 온 SSG 요원들이 체포 절차를 마무리했다.

“나를 이렇게 체포할 수 없다! 나는 외교관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자살 테러하는 외교관이 어디 있냐?”

기어코 매를 버는 야마구치 히토시의 정수리를 시원하게 갈겨줬다.

정신을 잃은 야마구치 히토시가 SSG 요원들에 의해 승합차에 내던져졌다. 반항하던 나머지 인원들도 강은영과 화무결에게 신나게 쥐어 터진 뒤 반병신의 몰골로 승합차에 내팽개쳐졌다.

“이걸로 가미카제 특공대 작전도 분쇄 완료로군요. 대한민국이 유지훈 초인께 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이윤성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유지훈은 털털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미카제인지 뭔지는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어요. 자백받으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거고요. 녹음은 확실히 하셨죠?”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게 했습니다.”

“그럼 관련자들까지 싹 색출해다가 가둬버리시죠.”

“관련자들이라 하시면···?”

“그냥 이번에 들어온 놈들 다 엮어버리세요. 따지고 보면 다 한패잖아요. 일단 다 감방에 쳐놓고 쪽발이들 어떻게 나오나 보자고요.”

***

주한 일본 대사를 통해 일본 정부에 보고가 들어갔다.

동시에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중심부에서 외교관 자격을 요구하고 들어온 각성자들이 자살 테러를 기도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을 성토하는 성명이었다.

일본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야마가토산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마구치 가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총리 와타나베 츠요시의 질타에 야마가토산업의 두 수장 중 하나인 야마구치 신타로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한국 놈들의 음모입니다. 야비한 계략으로 본국의 각성자들을 해친 뒤 뒤집어씌우려는 겁니다.”

“자백한 녹음까지 공개되지 않았습니까?”

“조작입니다. 그깟 녹음 조작 당장에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총리께 투항했다는 녹음 파일이라도 만들어 볼까요?”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와타나베 츠요시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온 탓이었다.

“그래서 가주께서는 어찌하실 참입니까?”

야마가토산업에게 맡기는 방법 외엔 달리 수단이 없었다. 어쨌거나 야마가토산업은 일본 최대 권력 집단이었으니.

“그깟 한국 놈들 힘으로 짓눌러야지요. 준비했던 모든 것을 꺼내 놓을 때입니다.”

그날 밤 대규모 함대가 요코스카와 사세보 해군기지를 출항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제1호위대군과 제2호위대군이 동시에 한국을 향해 출격한 것이었다. 당초 계획보다 규모를 대폭 키운 출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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