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거대한 크기의 번개가 유지훈을 집어삼킬 듯 덮쳤다.
빠지직. 전신을 태워버릴 기세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잠시 유지훈의 전신을 휘감은 채 머물던 번개가 고스란히 다케미야 신지에게 돌아갔다.
반사기의 발동이었다.
“으헉! 이게 뭐야!”
되돌아간 썬더볼트는 다케미야 신지 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각성자들에게까지 휘몰아쳤다.
빠지지직!
다케미야 신지가 허둥지둥 크기를 줄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반사기를 거친 특성은 그의 능력을 벗어나 있었다.
주위 각성자들은 고스란히 썬더볼트에 희생됐고, 다케미야 신지 또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물론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다시금 밀려든 심검의 위세가 모든 걸 휩쓸어버렸다.
다케미야 신지의 육신 역시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둘로 나뉜 일본 서열 4위 초인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끝. 무결이 너는?”
화무결은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권장지각을 쏟아내고 있었다.
화무결이 휘젓고 다니는 곳에 일본 서열 7위의 초인은 없었다.
나쓰메 유이치는 멀리 떨어진 곳에 안면이 완전히 뭉개진 채로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유지훈이 심검을 일으켜 몸을 날리던 순간, 화무결은 장력을 뿜어내 나쓰메 유이치를 안면을 공격했다.
상상도 못 했던 어마어마한 장력 공격에 나쓰메 유이치는 특성을 발동할 생각도 못 한 채 죽음을 맞았다.
화무결은 나머지 각성자들 마저 해치우려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원 없이 무공을 사용하는 재미를 만끽하려고 적당히 힘 조절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우두머리는 내가 먼저 처치했네. 시합은 내가 이긴 걸세.”
“우두머리만 해치우면 이기는 것으로 했던가···.”
어쨌거나 남은 건 무라카미 소토와 떨거지 청년들 그리고 식사를 중단한 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세 마리 변종 몬스터였다.
“다 먹은 모양이네. 그럼 이제 죽어야지.”
변종 몬스터들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팔을 잃은 무라카미 소토와 떨거지들은 당장 손 쓰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
초인 둘이 단칼에, 또 한 주먹에 죽어 쓰러지는 참혹한 광경에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완전히 얼어붙어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도망칠 가능성이 있는 변종 몬스터부터 처치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번에도 시합이다. 두 마리 해치우는 쪽이 이기는 거야.”
“반칙일세. 자네한테는 검이 있지 않은가.”
맞다. 반칙이었다.
마음먹은 모든 대상을 베어버릴 수 있는 검이니. 같은 목표를 대상으로 한 시합에선 무조건 유지훈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세 마리 변종 몬스터는 한 군데 몰려 있기까지 했다.
쐐액!
한 차례 검의 몰아침으로.
싸악! 싸악! 싸악!
세 마리 모두 베어버렸다.
쾅! 쾅!
뒤늦게 쇄도한 화무결의 권격이 거대 하이에나의 머리와 거대 악어거북의 등짝을 박살 냈지만, 이미 숨을 거둔 다음이었다.
유지훈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제 남은 건 무라카미 소토와 떨거지 청년 각성자들이었다.
“나 그 검 좀 빌려줘요.”
잊고 있었다.
영훈길드엔 이기어검(以氣馭劍)의 여전사가 있었다.
“아! 은영도 한 건 해야지.”
유지훈이 두둥실 허공에 심검을 띄웠다.
강은영이 한껏 집중한 시선을 보냈다. 검을 조종했다.
쐐액!
청년단 무리로 파고든 심검이 하나하나 도륙했다.
“야. 거기 팔 한 짝 없는 놈은 살려놔. 물어볼 거 있어.”
“나한테 전수한 옥녀권도 써보는 게 어떻겠나?”
유지훈의 당부와 화무결의 제안이 이어지자, 강은영은 심검을 유지훈에게 돌려줬다.
“아. 어르신한테 옥녀권도 보여드려야겠구나.”
강은영이 청년단 무리로 파고들었다.
이미 심검이 휩쓸고 간 자리였다. 대부분 죽고 서넛만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팔다리 하나씩은 날아간 채로.
특성 아이언 피스트를 발동했다. 강철로 변한 주먹으로 옥녀권을 구사했다. 우아한 고전 무용을 연상케 하는 주먹질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청년 각성자들이 머리가 으깨져 죽었다.
이제 남은 건 일본 각성자계의 신성 무라카미 소토 하나였다.
“나, 나는 외교관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역시 외교관 자격부터 찾았다.
외교관 자격을 전가의 보도로 여기는 건 이번에 내한한 일본 각성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듯했다.
물론 어림없는 착각이었다.
“넌 어차피 몬스터한테 죽은 거야. 몬스터 앞에서 외교관 자격이 무슨 소용이냐?”
유지훈이 화무결에게 손짓했다.
“분근착골 좀 준비해줘. 얘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바로 쓸 수 있게.”
“준비할 것도 없네. 그냥 손만 갖다 대면 되네.”
고문을 앞두고 일단 신사적으로 물었다.
“나머지 한 마리 몬스터는 어디 있냐?”
“모른다!”
고분고분 불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화무결이 그윽한 손길을 건넸다.
“끄아악! 모른다. 정말 모른다!”
“몰라도 알게 하는 게 분근착골이야.”
“끄으으악! 단장, 단장이 안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계속 반말이네. 새파랗게 어린놈이.”
“끄어억! 죄송해요. 저는 정말 몰라요. 단장만 알아요.”
고분고분해졌지만, 대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무결이 분근착골의 강도를 높이자, 무라카미 소토는 기억을 쥐어짜 있는 사실, 없는 사실 싹 털어놓았다.
문제는 극심한 고통 탓에 심장이 멎어버린 점이었다.
“끄응. 또 숨을 안 쉬는군. 여기 놈들은 왜 이리 약해 빠졌는가.”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워서 그래.”
무라카미 소토는 방한단 내에서 제법 위상이 높은 인물이었다. 쓸 만한 정보를 쏠쏠하게 털어놓고 갔다.
이제 돌아가서 나머지 문제들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
일본 각성자 방한단의 단장 야마구치 히토시는 경악했다.
유지훈과 영훈길드가 너무도 멀쩡하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무라카미 소토와 청년단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 초인 둘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경악한 이유는 유지훈의 침중한 설명이었다.
“저희와 함께하신 일본의 각성자 분들은 몬스터들에게 희생되셨습니다. 장엄한 희생에 감사드리며 고개 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다, 당신들은 어떻게 멀쩡하게···?”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저희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변종 몬스터 세 마리를 처치한 건 모두 그분들의 공입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변종 몬스터는 처치 대상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살려서 한국 땅을 활개 치고 다니게 할 복안이었는데.
치밀하게 계획한 처치 대상인 귀환자와 길드 구성원만 살아 돌아왔다. 변종 몬스터의 먹이가 됐어야 마땅한 놈들인데.
계획대로라면 초인 둘과 무라카미 소토가 협력해 놈들을 제압했어야 했다. 변종 몬스터들에게 던져준 뒤 돌아오는 수순이었다.
원래 무라카미 소토와 청년단만 투입하려 했지만, 귀환자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두 명의 초인이 가세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신중하게 진행됐기에 실패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영훈길드 구성원 중 살아서 도망치는 자만 없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정반대 상황이 펼쳐지다니···.
‘설마···.’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리 입국한 야마구치 구니오와 두 명의 초인. 연락이 끊긴 이들 또한 귀환자의 손에 당한 건 아닐까?
초인 요다 히로키와 눈이 마주쳤다.
요다 히로키는 방한단에 유일하게 남은 초인이었다. 일본 초인 서열 2위의 거인으로 방한단의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였다.
같은 의심을 하는 듯했다. 초인들의 죽음 이면에 귀환자가 있다는.
순간 야마구치 히토시는 가슴이 덜컥했다.
요다 히로키는 불같은 성정의 소유자였다. 분노하면 물불 안 가리고 행동에 옮기는 다혈질이었다.
역시나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네놈 짓이구나!”
요다 히로키가 유지훈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
야마구치 히토시가 말리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어느 틈에 요다 히로키는 유지훈에게 바짝 다가가 목을 움켜쥐려 하고 있었다. 움켜쥐고 특성 기뢰를 일으키면 즉사에 이를 터였다.
그때 경악의 결정타를 날릴 일이 벌어졌다.
홀연하게 나타난 중년 사내가 요다 히로키의 앞을 막아서더니 가슴에 대고 가볍게 손을 뻗었다.
슬쩍 밀치는 동작이었지만, 요다 히로키는 끈 떨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가 멀찍이 처박혀 나뒹굴었다.
중년 사내, 화무결은 유령 같은 동작으로 쫓아가 요다 히로키의 신체 몇 군데를 가격했다.
요다 히로키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일본 서열 2위이자 세계 랭킹 8위의 초인이 대수롭지 않은 손짓 몇 번에 제압당한 것이었다.
“아무리 가슴이 아파서 이성을 잃어도 그렇지. 현장을 함께하고 돌아와 애도하는 이를 암습해서야 쓰겠는가.”
화무결이 요다 히로키를 들쳐 맸다.
혈도를 꼼꼼하게 제압했기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유지훈이 다가가 살펴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군요. 당분간 거동이 힘드실 듯합니다. 저희가 병원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말이 병원으로 모시는 거지, 사실상 억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야마구치 히토시는 자신이 요다 히로키를 데려가겠다고 요구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따르지 않았다.
힘에서 완전히 밀리는 상황이었다. 일단 물러난 뒤 다음 수단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본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경고 한 마디만 남긴 채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야마구치 히토시가 떠난 뒤 유지훈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어린놈 정보가 제법 유용했네. 다혈질이라 도발하면 바로 넘어올 거라더니. 딱히 도발도 안 했는데, 제풀에 흥분해서 달려드는군.”
“그게 다 분근착골의 효과일세. 저쪽에선 체면 차리느라 못 썼는데, 여기 오니 마음껏 써도 되고 좋군.”
“힘 조절은 좀 해. 쓸 때마다 한 놈씩 죽어 나가잖아.”
다급히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윤성이었다.
“역시 무사하셨군요.”
“묻는 모양새를 보니까 누군가한테 무슨 이야기라도 들었나 보네요? 혹시 이자걸 대표 만나셨어요?”
“하하하. 바로 아시는군요.”
“마침 잘 오셨어요. 수습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유지훈이 저간의 사정을 들려줬다.
작전에 동행한 무라카미 소토와 청년단, 거기에 난데없이 개입한 두 초인 일행의 몰살과 도발한 요다 히로키의 억류까지.
이윤성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대통령님께서 수습하고 계십니다.”
“대통령님께서요?”
“이미 애도 성명 발표하셨고, 지금 일본 총리와 통화 중이십니다. 통념의 뜻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것 역시 이자걸 대표 작품입니까?”
유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윤성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유지훈 씨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이자걸 대표도 만만치 않은 분이더군요.”
“비교할 사람이랑 비교하세요. 그 인간은 소시오패스라고요.”
‘그쪽도 못지않은 소시오패스’라는 말이 턱밑까지 솟아올랐지만, 이윤성은 애써 눌러 참았다.
“이제 어쩌실 참입니까?”
“저쪽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전에 이것부터···.”
유지훈이 뭔가를 슬쩍 이윤성에 던졌다.
망가진 전자기기였다. 무라카미 소토에게서 빼앗은 뒤 밟아서 박살 내버린 리모컨이었다.
“살릴 수 있나 좀 알아봐 주세요. 변종 몬스터에 이식된 센서랑 연결된 장치라는데요.”
“산산 조각났군요. 어쩌다가···.”
“못 살리면 저쪽 단장한테 아쉬운 소리 해야 해요. 그래도 안 되면 고문이라도···.”
“살려낼 수 있을 겁니다. 무조건 살려내겠습니다.”
유지훈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