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한국의 귀환자가 주인으로 있다는 길드인가? 한심하군. 고작 이런 자들이 한국을 대표한다는 말인가?”
약관을 막 넘은 청년에 불과했지만, 무라카미 소토는 오만했다. 떠받들어지기만 한 탓도 있지만, 실력도 뒷받침되는 오만이었다.
유지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첫 번째 선수라 대단한 놈을 보낼 줄 알았는데, 꼬맹이가 왔네? 일본 초인들은 벌써 뒷방 늙은이라도 된 거냐?”
도발을 도발로 돌려줬다.
무라카미 소토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이내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가소롭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뭐해? 대표자들끼리 인사라도 나눠야지.”
유지훈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무라카미 소토는 코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나서는 이는 따로 있었다.
“보스는 하찮은 한국의 길드 마스터 따위와 손을 잡지 않는다. 굳이 잡고 싶다면 내 손 정도는 허용하겠다.”
2m도 넘을 법한 키에 체중이 150kg은 됨직한 육중한 체구의 청년이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년의 용모였다.
꼴같잖은 행태에 한 대 쥐어박을까 싶었지만, 불현듯 뇌리를 스친 재미있는 생각에 유지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2인자쯤 되나 보지?”
“그렇다. 청년단의 1조장 하시모토 마쓰요다.”
“그래. 너라도 와라. 악수나 하자.”
하시모토 마쓰요가 성큼성큼 다가와 덥석 손을 잡았다.
씩 웃더니 손아귀에 힘을 쏟아부었다. 악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양상이었다. 유지훈의 손을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유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당혹스러운 눈빛이었다. 애써 고통을 참는 표정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속으론 웃었다. 신나게.
소멸기를 작렬시켜달라고 몸부림치는 커다란 놈의 미련한 모습.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손에서 적당히 힘도 빼줬다.
으스러지는 느낌은 언짢았지만, 어차피 재생 능력으로 멀쩡해질 터였다. 소멸기를 완성할 시간 동안 손을 놓지 않는 게 중요했다.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하시모토 마쓰요가 손을 놓았다.
“이런! 악력이 약하시군. 진작 말을 했으면 놔줬을 텐데···.”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조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유지훈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털어댔다.
“그놈. 밥 먹고 아귀힘만 길렀나···. 아이 손 아파라.”
각성을 완전히 소멸시켰지만, 미안할 필요는 없었다. 무례한 어린놈을 무례한 어른의 방식으로 가르쳤다고 여기면 될 일이었다.
“손이 그래 가지고 퇴치 작전에 나설 수 있겠나?”
무라카미 소토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물었다.
유지훈이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쥐었다 펴 보였다.
“괜찮은데? 너네 2인자 힘은 센데, 제대로 쓸 줄을 모르더라고. 영 헛심만 쓴 거야.”
손뼈가 약간 으스러지긴 했지만, 재생 능력이 발동돼 거의 치유를 마친 상태였다. 미세한 통증 정도만 남았다.
하시모토 마쓰요가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유지훈이 허세를 부린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럼 한 번 더 혼내줘야지. 이번엔 좀 더 처절하게.
“인사도 나눴겠다 친목 도모 차원에서 한 번 겨루는 건 어때?”
유지훈이 무라카미 소토에게 제안했다.
“보아하니 네가 나올 것 같진 않으니까. 2인자들끼리 대결로.”
“하하하. 나쁘지 않군. 승패는 어떻게 가리지?”
“글쎄. 심판이 따로 없으니 어느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무라카미 소토가 하시모토 마쓰요에게 손짓했다. 나서라는 지시였다.
“우리 마쓰요 군이 자비심이 좀 부족해. 상대하는 놈 모두 죽거나 병신이 됐지. 괜찮겠나?”
“사내놈들끼리 싸우다 보면 죽기도 하고, 병신도 되고 그러는 거지. 뭐. 괜찮아. 능력껏 싸우라고 해.”
친목 도모를 빙자한 생사투가 결정됐다.
하시모토 마쓰요가 앞으로 나와 어깨를 떡 벌리고 상대를 기다렸다.
영훈길드의 2인자가 나설 차례였다.
“덕대야.”
“네? 저요?”
엄덕대가 울상이 된 채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 길드에 덕대가 너 말고 또 있냐?”
“왜 맨날 이런 일엔 접니까?”
“네가 우리 길드 2인자 아니었냐?”
“아니에요. 2인자라니요. 저는 집사입니다. 잡일꾼이라고요.”
“아니야. 나는 진작부터 너를 영훈길드의 2인자로 생각해왔어.”
유지훈이 엄덕대의 궁둥이를 토닥였다.
“괜찮아. 배운 대로만 하면 네가 무조건 이겨.”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제가 어떻게 이깁니까? 심지어 레벨 6은 거뜬히 될 것 같은데요.”
엄덕대의 말대로 괴물 같은 놈이긴 했다.
180cm를 훌쩍 넘는 엄덕대도 한 떡대 하는 녀석인데, 놈은 엄덕대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었다.
게다가 엄덕대가 감지한 대로 레벨 6을 넘어서는 각성자였다.
그럼에도 유지훈은 자신만만하기만 했다.
“레벨은 넘어야 할 벽이라고 했지? 그리고 내가 이긴다면 이기는 거야. 어린애처럼 징징대지 말고 얼른 나가.”
“에휴. 저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나 하십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나섰지만, 막상 대결을 앞둔 엄덕대는 절도 있는 자세로 기수식을 취했다.
오히려 하시모토 마쓰요가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쯤 뭔가 잘못됐음을 느낄 때가 됐으니.
“으음···. 으음···.”
연달아 괴이한 소리를 내더니 급기야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서히 자세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마쓰요 군! 조국에 수치를 남길 참이냐!”
“아닙니다!”
하시모토 마쓰요가 마지못해 자세를 취했지만, 흔들리는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놓칠 엄덕대가 아니었다. 벼락같이 선제공격에 나섰다.
유지훈이 가르쳐준 신법으로 빈틈을 파고들었다. 화무결이 일러준 권법으로 공세를 취했다.
각성을 상실했다고는 해도 하시모토 마쓰요는 타고난 힘 자체가 대단했다. 엄덕대의 매서운 공세를 힘으로 맞서 막아냈다.
“뭐야? 대단할 거 없는 놈이잖아?”
몇 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엄덕대가 상황을 파악했다. 그저 미련하게 힘만 센 상대라는 점이었다. 움직임도 둔했다.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어도 된다고 자신했다. 무차별적인 공세에 나섰다.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 일변도로 밀어붙였다.
뻐억!
내지른 정권이 턱을 강타했고.
빠악!
우아한 휘돌려 차기가 관자놀이에 꽂혔다.
팍! 퍽!
수도에 이은 팔꿈치 공격이 목과 명치에 작렬하자,
쿵!
하시모토 마쓰요의 커다란 덩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제 엄덕대의 장기, 관절기가 펼쳐질 시간이었다.
날렵하게 파고들어 상반신을 제압했고, 암바 자세로 돌입해 팔을 꺾었다. 하시모토 마쓰요가 안간힘을 다해 버텼지만,
우두둑!
팔이 완전히 꺾여버렸다.
“감히 조장을!”
청년단의 각성자 둘이 엄덕대를 노리고 몸을 날렸다.
화무결이 나설 차례였다.
“어떤 후레자식이 정당한 비무에 끼어드는가!”
손을 가볍게 펼쳐 털어내자, 엄청난 기운이 휘몰아쳤다. 달려들던 각성자 둘을 멀찍이 날려버렸다.
그러는 사이 엄덕대는 하시모토 마쓰요의 한쪽 팔을 마저 꺾어버린 뒤 가슴 위에 올라탔다. 불꽃 파운딩을 내리꽂았다.
하시모토 마쓰요는 진작에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계속되는 가격에 본능적인 경련만 일으킬 뿐이었다.
일곱 차례의 파운딩을 작렬시킨 뒤 엄덕대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좀만 한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어린놈이 버릇없게···.”
엄덕대가 무라카미 소토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유지훈에게 돌아오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레벨은 넘어야 하는 벽이네요. 형님 말씀대로 제가 우리 길드 2인자가 맞는 모양입니다.”
“이런 일 있을 때만 네가 2인자야.”
유지훈이 무라카미 소토에게 다가갔다.
“2인자가 이 모양이니, 대충 너네 실력이 어떤지 알겠다. 이래 가지고 연합 작전이 의미 있는지 모르겠네.”
일단 받은 건 고스란히 돌려줬다.
이걸로 끝낼 유지훈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너희랑 같이 다니면 걸리적거릴 것 같다. 그냥 가라. 2~3년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하하하. 재미있구나.”
무라카미 소토는 도발에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무슨 장난질을 친 건지 모르겠지만, 제법 봐줄 만했다. 값은 내가 직접 치르도록 하겠다.”
무라카미 소토가 단원들에게 손짓하더니 앞장서 갔다.
“어디 가? 진짜 그냥 가는 거야?”
“연합 작전은 변함없이 진행된다.”
“어딘지 알고 가는 거냐?”
“좌표는 내비게이션에 찍어놓았다.”
유지훈이 피식 웃으며 영훈길드 구성원들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우리도 가자.”
정신을 잃고 널브러져 있는 하시모토 마쓰요가 눈에 들어왔다.
“야! 너네 2인자는 안 데려가냐?”
“조국에 수치를 안긴 놈은 버려지는 게 숙명이다.”
“찬 바닥에 고개 처박고 있으면 입 돌아갈 텐데···.”
전장이 재앙급 몬스터 출몰 현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
사냥의 섭리 (2)
“유지훈 씨 말씀 듣고 찾아오신 모양이군요.”
이자걸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 방문객을 은은한 미소로 맞이했다.
이윤성이었다. 본인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공직에 몸담은 사람이라고만 했다. 다짜고짜 찾아와 이자걸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만남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이윤성이 신분을 내세워 강하게 밀어붙여도 적당히 피하면 그만이었다.
이자걸은 흔쾌히 만남에 응했다. 집무실로 모시도록 해 마주 앉았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공통의 관심사가 필요했다. 유지훈이었다.
“뭔가 듣긴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건 없습니다.”
“어딘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계신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역시 신화그룹의 정보력은 만만치 않군요. 아. 이제는 신화전자죠.”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귀 기울이는 정도입니다.”
이자걸이 빙긋 웃으며 이윤성을 바라봤다.
“갑자기 찾아오신 걸 보면 급한 용무가 있으신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자걸 대표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야 전자기기나 만지작거리는 장사꾼에 불과한데요.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변종 몬스터에 관해서입니다.”
이윤성이 굳은 표정으로 사정을 털어놓았다.
변종 몬스터의 위치 파악에 관한 내용이었다.
일본 각성자 방한단에서만 파악한 채 공유를 거부하고 있었다. 국가안전본부가 역량을 총동원해 추적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연합 퇴치 작전을 진행하기로 협약을 맺었지만, 일본 각성자 측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당초 한국 측은 네 개 한일 연합 퇴치팀이 동시에 작전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일본 측이 대번에 거부했다. 하나씩 차례차례 진행해야 효과적인 퇴치가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유지훈의 영훈길드가 첫 번째 작전에 투입된 이후, 나머지 한국 각성자들도 준비 태세에 들어갔지만, 일본 측이 움직이지 않아 속절없이 대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제가 도움을 드릴 만한 게 없는 것 같군요.”
이자걸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윤성은 절실한 눈빛으로 매달렸다.
“이자걸 대표님만이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변종 몬스터는 야마가토산업과 신화그룹의 비밀 프로젝트로 인해 생겨난 존재니까요.”
이윤성의 눈빛은 절실했지만, 한편으로 매서웠다. 간청하면서도 다그치는 듯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