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50)

이윤성까지 고개를 조아렸다.

유지훈이 마지못한 듯 종이를 다시 받아들었다.

“제가 맡겠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상황이나 파악해보려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바로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이윤성이 준비해둔 자료들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SSG의 정보력을 총동원해 입국한 각성자들의 분석을 마친 상태였다.

출신 성분과 성향, 특성 개화 여부와 과거 행적 등을 면밀히 검토해 자살 특공대에 합류할 만한 인원을 추려냈다.

“일단 이렇게 다섯 명이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이윤성의 명단에 있는 이름 중 다섯 명에게 밑줄을 그었다. 다섯 모두 레벨3의 각성자들이었다.

“요즘은 태평양 전쟁 때와는 달라서 국가라 해도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재산상의 큰 변화나 가족 등 신변의 변화에 주목했습니다.”

“SSG에서 일본 계좌도 들여다볼 수 있나 봐요?”

“내각 정보국에 심어둔 인력이 있습니다.”

“SSG에도 일본 쪽 끄나풀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네요?”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 쪽발이들이 알 수도 있다는 의미고요.”

이윤성이 말없이 쓴웃음만 흘렸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가미카제 특공대가 행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니.

기왕 맡을 거 서두르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일단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가? 뭐든 말만 하게.”

대통령이 바짝 다가와 앉았다.

유지훈이 일단 한 번 튕기는 시늉을 했다.

“대통령님도 인정하시겠지만, 보통 위험한 사안이 아니에요. 어지간한 조건으로는 못 맡아요.”

“인정하네. 뭐든 수용하겠네.”

“일단 착수금조로 하나 들어주시고, 마친 다음에 성공 보수조로 하나 더 들어주세요.”

대통령이 안색이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개 정도는 수용해야지. 얼마든지 들어주겠네. 착수금조로는 뭘 해주면 되겠나?”

유지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대통령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뜸을 들인 뒤 묵직한 한마디를 꺼내 놓았다.

“살인 면허입니다. 대한민국에 위협이 되는 인물에 대한.”

“뭐라!”

“당장 이번 임무에서도 필요한 권한입니다. 자살 특공대로 의심되는 놈들은 물론, 많은 일본 각성자들을 죽여야 할 수 있습니다. 국내법상으로나마 보호돼야 거리낌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진작부터 필요로 하던 권한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 인물들.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었지만, 흠씬 쥐어패는 게 전부였다.

한국에 들어와서 범죄를 저지르는 일본 각성자들은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다만 법에 저촉되는 점은 마음에 걸렸다.

눈에 띄지 않게 죽이면 법적인 문제야 피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게 벌어질 형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법적으로 살인을 허용받는 게 필요했다. 국내법상으로 허용돼야 국제법상으로 다툴 여지도 생길 테니.

이윤성이 앞장서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살인 면허는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부득이하게 초인이 범죄자를 죽였을 때도 추후 법적 판단을 거쳐 정당성을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불가피한 경우 죽여도 된다는 의미이긴 했다. 다만 살인 면허, 다시 말해 살인의 사전 허용은 힘들다는 뜻이었다.

죽인 후에라도 법적 판단을 거쳐 면책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중재안이기도 했다.

나름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유지훈이 원하는 건 아니었다.

말없이 대통령을 바라봤다.

대통령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수용하겠네. 대신 자네가 말한 대로 대한민국에 위협이 되는 존재에 한정해서일세.”

“대통령님!”

이윤성이 거세게 만류했다.

“법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대통령님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큽니다.”

거취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한 상황을 언급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시원하게 밀어붙일 기세였다.

“법적인 근거야 대통령령으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초인의 자기면책권도 결국엔 대통령령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가.”

“지금 그런 대통령령의 선포는 대통령님께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의도야 좋지만, 살인을 사전에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한 것 아닌가.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핵폭탄이 터지도록 놔둘 순 없는 일일세.”

이윤성의 끈질긴 만류에도 대통령은 단호했다.

대신 유지훈에게도 조건을 내걸었다.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네.”

“말씀하십시오.”

“불가피하게 죽이게 되더라도 심사숙고하겠다고 약속해주게.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말일세.”

“당연한 말씀입니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만 죽이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번에 들어와서 악행을 저지르는 쪽발이 놈들은 확실히 죽여주게.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놓게 말이야.”

결국엔 버르장머리로 귀결되는 이광진 대통령이었다.

다만 여기에도 한 가지 아쉬움은 남았다.

“이번 대통령령은 내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에만 유지될 가능성이 크네. 정권이 바뀌면 다음 대통령이 취소하려 할 걸세.”

“좋다 말겠군요. 할 수 없죠. 대통령님 자리에 계신 동안에라도 알뜰하게 활용하겠습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국민투표 때 찬성표를 던지게. 내가 직을 유지하게 되면 자네도 2년 동안은 마음 놓고 죽일 수 있을 거야.”

“으음···. 소신 투표하겠습니다. 제 한 표로 달라질 것도 아닌데···.”

“내 한 표로 달라질 게 없다니. 선거에서 가장 위험한 발상일세.”

대화를 이어가면 유체이탈 화법으로 넘어가 꽃을 피울 것 같았다.

서둘러 본래 주제로 돌아가야 했다.

“국장님. 자살 특공대 예상 인물들 사진이랑 신상 정보 좀 주십시오. 가능하면 최근 사진이어야 합니다.”

“준비된 자료 드리겠습니다. 최근 사진은 다시 확보해보겠습니다.”

유지훈의 머릿속엔 이미 작전이 그려지고 있었다.

진행하려면 또 한 가지를 얻어가야 했다. 대통령에게.

“혹시 청와대 방문하는 귀빈에게 주는 기념품 같은 거 있습니까?”

“물론 있네만. 시계도 있고, 만년필도 있고···. 방문객 말고 직원들 기념일에 주는 백화점 상품권도 있네.”

“백화점 상품권 괜찮네요. 그거 좀 주십시오.”

“백화점 상품권은 왜···? 얼마나 필요한가?”

“작전상 필요합니다. 있는 대로 다 줘보십시오.”

아까운 듯 대통령이 끙 신음과 함께 서랍에 있던 백화점 상품권을 탈탈 털어 유지훈에게 건넸다. 얼추 500만 원어치쯤 됐다.

“이걸 성공 보수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꽁으로 드시려고 하십니까? 이건 작전상 필요해서라니까요. 성공 보수는 잘 마친 다음에 말씀드릴 겁니다.”

백화점 상품권에 이어 만년필 세 자루까지 챙겨 청와대를 나섰다.

***

“무결아. 너 분근착골 사용할 줄 아냐?”

유지훈은 청와대를 나서자마자 영훈길드로 향했다. 도착해서 곧바로 화무결부터 찾았다.

“분근착골? 그건 사파 악적들이 고문할 때나 쓰는 잡술 아닌가?”

“그래서 알아 몰라?”

“내가 정도 무림의 큰 어른인데 그런 잡술 따위야···. 당연히 알지.”

분근착골(分筋錯骨).

말 그대로 근육을 분리하고, 뼈를 어긋나게 하는 기술이었다.

내공을 활용한 점혈로 근골이 뒤틀리게 해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수법이기도 했다. 고문할 때 사용하면 효과 만점이었다.

“잘됐다. 얼마 전에 잡아놓은 쪽발이 놈 하나 있지?”

“얼굴만 내놓고 파묻은 동영의 자객 녀석 말인가?”

“그렇지. 그놈한테 분근착골 좀 써봐라. 뭐 좀 알아낼 게 있거든.”

“나더러 천박하게 고문이라도 하라는 건가?”

“응. 바로 그거야.”

“좋지! 뭘 알아내면 되겠는가?”

화무결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아이의 눈빛이었다.

“뭘 알아내야 하냐 하면···.”

유지훈이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건넸다.

야마가토산업에 의해 뉴클리어 밤 특성을 얻게 된 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야 했다. 자살 특공대를 찾아내기 위한 고문이었다.

고급 정보일 테니 잡아놓은 놈이 모를 수도 있겠지만, 단서가 될 만한 정보라도 뽑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화무결 정도 절세 고수의 분근착골이면 모르던 사실도 쥐어짜 알아내서 털어놓고도 남을 테니.

“30년 만에 하는 거라 힘 조절이 될는지 모르겠군.”

화무결이 휘파람을 불며 포로가 묻힌 곳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끄아악!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굳건한 의지로 견뎌내는가 싶더니.

“크어억! 알아요! 다 알아요! 모르는 것도 알아요!”

아는 거, 모르는 거 할 것 없이 되는 대로 쥐어짜 탈탈 털어내는 일본 서열 20위 각성자였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요. 어르신 또 무슨 사고를 치시는 거예요?”

강은영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유지훈에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강은영을 찾으려던 참이었다.

“마침 잘 왔어. 할 이야기 있었는데.”

“그전에 어르신 좀 어떻게 해봐요. 시끄러워서 대화가 되겠어요?”

“응. 내가 시킨 거야. 중요한 거 알아내는 중이거든.”

유지훈이 강은영에게 대통령과 만남에 대해 들려줬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위협을 해결하는 임무를 맡은 사실과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살인 면허를 얻게 된 사실까지 공개했다.

“핵폭탄을 특성으로 심은 자살 특공대라니 일본 놈들 하는 짓은 한결같이 깊은 빡침을 부르네요.”

“그러니까 대놓고 죽일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거야.”

“착수금조로 살인 면허는 신박하네요. 성공 보수로는 뭘 요구할 생각이에요?”

“딱히 생각해본 건 없는데. 그냥 넘어갈까 싶기도 해. 사실 나한테 너무 쉽잖아. 날로 먹는 임무 같아서···.”

“그게 무슨 당치 않은 소리예요!”

강은영이 버럭 했다.

“유지훈 씨가 그냥 넘어간다 해도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당사자가 그냥 넘어간다는데 은영이 왜···?”

“영훈길드의 마스터 입장에서 묵과할 수 없다고요. 성공 보수는 내가 잘 생각해볼게요. 영훈길드의 번창을 위한 것으로요.”

어느덧 어엿한 영훈길드 마스터로 성장한 강은영이었다.

“아직 수락 안 한 것처럼 말하더니, 뭔가 생기는 거 있을 땐 어느 틈에 마스터를 찾는단 말이야···.”

“그래서 불만이에요? 마스터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요?”

“아니야.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해.”

이제 강은영에게 맡길 임무를 꺼낼 시간이었다.

자살 특공대로 예상되는 놈들의 사진과 신상 정보를 건넸다.

“나더러 이놈들 위치를 찾아달라는 거군요.”

“그렇지. 조금 있다가 무결이가 뭔가 더 가져올 수도 있어. 그것까지 종합해서 싹 찾아줘.”

이윽고 처절하던 비명이 잦아들었다.

화무결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지훈이. 저놈이 숨을 안 쉬네. 오랜만에 했더니 힘 조절이 잘 안 된 모양이야.”

“알아낸 건 뭐 있어?”

“많이도 불더군. 그러니까 어쩌고저쩌고, 미주알고주알···.”

“오케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슬슬 준비하자.”

유지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화무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놈은 어쩌는가? 숨을 안 쉰다니까.”

“놔둬. 숨 못 쉬어서 죽을 것 같으면 알아서 쉬겠지.”

***

가미카제 특공대 (2)

서울 을지로 한복판 L호텔. 한일 각성자 회합에 참석하는 일본 각성자들의 숙소로 지정된 장소였다.

최상층 스위트룸에서 날카로운 외모의 장년 사내가 커다란 유리창 통해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에서 초점은 흐릿했다. 뭔가를 보기보다 허공에 고정돼 있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했다.

찌푸린 눈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따금 짧은 한숨도 내쉬었다. 뭔가 많이 못마땅한 분위기였다.

“단장님. 아직 방에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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