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고 일어섰던 기자들은 기꺼이 그녀에게 발언 기회를 넘겼다. 탁세현 추종 기자 무리의 간사쯤 되는 모양이었다.
“항간에 들리기로 유지훈 씨가 탁세현 초인님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음해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계략을 꾸며 초인님을 해치고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게 정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최대한 친절하게 웃었지만, 보는 이에 따라 소름이 끼칠 수도 있는 웃음이었다.
“전제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무슨 전제가 어떻게 잘못됐다는 거죠?”
“우선 제가 초인 자리를 탐냈다는 전제부터.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억지로 초인 자리를 떠맡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비장한 선택을 한 셈입니다.”
“······.”
“그리고 계략은 힘이 부족할 때 꾸미는 겁니다. 그런데 저한테 탁세현은 한주먹감도 안 됩니다. 뭐하러 골치 아프게 계략 같은 걸 꾸밉니까? 때려잡으면 그만인 놈을.”
다시금 탁세현 추종파가 들고일어났다.
“닥치세요! 탁세현 초인님은 대한민국 초인 서열 2위입니다!”
“비각성자 따위가 감히 탁세현 초인님을!”
“애국자 초인님을 욕보인 당신이야말로 나라를 좀먹은 거야!”
슬슬 실력 발휘를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지훈이 여전히 친절한, 한편으로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은 채 남자 기자 하나를 바라봤다.
비각성자 따위 운운하던 교활하게 생긴 사내였다.
“보여드리면 믿으려나?”
“뭐, 뭘 말이오?”
“탁세현 그놈이 나한테 한주먹감도 아니라는 거. 보여줘도 계속 지껄일 수 있겠냐고 묻는 거야.”
“다, 당신 나를 겁박하려는 거야!”
“아니. 증명하려는 거야.”
유지훈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거무스름한 빛이 손 주위를 감싸고 돌더니 서서히 길게 번져갔다. 묵빛 검의 형체를 형성했다.
“가끔 멍청한 놈들 가운데 보여주기 전까지 못 믿고 까부는 놈이 있더라고, 뭘 믿고 그러는지.”
유지훈이 빛의 검, 심검을 들어 남자 기자를 향해 천천히 내리쳤다.
싸악!
남자 기자 앞의 탁자가 반으로 잘렸다.
“흐억!”
남자 기자가 비명과 함께 몸을 움츠렸다.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어가는 것으로 보아 지린 듯했다.
옆에 앉아있던, 역시 탁세현 추종 기자가 소리쳤다. 우직한 외모의 젊은 사내였다. 제법 호기를 부리는 모습이었다.
“다, 당신 감히 기자를 협박하는 거야!”
“아니. 증명하려는 거라고 했잖아. 멍청이들 중에 제일 멍청한 놈이 보여줘도 못 믿고 까부는 놈이야. 너처럼.”
다시금 심검을 내질렀다. 이번엔 사선으로 두 번 휘둘렀다.
나풀! 사뿐한 소리와 함께 기자의 상의가 네 갈래로 찢어져 훨훨 날아갔다. 상반신 알몸이 훤히 드러났다.
기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몸을 가렸다. 바짓가랑이 사이로 뭔가 줄줄 흘렀다. 지리다 못해 싼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것 같은데. 아직도 못 믿겠는 분 또 있나? 더 보여주려면 어디까지 자르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처음 질문했던 여기자가 뭔가 말하려고 했다.
유지훈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 전에 이거 하나부터 분명히 할게.”
“뭐, 뭡니까?”
“탁세현 그놈을 그토록 좋아했으면 잘 알 거야. 자기면책권이라고. 국가를 위해 봉사할 때 방해가 되는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 치워버려도 형사적 책임을 지지 않는 권리지.”
“그, 그게 어쨌다는 거죠?”
“지금 내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있거든. 하기 싫은 기자 회견을 억지로, 하지만 성실하게 하고 있어. 국가를 위해. 그런데 자꾸 방해하는 놈들이 있네? 딱 자기면책권이 적용될 시점인 것 같은데?”
탁세현 추종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데꿀멍이 됐다.
“그렇다고 그렇게 고개 처박고 있을 필요는 없어.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기자는 질문을 해야지. 날카롭게. 대신 말 같은 소리로.”
시끄럽던 무리를 잘 타이르고 나니 기자 회견장은 엄숙해졌다.
기자들 대부분이 유지훈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기자단 뒤쪽에 이윤성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봐서 오열하는 듯했다.
탁세현 추종 기자 무리를 잘 타이른 게 오열할 일인가?
아닌가? 웃고 있는 건가?
기자 회견을 마친 뒤 확인해보기로 했다.
질문이 없으면 마치려 했는데, 맨 뒷줄의 기자가 씩씩하게 손을 들었다. 똘망똘망한 눈빛이 인상적인 젊은 여기자였다.
“네. 기자님. 질문하세요.”
“아까 말씀하시길 일본에 엿을 먹이신다면서 칼춤을 멋지게 추시겠다고 했는데요.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눈빛은 똘망똘망했지만, 질문은 영 헛방이었다.
그래도 말 같은 소리이긴 했기에 성심성의껏 답하기로 했다.
“기자님. 제가 무용수는 아니잖습니까. 설마 쪽발이 놈들 앞에서 춤을 추겠다는 의미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의미인지 여쭙는···.”
“이번에 각성자 회합에 참석하는 일본 각성자들에게 외교관 지위가 부여됩니다. 한국 내에서 이동에 제한도 없고요. 아십니까?”
“네. 알고 있어요. 국내에 재앙급 몬스터 출현 위험이 있어서 일본 각성자들의 효과적인 지원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유지훈이 혀를 끌끌 찼다.
“기자님들이 그렇게 알 정도니 국민들은 얼마나 잘못 알겠어요.”
“잘못 알고 있다고요?”
“쪽발이 각성자들이 재앙급 몬스터보다 더 위험해요. 몬스터들이야 먹고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거지. 쪽발이 각성자 놈들은 풀어놓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요.”
“아···.”
“그러니까 제가 들어와서 뻘짓 하는 쪽발이 각성자 놈들 싹 다 무찌르겠다는 말입니다. 칼춤은 그 말이에요.”
유지훈이 우아한 동작으로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여전히 손에 쥐어진 빛의 검이 부웅부웅 근사한 소리를 냈다.
그제야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숙했던 분위기도 다소 활기를 띠었다. 한두 명 기자들이 손을 들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유지훈은 유쾌하게 대답했다. 특유의 익살도 발휘됐다.
굳어있던 기자들의 표정도 풀렸다. 조금씩 웃음꽃이 피는 가운데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받겠습니다.”
“저요!”
중학교 윤리 선생님 인상의 여기자였다.
이 질문만큼은 반드시 해야겠다는 비장함이 엿보였다.
“네. 기자님. 질문하시지요.”
“이번에 유지훈 씨 귀환 사실이 공개되고 초인으로 발탁된 배경에 대통령님의 잘못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유지훈 초인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흐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유지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제가 국민투표로 거취를 결정하실 대통령님을 돕기 위해 초인 자리에 앉게 된 게 아니냐는 질문이군요?”
“맞습니다. 아울러 대통령님을 지지하시는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여기자의 눈빛은 떨렸다. 두려워하는 모습이었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당당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아니 재촉하는 눈빛이었다.
유지훈이 다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윤성이 눈에 들어왔다. 간절하게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기대하는 듯했다.
빙긋 웃어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입니다. 꼭 듣고 싶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솔직한 대답 듣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괘씸합니다.”
“네. 네? 뭐가 말씀이신지···.”
질문한 여기자는 물론, 모든 기자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긴 뭡니까. 대통령님이죠. 몰카 동영상 찍혀서 협박이나 당해놓고 왜 엉뚱한 사람들한테 짐을 떠넘깁니까?”
“그게 무슨···.”
“초인이고, 귀환자고, 저하고는 상의 한마디 없었습니다. 동영상 협박한 작자 해결해달라고 해서 죽을 고비 넘겨 가면서 뛰어다니고 있는데, 난데없이 초인 자리에 앉혀놓은 거라고요.”
“그럼 일본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대통령님 말씀은···?”
“쪽발이 놈들 버르장머리를 왜 고쳐줍니까? 와서 나쁜 짓 하면 그냥 죽여버리면 간단한 일을.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건 개전의 여지가 있는 놈한테나 해당하는 거 아닙니까?”
“아···.”
“대통령님 지지하냐고요?”
유지훈이 썩소와 함께 코웃음을 쳤다.
“천만에요.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겠습니다. 국민투표 때 저는 반대표 던질 겁니다.”
절망적인 탄식이 기자단 뒤쪽에서 들려왔다.
물론 이윤성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이번엔 분명히 오열하는 모습이었다.
***
대통령의 중대 결심 발표에 이어 초인 등극 기자 회견까지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광진 대통령은 자숙한다며 관저에 틀어박혔고, 보좌진 대부분은 수습하다가 앓아눕다가를 반복했다.
이윤성은 그냥 앓아누웠다. 기자 회견의 충격 때문일 터였다. 대통령한테도 심하게 깨진 듯했다.
“제가 신신당부했잖습니까.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저도 소신껏 기자 회견에 임하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기자분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것뿐인데···.”
“됐습니다. 당분간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단호한 축객령에 쫓기듯 SSG 사무실을 나왔다.
영훈길드에 가봐야겠지 생각하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쪽발이 놈들에게 자이언트 엿을 먹이자고 의기투합한 동지. 신화전자 대표 이자걸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바쁘십니까? 차나 한 잔 했으면 싶은데요.”
[유지훈 씨, 아니 유지훈 초인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거 초인이라는 말은 안 쓰면 안 됩니까?”
[제가 홍길동도 아니고, 초인을 초인이라 하는데 어찌···.]
“지랄을 하세요···.”
바로 신화전자 사옥으로 향했다.
이자걸은 입구까지 나와서 유지훈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바쁘실 텐데 별 볼 일 없는 저를 다 찾아주시고···.”
“대표님이야말로 안 바쁘세요? 여기까지 마중 나오시고···.”
“저야 바쁠 게 있겠습니까. 직원들이 바쁘죠.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 덕분에 저는 그냥 놀고먹습니다.”
“당당하게 자랑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보여드릴 게 있어서 연락이라도 드려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이자걸이 집무실로 유지훈을 안내했다.
집무실은 사옥 가장 높은 층에 자리했다.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는 따로 없었다.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직원들 중엔 기자 회견을 본 이도 있었다. 유지훈을 알아보고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자걸에게도 격의 없이 대했다.
자유분방한 회사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재벌들은 사무실로 통하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들었는데, 대표님은 없는 모양이네요.”
“저야 뭐 놀고먹는 주제인데요. 전용 엘리베이터에 전기 낭비할 인사가 못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자걸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미치광이 천재에 소시오패스인데, 직원들에게는 더없이 오픈 마인드라니.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집무실에 도착했다.
이자걸이 문을 열려 하는 순간, 유지훈은 위화감을 느꼈다.
문 안쪽에서 감지되는 묵직한 기운. 언젠가 경험해본 듯했지만, 실체는 떠오르지 않았다. 상서롭지 못하다는 느낌뿐이었다.
이자걸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유지훈이 만류하려 했지만, 이자걸은 웃으며 문을 열었다.
“조심해요!”
묵직한 기운이 이자걸을 덮쳤다.
유지훈이 심검을 일으켰다. 이자걸을 덮친 놈을 겨냥했다.
소시오패스의 노림수
유지훈은 집무실 안에서 이자걸을 기다리고 있는 묵직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자걸을 덮치려고 준비하는 듯했다.
이자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으며 문을 열고 있었다.
“최근에 집무실을 새롭게 꾸몄습니다. 보시면 놀랄 겁니다.”
유지훈이 만류하려 했지만, 문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
“조심해요!”
다급하게 경고했지만, 한발 늦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묵직한 기운이 이자걸을 덮쳤다.
뒤늦게나마 유지훈이 심검을 일으켰다. 이자걸을 덮친 놈을 겨냥하고 내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이자걸은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넘어져 나뒹구는 채로 자신을 덮친 놈을 얼싸안은 모습이었다.
“이 녀석아. 잠깐 자리 비웠다고 이러는 거야? 아침부터 계속 놀아줬잖아. 아빠도 가끔은 할 일이 있단다.”
도마뱀이었다. 서너 살배기 어린아이 크기의.
이자걸의 품에 안겨서 혀를 날름거리며 얼굴을 핥고 있었다. 앞발을 살랑살랑 좋아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얘는 대체 뭡니까?”
유지훈이 힘차게 끌어올렸던 심검을 거둬들였다.
바짝 긴장했던 찰나였기에 질문하는 음성엔 어이없음이 묻어 있었다.
이자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유지훈 씨가 품에 안고 날랐던 놈인데요.”
“네? 제가요?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알을 깨고 나온 지 사흘 됐습니다.”
얼마 전 무인도에서 데리고 나온 변종 몬스터 거대 왕도마뱀 그리고 일곱 개의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