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격한 언사까지 구사했으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상황입니까?”
일본 총리대신 와타나베 츠요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회의 석상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일본 최고위 인사들이 소집된 긴급회의였다.
내각 2인자 관방장관 기시다 시게노부, 외무대신 이노우에 후미오, 방위대신 후지타 시다노리, 각성자청장 기무라 마사요시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은 물론 야마가토산업의 수장들도 참석했다.
야마구치 가문의 수장 야마구치 신타로와 가토 가문의 수장 가토 마사오 그리고 야마가토산업 각성자 그룹의 총괄 야마구치 히토시였다.
야마구치 히토시는 한일 각성자 회합의 일본 측 단장이기도 했다. 한국으로 출국을 하루 앞두고 회의에 불려온 상황이었다.
“이광진 대통령이 미친 거지요. 몰카 동영상에 쫓기다 보니 이성을 잃은 거예요.”
야마구치 신타로가 유쾌하게 웃으며 반응했다.
와타나베 츠요시 총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마구치 가주께선 웃음이 나오십니까? 대놓고 본국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와타나베 츠요시는 일본의 일인자였다. 지금 회의도 그가 소집했다. 상황을 언짢게 만든 야마가토산업을 책망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야마구치 신타로와 가토 마사오가 회의를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언짢은 상황을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하하. 총리께서 한국 대통령의 망발 때문에 단단히 뿔이 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총리.”
야마구치 신타로가 그윽한 눈빛으로 와타나베 츠요시를 바라봤다.
은은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시선이기도 했다.
“능력이 되는 놈이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들면 기분 나쁜 일 맞습니다. 그런데 능력도 없는 놈이 그런 소리를 하면 웃어넘겨야지요.”
야마구치 신타로가 좌중을 둘러봤다.
주도권을 확실히 넘겨받았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막말을 그냥 넘겨선 곤란하겠죠. 혼쭐을 내줘야죠.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주께서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와타나베 츠요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국민들은 당장 일한 외무 회담을 취소하라고 성화입니다. 각성자 회합 또한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가주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외무 회담과 각성자 회합 모두 야마가토산업에서 제안한 의제들이었다. 지속 여부 역시 야마가토산업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었다.
“취소라니요. 이런 상황에서 취소하면 움찔해서 물러난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야지요.”
“그 말씀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는 겁니다. 규모를 키우는 건 어떨까 모르겠군요. 외무대신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가능하겠습니까?”
외무대신 이노우에 후미오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규모를 키우신다는 의미가···?”
“각성자 회합에 참석하는 본국 각성자의 숫자를 늘리자는 뜻입니다. 가서 제대로 휘저어보자는 취지에서요.”
“아!”
참석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야마구치 신타로의 설명이 이어졌다.
“본국 각성자들에게 외교관 지위도 부여되고, 이동 제한도 없지 않습니까? 이참에 왕창 보내서 맘껏 놀아보게 하자는 겁니다.”
“글쎄요. 그게···.”
이노우에 후미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각성자 회합 참석자 명단은 이미 넘겨놓은 상태라서요. 추가되는 인원에 대해서도 외교관 지위와 자유로운 이동이 적용될지는 불투명합니다.”
“상관없습니다. 한국 쪽이 어떻게 나오든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면 됩니다. 문제 삼으면 힘으로 해결하면 되고요.”
야마구치 신타로가 다시금 좌중을 둘러봤다.
“본가의 구니오 군이 이미 한국에 들어가 있습니다. 초인 두 분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각성자 회합과 외무 회담을 앞두고 순조롭게 사전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전 작업이라 하시면 어떤 것입니까?”
관방장관 기시다 시게노부가 질문했다.
야마구치 신타로는 기다렸다는 듯 흐뭇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한국 대통령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공개한 한국의 귀환자, 곧 본국의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오랜 기간 한국에서 진행한 첨단 기술들도 싹 우리에게 넘어오게 될 테고요.”
“가주께서 한국을 혼쭐낼 준비를 진작부터 하고 계셨군요.”
참석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작 야마구치 신타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살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이건 원래 계획됐던 일에 불과합니다. 혼쭐을 내는 건 별도로 진행해야지요.”
“어떻게···?”
“그건 한국에 들어가는 본국의 각성자들에게 맡겨두면 될 일이지요.”
야마구치 신타로의 시선이 야마가토산업 각성자 그룹의 총괄 야마구치 히토시에게 향했다.
야마구치 히토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 비장한 미소를 그린 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본국의 초인 일곱 분 중 다섯 분이 함께하십니다. 한국의 각성자 생태계를 반쯤 조져놓겠습니다.”
“반쯤은 원래 계획 아니던가? 혼쭐을 내줘야 한다고 했네.”
“알겠습니다. 완전히 짓밟아버리겠습니다.”
와타나베 츠요시 총리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한국의 각성자 수준이 본국에 못 미친다고는 하나, 세계 10위권의 강국입니다. 무리해서 밀어붙이다가 역풍이라도 불면···?”
“역풍이 불어주면 그 또한 고마운 일이지요.”
야마구치 신타로가 방위대신 후지타 시다노리를 바라봤다.
“방위대신. 해상자위대의 준비 상황은 어떻습니까?”
“제1호위대군이 요코스카에서 출격 준비를 마친 상황입니다. 여차하면 제2호위대군의 제6호위대도 합류할 수 있도록 요코스카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일본 자위대의 자랑인 해상자위대의 3개 호위대가 한국으로 진격을 위해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한 형국이었다.
“허허허. 이거야 원···.”
와타나베 츠요시가 씁쓸하게 웃었다.
총리인 자신도 모르게 진행된 전쟁 준비였다.
바람직한 방향이긴 했지만, 절로 나오는 쓴웃음을 참을 순 없었다.
총리의 마음을 읽은 듯 야마구치 신타로가 부연 설명했다.
“한국에 들어간 본국 각성자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 조치입니다. 총리께서 너무 노여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괜찮습니다. 다 본국을 위한 일인데요.”
와타나베 츠요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건 없었다. 잘 되면 그의 공적으로 삼으면 되고, 잘못되면 야마가토산업의 책임으로 넘기면 된다고 여겼다.
“한국 대통령의 망발을 성토할 목적으로 회의를 소집했는데, 결의를 다지는 자리가 됐군요. 좋습니다. 야마구치 가주와 가토 가주를 비롯한 야마가토산업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끝났다.
참석자들은 벌써부터 축제 무드에 접어드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대목이 있었다.
야마구치 가주가 그토록 자신 있게 내세운 사전 작업. 실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야마구치 가주는 물론 야마가토산업의 누구도 그 사실을 보고받지 못한 상태였다.
아울러 한국의 귀환자 유지훈의 실체도···.
거기에 더해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변수의 존재도···.
***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이윤성을 만나자마자 유지훈은 언성부터 높였다.
“누가 언제 초인 자리 달라고 했습니까? 왜 애먼 사람 끌어들여서 피곤하게 만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미치고 팔짝 뛸 지경입니다.”
이윤성이 고개부터 납작 조아렸다.
얼굴이 해쓱했다. 불과 몇 시간 사이 10년은 늙은 듯했다.
“대통령님께서 사전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질러 버리셔서···.”
이윤성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든 인력이 하얗게 질려버린 상황이었다. 정부와 국회는 물론, 법원과 검찰까지 발칵 뒤집혔다.
몰카 동영상이 있는 고위 인사 중 대통령의 뜻에 순응하는 이도 있었지만, 반발하는 자들도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힘을 모아 반격에 나서려고 모사를 꾸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량하고 충직한 공직자들은 혼란을 막으려고 머리를 싸맨 상황이었다.
“일단 유지훈 씨께서 기자 회견에서 잘 좀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뭘 말할 수 있습니까? 난데없이 불려 와서.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귀환자랍시고 초인 자리 꿰찼다고 욕까지 듬뿍 먹고 있던데요.”
“저희가 어떤 말씀을 하시면 좋을지 간략하게 정리는 해봤습니다.”
이윤성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해야 할 이야기와 해선 안 될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크리스털 박에 관한 부분은 해선 안 될 이야기로 분류돼 있었다. 귀환에 대해서는 인정은 하되 자세한 내용은 자제해달라고 했다.
정부에 우호적인 기자와 비판적인 기자도 구분돼 있었다. 특히 탁세현을 추종하는 기자들의 명단은 굵은 글씨로 강조돼 있었다.
맨 끝에 대통령의 선택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달라는 당부가 밑줄까지 그어진 채 적혀 있었다.
유지훈은 조용히 종이를 이윤성에게 돌려줬다.
“기자 회견은 기자가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하는 거 아닌가요? 원래 취지에 맞게 하겠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건 솔직하게 대답하고, 곤란한 건 답변을 거부하는 식으로요.”
벙찐 이윤성을 뒤로한 채 유지훈은 기자 회견 장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지훈입니다. 대통령님께서 뜬금없이 초인 자리에 앉힌 귀환자가 바로 접니다.”
플래시 세례가 밀려들었고, 질문 공세 또한 쏟아졌다.
한꺼번에 질문이 밀려드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진행을 맡은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기자님들. 우선 유지훈 신임 초인의 인사말부터 듣고 한분 한분 질문하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유지훈 초인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지훈이 한 차례 헛기침한 뒤 인사말을 시작했다.
“급한 일 좀 처리하러 멀리 가 있는 사이에 대통령님께서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기자분들 기다리게 했습니다.”
대통령에게 떠넘기는 사과의 말로 서두를 연 뒤.
“저는 5년 전 차원 이동을 통해 어딘가로 보내졌고, 석 달 전 돌아온 귀환자입니다. 귀환에 관해서는 정부의 특수 조직과 연구 진행 중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향후 그 조직을 통해 공개될 것입니다.”
귀환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마쳤다.
“여기 기자분들께서 저를 기다리신 이유는 자격을 박탈당한 초인의 자리를 제가 채우게 돼서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여기까지 말한 뒤 잠시 멈췄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저는 초인이 될 자격은 없습니다. 비각성자거든요. 그래서 초인에 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기자들이 술렁였다.
인상을 구기는 기자들도 다수 눈에 들어왔다.
공격에 들어오려는 찰나, 유지훈이 양손을 들어 가라앉혔다.
“그럼에도 초인 자리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오랜 기간 꿈꿔왔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뭡니까?”
맨 앞줄 노련해 보이는 기자가 따지듯 물었다.
유지훈이 씩 웃었다. 천천히 양팔을 들어 주먹 감자를 만들고는 허공을 향해 힘차게 내질렀다.
“쪽발이 놈들에게 빅엿을 먹이는 것입니다. 아니 그레이트 엿. 아! 이제는 자이언트 엿이 됐군요.”
기자들의 눈이 일제히 튀어나올 듯 커졌다.
유지훈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대통령님께서 어려운 결심을 통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는데,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칼춤 한 번 시원하게 춰보려고 합니다.”
기자단 뒤쪽에 있던 이윤성이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떨궜다.
유지훈이 이윤성을 향해 힘차게 양팔을 내뻗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쪽발이 놈들에게 자이언트 엿을 먹이겠다고 장엄하게 다짐합니다!”
귀환자가 초인으로 사는 법
쪽발이 놈들에게 자이언트 엿을 먹이기 위해 초인 자리를 받아들이겠다는 유지훈의 선언.
기자 회견장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기자들은 마구잡이로 질문을 던져댔다. 고성이 넘쳐나는 분위기였다.
급기야 진행을 맡은 청와대 대변인이 심한 현기증으로 실려 나갔다. 누구도 수습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기자단 뒤쪽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윤성도 한숨만 쉬어댈 뿐이었다. 원망 어린 눈빛으로 유지훈을 바라보며.
수습은 유지훈의 몫이었다.
“자자. 이러지들 마시고. 한분 한분 질문해 주세요. 가능한 선에서 성실하게 대답해 드릴 테니.”
둘째 줄에 까탈스러워 보이는 여기자가 손을 들었다.
“탁세현 초인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동안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는데, 유지훈 씨로 인해 헌신짝처럼 버려지신 것 아닙니까?”
탁세현을 추종하는 기자 무리 중 하나였다.
유지훈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 그 인간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게 아니라 나라를 좀먹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적절한 대가를 치르고 쫓겨났을 뿐입니다.”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탁세현을 추종하는 기자들이 개떼처럼 들고 일어섰다.
“그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탁세현 초인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선배 초인에 대한 존경을 보이세요!”
탁세현을 추종하는 기자들은 받아먹은 게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이는 크리스털 박이었다. 우호적인 언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작업을 해왔던 것이었다.
질문했던 여기자가 추가로 질문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