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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중대 결심
박순덕의 집으로 들어와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기다렸다.
거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대형 TV가 눈에 쏙 들어왔다. 별도의 첨단 음향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현장에서 보듯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란히 앉아서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아무 일 없이 함께 있는 시간은 처음이었다.
왠지 어색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괜히 서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또 책임지라고 하면 어떡하지?’
틈만 나면 ‘책임져’를 부르짖는 강은영이 부담스러운 유지훈이었다.
책임질 일 한 것도 없는데, 왜 자꾸 책임지라는 건지.
‘그냥 책임지겠다고 할까?’
생각해보니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투닥투닥 하면서 정도 제법 들었고, 그럭저럭 마음도 통했다. 외모도 빼어나고, 능력 역시 출중했다. 성질머리가 다소 더럽긴 했지만, 누구보다 정의롭고 반듯했다.
그러고 보면 강은영은 썩 괜찮은 여인이었다.
두 살 연상인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살아온 시간으로 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무림에서 50년을 보낸 유지훈은 80년 가까이 산 셈이니.
‘아니야. 아직은 자유롭고 싶어.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아.’
잠깐 사이 생각이 수십 번 바뀌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부담스러워 잠시 정원으로 나가려던 찰나.
“궁금한 게 있어요.”
강은영이 질문을 던져왔다.
“헉! 응. 뭔데?”
“뭘 그렇게 놀래요? 무슨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거예요?”
“응. 아니. 나라의 미래가 어찌 되려나. 뭐 그런 생각이지.”
“정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궁금하다는 게 뭐야?”
강은영이 이상하다는 듯 빤히 유지훈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차원 이동에 관한 거예요.”
“응. 그게 뭐 어때서?”
“이동할 때마다 특성이 하나씩 추가되잖아요.”
“그렇지. 덕분에 나는 네 개, 은영은 두 개를 얻게 됐지. 은영은 원래 있던 것까지 합치면 셋이군.”
“그럼 틈날 때마다 왔다 갔다 하면 특성이 계속 생기는 거 아니에요? 왜 자주 안 다녀오는 거죠?”
유지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질문이었다. 유지훈이 고심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확신이 없거든.”
“무슨 확신이요?”
“크게 두 가지야. 우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원 이동으로 어딘가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 확실하지 않아. 특성이 추가됐을 때 몸이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고.”
처음 무림에서 귀환했을 때 유지훈은 통로 너머로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을 봤다.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무림으로 가기로 마음먹기 전 유지훈은 17호 던전을 찾아 통로를 살폈다. 너머로 무림의 모습이 보였다.
같은 곳으로 향하기에 같은 곳으로 돌아오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차원 이동을 통해 도착한 곳이 무림이 아니라면, 21세기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몸의 감당 여부는 이번에 귀환하면서 여실히 느꼈다.
차원 이동의 통로를 지나는 과정이 지독스럽게 고통스러웠다. 이동할 때마다 고통의 강도가 심해졌다.
다음번엔 견디기 힘든 고통에 휩싸일 것 같았다. 죽음까지 떠오를 정도의 고통일 터였다.
“세상에 공짜로 얻는 건 없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돼 있지. 차원 이동도 마찬가지야.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 나는 뭔가를 잃고 있을 거야. 반복될수록 점점 크고 중요한 걸 잃게 되겠지.”
“그러니까 이번에 무림으로 다녀온 건 모험일 수도 있었네요?”
“모험이라기보다는 확률이 매우 높은 도박이었다고 해야겠지.”
강은영의 눈매가 돌연 싸늘해졌다.
“그 말은 곧 나를 도박판에 던져넣었다는 뜻이겠네요?”
“응? 그게 왜 그렇게 되지···?”
“책임져요!”
책임지라는 말 왜 안 나오나 했다.
잠시나마 번민했던 책임질까 고민도 훌훌 날려버렸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긴급 대통령 담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조용히 해봐. 일단 이것부터 보자고.”
“대통령님께서 구해주신 줄이나 알아요.”
이광진 대통령이 침중한 표정으로 단상에 섰다.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90도 굽혀 인사한 뒤 발표를 시작했다.
[오늘 저는 국민 여러분께 송구한 말씀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하는 제가 부끄럽고 참담하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수치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비장한 시작이었다.
유지훈과 강은영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채 대통령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뒤로 가면 갈수록 탄식과 경악을 쏟아내야 했다.
“하아. 왜 어떤 결심인지 미리 말 안 했는지 알겠네.”
“그러게요. 미리 알렸으면, 대통령님 꽁꽁 묶여서 어디 감금당했을 거예요. 재갈까지 물려서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통령의 중대 결심은 대형 사고였다.
국민들에게는 진솔하게 다가갔을지 모르지만, 주위에서 보좌하는 이들에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줄 내용이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몰카 동영상의 존재를 밝히고 고개를 조아렸다. 미리 밝히지 못한 사연과 협박당했던 과정을 솔직하기 털어놓았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저의 불찰로 불순한 의도를 지닌 인물이 국정을 어지럽히게 됐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믿음 덕분에 이 자리에 있게 됐지만, 송구스럽게도 저는 믿음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대형 사고의 시작이었다.
자신 외에도 몰카 동영상으로 협박받는 고위 인사가 더 있음을 밝혔다. 이들로 인해 한층 국정이 어지러워졌다고 분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몰카 동영상으로 협박하는 존재를 초인이 비호하고, 배후에 일본이 있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불순한 인물은 이번 한일 외무 회담에도 깊이 개입했습니다. 저의 명예를 걸고 확실히 바로잡겠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국정을 농단한 세력을 처단하고 악의 고리를 끊겠습니다.]
대형 사고는 책임지는 행동을 공개하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번 사태를 책임지기 위해 저는 저의 신임 여부를 국민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한일 외무 회담이 끝나는 대로 국민투표를 실시해 그 결과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동영상으로 협박당한 모든 공직자 또한 국민의 선택에 거취를 맡기겠다고 했다. 국회의원은 재선거로, 국무위원 등 정부 각료는 신임 투표로 자리 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해 한일 외무 회담이 끝나는 대로 동영상으로 협박당한 고위 인사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도 놀라웠지만, 진짜 충격은 대통령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한일 외무 회담의 왜곡을 바로잡겠다며 던진 폭탄선언이었다.
[이번 외무 한일 회담의 안건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안건과 일제 침략기의 모든 만행을 사죄하고 보상하는 안건입니다. 대통령의 직을 걸고 반드시 관철시키겠습니다.]
이쯤 되면 선전포고였다.
표면적이나마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외무 회담이 한일 양국의 전쟁으로 비화 될 상황이 돼버렸다.
[돼먹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버르장머리를 고친다는 격정적인 언사로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와! 어질어질하네.”
“이참에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고 하시지.”
강은영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기왕 하는 김에 대마도도 걸고 넘어지지 하는 반응을 보였다.
“왜? 대마도도 영토 분쟁이 있었나?”
“딱히 그렇진 않은데요. 우리나라에서 더 가까운 섬이에요. 몇몇 역사학자들은 대마도가 신라에 복속됐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요.”
“그럼 우리 땅이라고 우겨볼 만도 하네. 원래 섬은 본토에서 가까운 쪽이 주인 아닌가?”
“내 말이요.”
대통령의 긴급 대국민 담화를 보며 누구보다 즐거워하고 있을 사람도 떠올랐다.
“이자걸 대표 좋아하고 있겠네. 안 그래도 일본에 빅엿을 먹일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 양반인데···.”
“그레이트 엿 아니었나요? 자이언트 엿이었던가···.”
“이자걸 대표랑 대통령님 자리 한 번 만들어 드려야겠어. 만나면 죽이 잘 맞을 것 같아.”
“이자걸 대표는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고 우기자고 할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이윤성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도 잘한 결과가 됐다. 수색 인력이 총동원돼서 동영상을 찾을 의미가 없는 상황이 됐으니.
“이윤성 국장한테 연락 안 하길 잘했네.”
“거봐요. 내가 대통령님 중대 결심이 뭔지 확인하고 연락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잖아요.”
“연락했으면 대통령 영감님 중대 결심 보류하지 않았을까?”
“기세 봐서는 그냥 밀어붙이셨을 것 같아요. 동영상 자백은 둘째 치고 일본에 엄포 놓은 건 오랫동안 작심하고 계셨던 것 같던데요?”
“그렇긴 했어. 말씀하시는 표정이 후련해 보이더라고.”
“맞아요. 동영상 찾았으면 대통령님 서운하셨을 수도 있겠어요.”
후련한 건 좋지만, 향후 수습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한일 외무 회담과 각성자 회합 등 중대한 양국 외교 이슈를 어떻게 진행할지. 아랫사람들은 머리를 쥐어뜯어야 할 상황이었다.
당장 일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국제적인 관심사가 될 판이었다.
“쪽발이 놈들은 어떻게 나올까? 외무 회담이고, 각성자 회합이고, 다 뒤집어엎자는 거 아닐까?”
“그러기엔 그쪽도 너무 멀리 왔어요. 당장 내일 각성자들 입국이 예정돼 있고요. 이미 들어와 있는 각성자들도 제법 돼요. 굵직한 놈들은 다 죽긴 했지만요.”
야마가토산업의 야마구치 구니오 이사를 비롯한 초인 둘에 레벨 7 각성자 셋은 조금 전 유지훈과 강은영의 손에 세상과 하직했다.
야마가토산업 각성자 그룹의 3조 정예들은 영훈길드에 들이닥쳤다가 화무결의 손에 몰살당했다. 조장은 포로로 잡혀있고.
이 같은 상황은 일본에서 아직 모르고 있을 터였다. 한국에서 진행하는 사전 작업이 순조로울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유지훈 씨는 일본 놈들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는 거 아니에요?”
“당연하지. 들어와서 까부는 족족.”
목을 그어버리는 시늉을 했다.
“쪽발이 놈들 우리보다 각성자 수준이 높다고 우쭐대왔다지? 이번에 수준 좀 맞춰주려고. 아니지. 한참 역전될 수도 있겠구나.”
잠시 기함하긴 했지만, 대통령의 중대 결심은 유지훈에게 나쁠 건 없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데. 적당히 발을 맞춰주면 될 일이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착각이었음을 확인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급하게 걸려온 이윤성의 전화 덕분이었다.
[어디 계십니까? 지금 모시러 왔는데요.]
“저를 데리러 왔다고요? 어디로요?”
[어디긴 어딥니까? 연구소죠. 지금 어디십니까? 큰일 났습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무슨 일인데요? 어디를 가야 한다는···?”
[대통령님 긴급 담화 못 보셨습니까?]
“봤는데요···?”
그때 옆에서 강은영이 경악성을 쏟아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와우! 대통령님이 유지훈 씨도 그냥 놔두지 않았네요.”
“뭐? 뭔데 그래?”
유지훈이 강은영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화면엔 기사 제목들이 띄워져 있었다.
[탁세현, 초인 자격 박탈! 공석이 된 대한민국 초인 한 자리는 귀환자 유지훈이 차지하기로···.]
[대한민국, 세계 여덟 번째로 귀환자 보유국으로. 귀환자 유지훈이 탁세현을 무참히 꺾고 초인 등극 눈앞에···.]
“이, 이게 대체 뭐래···?”
“대통령님이 긴급 담화 끝나고 추가로 발표하셨네요. 우리는 잡담하느라 못 봤고요.”
이광진 대통령은 탁세현의 초인 지위 박탈을 선언했다. 국정 농단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울러 탁세현 처단에 현격한 공을 세운 유지훈을 새로운 초인으로 인정한다는 발표를 곁들이기까지 했다. 귀환자라는 사실을 공개하며.
“여론이 유지훈 씨한테 썩 좋지만은 않은데요. 탁세현 초인이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거든요. 초인 자리를 강탈하기 위해 음해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요.”
수화기에서 이윤성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유지훈 씨 빨리 기자회견 하셔야 합니다. 기자들 수백 명이 모여 있습니다. 안 오시면 영훈길드로 쳐들어갈 분위기입니다.]
유지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놔. 이 영감님 상당히 교활한 분이었네. 어쩌자고 나까지 끌고 들어가는 거야.”
유지훈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말려 올라갔다.
“그래. 좋아. 제대로 판을 깔아주셨는데, 칼춤 정도는 멋지게 춰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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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한 다짐
이광진 대통령의 긴급 담화 발표 이후 일본 정부도 발칵 뒤집혔다.
독도와 일제 침략기 사과 및 배상 문제는 양국의 민감한 외교 사안이었다. 거론될 때마다 양국 관계가 급격히 차가워지곤 했다.
대격변의 시대에 접어든 이후 잦아든 이슈이기도 했다.
각성자 수준에서 일본이 월등히 우위였기에, 한국 정부가 눈치를 보게 된 탓이었다. 아무래도 힘에서 밀리다 보니 외교적 이슈로 들고나오기 힘든 형편이었다.
일본은 독도는 일본 땅으로, 일제 침략기 문제는 진작에 다 끝난 일로 치부했다. 한일 외교 이슈에서 완전히 제외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대통령이 이번 외무 회담의 의제로 선언해버렸으니 일본 정부가 발칵 뒤집힐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