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혼잣말을 되뇌던 여인이 돌연 말을 멈췄다. 표정이 굳어졌다. 휠체어를 작동해 몸을 뒤로 돌렸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당신들이 먼저 왔군요.”
***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장소는 양평 외곽 북한강 강변이었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라 도로 사정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운전이 익숙지 않은 유지훈은 제법 애를 먹으며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피곤하다며 잠을 청한 강은영은 코까지 골며 숙면을 취했다.
“그 특성 발동하면 진짜 피곤한 모양이네.”
몇 차례 길을 잘못 들어 비포장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덜컹덜컹 승차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강은영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잠만 잘 잤다.
마침내 내비게이션에 찍힌 주소에 도착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고풍스러운 느낌을 더한 전원주택이었다.
일단 강은영부터 깨웠다.
“다 왔어. 일어나. 칠칠치 못하게 침까지 흘리면서 자냐.”
“아웅. 잘 잤다. 조금만 더 잤으면 정말 개운했을 텐데.”
강은영이 유지훈의 옷소매를 끌어다가 입가에 침을 닦았다.
“에잇! 침을 왜 내 옷으로 닦는 거야!”
“휴지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차에 휴지 정도는 준비해 둬야죠.”
“이거 은영 차거든!”
“아. 그렇구나. 얼마 전에 휴지 사놨는데 어디에 뒀더라···.”
“됐어. 어서 내리기나 해. 여기 박순덕 사는 데 맞는지나 알아봐.”
강은영이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맞아요. 안에 있다고 나와요.”
강은영이 앞장서서 집으로 들어갔다.
유지훈이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안에 누가 있을 줄 알고 무턱대고 들어가는 거야? 숨어있다가 기습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 몰라요. 자다 일어났더니 정신 하나도 없어요. 걱정되면 유지훈 씨가 앞장서요.”
위치를 바꿔 유지훈이 앞장섰다.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하기만 했다.
기감을 끌어올렸지만, 감지되는 기운은 없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발코니로 나갔다. 난간 너머로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정원이었다.
그리고.
휠체어에 탄 중년 여인이 반갑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역시 당신들이 먼저 왔군요.”
졸업 앨범 사진의 박순덕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사진 속 얼굴에 세월의 흔적만 아로새겨져 있었다. 다만 투실투실하던 살집은 없었다. 체구도 사진에 비해 가냘팠다.
유지훈이 눈매를 좁히며 다가갔다.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겁니까?”
여인은 말없이 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지훈이 입술을 살짝 씰룩이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크리스털 박, 아니 박순덕 여사입니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요.”
여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털 박은 내 분신이에요. 저주와 맞바꾼 능력으로 만들어낸 분신이죠. 그래요. 내가 박순덕이에요.”
“저주와 맞바꾼 능력이라고···?”
박순덕과 크리스털 박. 역시 특성과 관련돼 있었다.
본체와 분신의 관계. 괴랄한 특성이 만든 실체와 허상이었다.
박순덕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이 유지훈이라는 귀환자겠군요? 내가 그토록 공들여 만든 세계를 완전히 뒤흔든 변수.”
박순덕의 시선이 강은영에게로 넘어갔다.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눈빛도 더없이 싸늘했다.
“옆에 계신 아름다운 여성분은 국가안전본부의 강은영 팀장님일 테고요. 내가 만든 세계로 그렇게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던 걸림돌. 아! 최근에 국장급으로 승진하셨다죠?”
강은영이 움찔했다.
박순덕의 눈빛에 담긴 한기로 인해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박순덕이 빙긋 웃었다. 여전히 눈빛은 싸늘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차갑게 대했군요. 아름다운 여인을 대하는 내 태도 때문이에요. 분신으로 이용하거나, 증오하거나.”
박순덕이 슬쩍 유지훈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생각 같아선 분신으로 이용하고 싶지만, 곁에 든든한 분이 지키고 있어서 어렵겠네요. 증오하는 쪽을 택해야겠어요.”
이제야 상황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역용술에 가까울 정도로 모습이 바뀌었던 이유는 다른 인물을 분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필요에 따라, 또 경우에 따라 분신을 바꿨기에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 될 수 있었다.
신변의 이상을 심장 박동으로 전달할 수 있는 건 분신의 특성이 심장을 매개로 이뤄졌기 때문일 터였다.
“분신을 만드는 특성을 보유한 건가요?”
강은영의 질문에 박순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성 같은 건 몰라요. 저주와 맞바꾼 능력이라고밖에.”
“들어본 적은 없는 특성이지만 정신 계열일 거예요. 좀 더 심오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정 궁금하시면 국장님한테 써보는 방법도 있어요. 어때요? 내 분신이 돼 보시겠어요?”
요녀였다.
박순덕은 미모 없이도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는 여인이었다.
강은영은 말리고 있었다. 유지훈이 나서야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강하게 말투부터 바꿨다.
“우리가 왜 왔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물론 예상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다른 손님들부터 만나보셔야 할 것 같군요.”
박순덕이 손을 들어 유지훈과 강은영의 뒤쪽을 가리켰다.
범상치 않은 기도의 여섯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일단 저분들과 대화부터 나눠보셔야 할 것 같네요. 서로 해결할 문제가 있어 보이거든요. 저랑 대화는 양쪽의 문제가 말끔히 정리된 다음에 나누도록 하시죠.”
***
야마구찌 구니오는 어렵사리 초인 둘을 수배하는 데 성공했다. 당장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초인들이었다.
일본 초인 서열 3위의 니시카와 케이타와 5위의 키무라 츠요시. 한국 초인들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들이었다.
키무라 츠요시만 해도 한국 초인 서열 1위인 서원섭보다 한 수 위의 강자로 알려져 있었다.
수화기 속 음성은 가능하면 많은 초인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야마구치 구니오는 니시카와 케이타와 키무라 츠요시 둘만으로도 차고 넘칠 것이라 자신했다.
한국의 초인 다섯이 모두 와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강자들이니. 심지어 한국의 초인 다섯 중 둘은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니시카와 케이타와 키무라 츠요시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급 리무진 한 대가 도착했다.
약속대로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키무라 츠요시가 대동하고 온 레벨 7 각성자 셋까지 총 여섯이 수화기 속 음성의 주인공을 만나러 향하게 됐다.
‘도움을 청한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일까? 박 여사가 곤경에 처한 것일까? 안 그래도 복잡하게 꼬인 상황이 더 난해해지는 건 아닐까?’
데리러 온 사람에게 넌지시 사정을 물었지만, 아는 게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저 모시러 왔을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강변의 전원주택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반경 1km 내에 집 한 채 찾을 수 없는 외진 장소에 덩그러니 자리한 고풍스러운 주택이었다.
데리러 온 사내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안내된 곳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정원이었다.
사람들이 보였다. 휠체어에 탄 중년 여인과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남녀였다. 중년 여인은 일행을 보며 반갑게 미소짓고 있었다.
야마구치 구니오는 본능적으로 중년 여인이 만나야 하는 중요 인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본능은 그녀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크리스털 박, 박 여사님이십니까?”
야마구치 구니오가 공손하게 물었다.
중년 여인, 박순덕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어쨌거나 내가 당신들이 말하는 박 여사인 건 맞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야마가토산업의 이사 야마구치 구니오입니다. 이번 회담에 야마가토산업을 대표해 참석하게 됐습니다.”
“반가워요. 구니오 상. 신타로 오라버니는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건강하신지 모르겠네요.”
“가주님께선 건강하십니다. 가주님을 뵌 적이 있으십니까?”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답니다. 사연은 조금 있다가 복잡한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 들려드리도록 하죠.”
박순덕이 묘한 미소와 함께 야마구치 구니오의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함께 오신 분들은 초인님들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니시카와 케이타 상과 키무라 츠요시 상입니다. 본국 초인 서열 3위와 5위의 거물들이십니다.”
“멀리까지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해요.”
박순덕과 일본 초인들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제 야마구치 구니오의 궁금증은 박순덕과 함께 있는 남녀에게로 향했다.
“저분들은···?”
“아! 내 정신 좀 봐. 중요한 분들을 소개해 드렸어야 했는데.”
박순덕이 다시금 환하게 웃으며 유지훈과 강은영을 바라봤다.
“인사들 나누세요. 이쪽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귀환자 유지훈 씨고요. 옆에 아름다운 여성분은 국가안전본부의 강은영 국장님이에요.”
박순덕이 유지훈과 강은영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두 분께는 새로운 손님들 소개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이미 다 들으셨을 테니까요.”
양쪽 모두 놀라 자빠질 상황이었다.
서로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고 할 수도 있었다.
박순덕은 유쾌한 웃음으로 양쪽을 붙이고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은 관계죠? 해결할 문제도 있을 거고요. 일단 해결부터 하세요. 저와 할 일은 이후에 매듭짓도록 하죠.”
공이 유지훈과 야마구치 구니오에게 넘겨졌다.
먼저 잡아든 쪽은 야마구치 구니오였다.
그에겐 유지훈과 관련한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한국의 귀환자를 일본으로 데려가는 임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 초인 서열 3위와 5위를 대동한 상황에서 타깃은 사실상 혼자였다. 국가안전본부의 젊은 여성 국장은 변수가 되지 않아 보였다.
귀환자의 능력이 어느 수준인지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초인 둘에 레벨 7 각성자 셋이면 충분히 강제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일단 회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지훈 씨. 저는 야마가토산업의···.”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 형식적인 인사 따위로 귀중한 시간 버리는 일 없도록 하지.”
유지훈의 싸늘한 반응에도 야마구치 구니오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럼 제가, 아니 야마가토산업이 유지훈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아시겠군요.”
“그딴 건 알 바 없고, 내가 너희들을 만나고 싶어 한 건 아냐?”
“그러셨군요. 잘 됐습니다. 말이 잘 통할 것 같습니다.”
유지훈의 날 선 반응을 야마구치 구니오는 느물느물하게 받아넘겼다.
“일본으로 오십시오. 유지훈 씨. 국가 전략 자산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건 또 뭐 하는 지랄인데?”
“일단 정착금으로 100억 엔을 제공하겠습니다. 아울러 초인 자격을 부여해 드리겠습니다. 정부 2인자인 관방장관에 버금가는 권한이 주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모든···.”
귀화했을 때 혜택을 죽 펼쳐놓은 뒤 야마구니 구니오는 거절했을 때 대응도 꺼내놓았다.
“만일 거절하시면, 억지로 데려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와 함께 오신 초인 두 분이. 그렇게 되면 유지훈 씨에겐 아무런 혜택도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귀환에 관한 연구 대상이 될 뿐입니다.”
야마구치 구니오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선택을 강요하는 태도였다.
유지훈이 피식 웃으며 강은영을 쳐다봤다.
“얘 뭐라는 거니?”
“글쎄요. 죽여달라는 말을 쪽발이 식으로 하는 것 같은데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상황
“얘 뭐라는 거니?”
“글쎄요. 죽여달라는 말을 쪽발이 식으로 하는 것 같은데요.”
유지훈과 강은영이 경멸하듯 이죽거리자 야마구치 구니오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입가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제안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군요. 추가로 요구하시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옆에 계신 여성분까지 모셔야 한다면 그 또한 수용하겠습니다. 여성분께도 만족할 만한 처우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순간 강은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 유지훈 씨가 나를 책임지게 해주는 건가요?”
“시끄러! 여기서 책임지는 게 왜 나와!”
“혹시나 해서 한 번 물어본 거예요.”
유지훈이 코웃음과 함께 야마구치 구니오를 노려봤다. 이어 초인들과 수행하는 각성자들을 죽 훑어봤다.
“개소리를 참 어렵게도 한다. 너희들이 나를 데려가겠다고? 어디 한 번 해봐. 대신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야마구치 구니오가 쓸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 됐군요. 좋은 관계로 함께하면 많은 걸 이뤄낼 수 있었을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귀환에 관한 연구만으로도 일본은 세계 제1의 각성자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입니다.”
야마구치 구니오가 한 걸음 뒤에서 관망하던 니시카와 케이타과 키무라 츠요시에게 깊이 허리를 굽혔다.
“그럼 두 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키무라 츠요시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