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의 시선은 유지훈이 건네준 크리스털 박 관련 자료들에 고정돼 있었다. 자료들이 특정한 인물의 존재가 느껴진다는 의미였다.
“심장 박동이 유지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머지는 죽었지만, 심장은 살아있는 셈이니까.”
강은영이 크리스털 박의 시신과 심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곳이 떠올라야 하는데, 장소는 떠오르지 않아요. 그저 생명이 기운만 느껴질 뿐이에요.”
일단 믿어지지 않았다.
크리스털 박은 SSG가 수년에 걸쳐 추적한 인물이었다. 수집한 자료라든가 실체가 잘못됐을 리 없었다.
심지어 대통령과 면담을 위해 동행한 인물들도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응대하기까지 했다.
부검대에 누워 있는 인물은 크리스털 박이어야 했다. 심장 또한 그녀의 것이어야 했고.
만에 하나 아니라면 대형 사고였다. 지금까지 진행해온 모든 일들이 단숨에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윤성과 상의가 시급했다.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네. 유지훈 씨. 제가 지금 대통령님이랑 중요한 문제를 논의 중입니다. 논의 마친 뒤 전화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는데요. 그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어제 내가 죽인 여자가 분명히 크리스털 박 맞는 거죠?”
[틀림없습니다. 유지훈 씨도 정황 다 보셨으니···. 탁세현 초인까지 동행하지 않았습니까.]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대통령님이랑 논의 마치는 대로 전화 주세요.”
미궁에 빠져드는 상황이었다.
여러 정황상 크리스털 박을 죽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반면 강은영의 특성은 크리스털 박이 살아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특성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니, 무시할 수 없는 소수 의견인 셈이었다.
“변태 국장님은 뭐래요?”
“확실하대. 내가 죽인 여자가 크리스털 박이래.”
“그럼 내 특성이 왜 이러는 거지? 이유 없이 이럴 리는 없잖아요.”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지금부터 그걸 알아봐야겠지.”
유지훈과 강은영이 바쁘게 움직였다.
크리스털 박의 시신과 심장에 매달려 있는 첨단 의료진과 IT 전문가들의 손놀림 또한 바빠졌다.
***
야마가토산업의 최연소 이사 야마구치 구니오는 초조했다.
야마구치 구니오는 이번 한일 외무 회담과 양국 각성자 회합의 실질적인 일본 측 책임자였다.
표면적으로는 야마가토산업을 대표해 경제 협력 분야를 맡고 있었다. 한국의 주요 기업과 면담이 공식적인 주요 일정이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임무는 외무 회담이나 각성자 회합보다 중요했다. 가치를 논하기 힘들 정도였다.
신화그룹과 진행한 비밀 프로젝트의 결과물 입수, 한국의 귀환자 일본 송환, 한국 유망 기업의 핵심 기술 탈취, 나카무라 형제의 복수···.
모두 그가 직접 기획하고 발의한 사안들이었다. 덕분에 그는 일본 외무대신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받고 한국으로 입국했다.
예정대로라면 1주일 뒤 외무대신과 함께 입국해야 했다.
하지만 사전 정지 작업으로 진행한 작전들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초장부터 일이 제대로 꼬인 셈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예정보다 1주일이나 앞당겨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실타래는 더욱 꼬여가기만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요시모리도 실패한 모양이군.”
한국의 귀환자를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펼친 작업이었다.
야마가토산업 각성자 그룹의 납치 전문 조직인 3조의 정예 요원을 열 명이나 투입했다.
귀환자 유지훈의 주변 인물을 포획해 압박용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유지훈의 동향까지 확실히 파악한 뒤 진행했기에 실패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고 자신한 작업이기도 했다.
진작에 그가 있는 곳에 유지훈의 주변 인물들이 끌려와야 했는데. 3조장 사이토 요시모리로부터 연락도 없었다.
“내각 정보국 특수 요원들도 연락이 두절 된 상태고···. 조용히 매듭지으려던 작전은 모조리 실패한 건가.”
신화전자 대표 이자걸을 납치하기 위해 내각 정보국 특수 요원과 야쿠자 조직을 동원한 작전이었다.
이자걸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는 받았는데, 이후 추가적인 보고는 없었다. 연락마저 끊긴 상태였다.
“내일 각성자들이 입국하기 전에 기본적인 정리는 마쳐야 하는데···.”
모든 게 꽉 막힌 상황이었다.
해결할 방안은 크리스털 박과 만나면 찾을 수 있을 터였지만, 크리스털 박으로부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신변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울러 대표적인 지일파 초인 탁세현이 제거됐다는 소식까지.
크리스털 박과 소통을 도맡았던 가토 마사오 회장도 뾰족한 해결책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예정대로 진행하면 되네. 각성자들의 이동 제한 해제와 외교관 지위 부여 등 요구했던 사안들이 모두 수용됐다고 하네. 박 여사 쪽으로부터도 곧 연락이 갈 테니. 만나면 모든 게 명쾌해질 걸세.]
명쾌해지긴커녕, 더욱 깊은 안갯속으로 빠져드는 형국이었다.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크리스털 박으로부터 연락도 없었고, 연락할 방법 또한 없었다.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 프로젝트의 결과물만큼은 본국으로 넘겨야 하는데···.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해야 하는 건가.”
표정이 사뭇 비장해진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발신자 제한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다급하게 받았다.
“야마구치 구니오입니다.”
[만나야겠습니다. 도움을 청합니다.]
변조된 음성이었다.
야마구치 구니오는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수화기 너머 음성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져왔다.
[초인과 함께 오실 수 있습니까? 몇 분이나 가능하시겠습니까?]
“본국의 초인 말씀입니까? 아직 입국 전이라 확답을 드리긴 힘든 상황입니다만···.”
[도움이 절실합니다. 성패가 달려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 시간쯤 뒤 계신 곳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야마구치 구니오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금 휴대폰을 붙들었다.
서둘러 입국할 수 있는 일본의 초인들을 수배하기 위해서였다.
***
유지훈과 강은영에, 첨단 의료진과 IT 전문가들까지. 머리를 쥐어짰지만, 답은 찾아내지 못했다.
마지막 수단을 동원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총책임자인 이윤성의 승인이 필요했다. 대통령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올 이윤성을 기다렸다.
“은영이 새로 얻은 특성도 좀 더 발전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 인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도 찾아낼 수 있도록 말이야.”
“쉽지 않을 거예요. 정신 계열 특성은 신체 계열 특성이랑 달라서 단련을 통해서 발전시키기 어렵거든요. 뭔가 심적인 계기가 있어야···.”
“정신적인 충격 같은 걸 받으면 되려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지훈 씨가 나를 책임진다고 하면 정신적인 충격 심하게 받을 텐데요.”
“됐어. 그냥 그러고 살아.”
침중한 분위기에 비해 강은영의 표정은 밝았다.
역시 눈치가 없는 여인이구나 생각하며 유지훈은 내심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 이윤성이 도착했다.
“심장에 손을 대는 방법만 남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나마 써볼 수 있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의료진 책임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윤성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 박동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습니까?”
“지금 상황으로는 12시간 남짓입니다. 짧으면 6시간까지도···.”
“심장에 손을 대면 시간은 단축되겠죠?”
“반 정도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면서 기다리느니 뭔가 해보는 게 낫다는 게 저희 의료진의 판단입니다.”
이윤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리가 한껏 무거워진 인상이었다.
유지훈을 바라봤다. 강은영이 있는 것도 그제야 알아봤다.
“강 국장님도 와계셨군요.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아니에요. 국장님. 고생하시는데, 도움이 못 돼 죄송할 따름이에요.”
“대통령님께서 중대 결심을 하실 분위기라 저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여기 상황 마무리되면 바로 가봐야 합니다.”
“중대 결심이라고요?”
유지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어떤 결심을 하시려는 건데요?”
“거기까지는 저도···. 대통령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여기 상황 보고드리면 바로 실행에 옮기실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최측근들이랑 상의는 하셔야 할 텐데요. 준비하려면 또 머리 터질 텐데···.”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는 의미겠죠.”
이윤성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까 말씀하신 거 관련해서 혹시 추가된 이야기는 없습니까?”
크리스털 박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떠올린 것이었다.
물론 이윤성도 믿진 않았다.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유지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단서도 없었고요.”
“알겠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이윤성이 의료진에게 돌아갔다.
바로 심장을 가리는 작업을 시작하라고 말했다.
의료진이 바쁘게 움직였다. IT 전문가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작업을 이어받을 채비를 갖췄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행 상황 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윤성이 다시 청와대로 돌아갔다.
크리스털 박의 심장에 정신없이 매달려 있는 의료진과 IT 전문가들 사이에 유지훈과 강은영만 덩그러니 남겨진 상황이 됐다.
강은영이 유지훈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얼른 가죠.”
“어딜? 본부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거길 왜 데려가려고?”
“지금 본부로 갈 때가 아니에요.”
강은영이 잰걸음으로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유지훈은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 나왔다.
“그럼 어디로 가자는 거야?”
“어디긴 어디겠어요. 크리스털 박한테 가야죠. 아니지. 박순덕한테 가는 게 되겠구나.”
“뭐?”
강은영이 종이 한 장을 유지훈에게 건넸다.
다름 아닌 사진이었다. 크리스털 박, 아니 박순덕의 대학교 졸업 앨범 사진이었다. 현재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그거 보니까 어디 있는지 알겠던데요.”
“그게 무슨···?”
“안에 시신으로 누워 있는 여자가 크리스털 박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순덕은 아니라는 의미예요. 박순덕은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 이야기를 지금 하면 어떡해! 이윤성 국장한테 알렸어야지!”
유지훈이 버럭 했다.
강은영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통령님께서 중대 결심을 하실 거라잖아요. 하시도록 도와드리는 게 국민 된 도리 아니겠어요?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걸 말이라고 해!”
유지훈이 한층 거세게 버럭 했지만, 강은영은 태연하기만 했다.
“대통령님 좋은 분인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분명히 책임질 일을 하셨어요. 아랫사람들이 잣 빠지게 뛰어다녀 해결해서 넘어갈 일은 아니란 뜻이에요.”
“······.”
“중대 결심이라는 거 책임지는 행동 아니겠어요? 우리가 해결하더라도 대통령님도 책임지시는 모습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중대 결심을 실천에 옮기시도록 하려는 거라고요.”
“뭐라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군.”
“중대 결심이라는 거 이윤성 국장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으로 봐서 엄청날 것 같지 않아요? 뭔지 확인해 봐야죠. 그냥 결심으로 끝나게 하긴 아깝지 않겠어요?”
“그래. 듣고 보니 나도 궁금하다.”
유지훈도 대통령과 만났을 때 책임지는 조치를 요청했다. 대통령도 고민하겠다고 동의했다.
중대 결심은 관련된 행동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지훈도 궁금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내비에 주소 찍을 테니 유지훈 씨가 운전해요.”
“내가? 운전은 원래 은영 몫이잖아.”
“박순덕 찾느라고 피곤해 죽겠어요. 가는 동안 한잠 자야겠어요.”
***
크리스털 박, 박순덕
경기 양평 외곽의 전원주택. 북한강을 마주한 강변에 자리하고 있어 전경이 더없이 유려했다.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정원. 차분한 분위기의 중년 여인이 휠체어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여름이었지만, 다리를 담요로 덮은 모습이었다. 추위 때문은 아닐 터였다. 다리를 드러낼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었다.
여인은 이따금 휠체어 앞에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카드를 쳐다봤다. 뒤집어놓은 카드들이었다. 잠시 생각한 뒤 한 장씩 펼쳐 보고는 피식 웃곤 했다. 표정이 씁쓸했다.
“아무리 해봐도 길은 적고 흉만 많은 상황이구나.”
여인은 두 종류의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 오는지에 따라 길과 흉이 결정될 상황이었다.
재미 삼아 보는 것이긴 했지만, 카드로 보는 점괘는 계속 흉(凶)만을 가리켰다. 아무리 반복해도 길(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변수가 나타날 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 그냥 터트려 버리는 게 최선이었을까?”
주위엔 아무도 없었지만, 여인은 혼잣말로 질문과 대답을 이어갔다.
“아니야. 그건 곤란해. 어쨌거나 내가 살아야 할 내 나라 내 땅이잖아. 시궁창으로 만들 순 없지.”
“에이~. 그건 아니지. 이 지경이 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차라리 시원하게 똥물이나 끼얹어. 시궁창을 만들어버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