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50)

“그대들은 누구인가? 도장 깨기 하러 다니는 흑도 악적들인가?”

사이토 요시모리는 미중년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다. 대답을 주저했다. 철저한 경계가 우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신타로 나가이는 달랐다. 젊은 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정 자체가 경망스러운 탓이었다.

“뭐 하는 놈이냐! 너도 여기 소속이냐?”

“여기 소속이라···. 그건 아직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은데···.”

화무결의 시선이 영훈길드 구성원들을 향했다. 무슨 일인지 묻는 눈빛이었다.

“어르신. 쪽발이들이 우리를 끌고 가겠답니다.”

“상목 형님이 나서서 막으려다 일렉트릭 쇼크에 당했습니다.”

화무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렉트릭 쇼크라···. 뇌기를 그렇게 표현하는 모양이구나. 봤다. 사특한 무공을 사용하는 놈을.”

신타로 나가이가 다시금 거친 어조로 말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아니. 너도 여기 소속이면 우리랑 같이 가야겠다”

“그건 좀 힘들겠군.”

화무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가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친구 녀석이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거든. 무서운 녀석이야. 말 안 들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하하하. 정신 나간 녀석 같으니. 친구 무서운 건 아는 놈이 우리 무서운 건 모르겠냐?”

“흐음. 그러고 보니 근방에 산책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 그대들이 안내 좀 해주겠나?”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냐! 저놈은 죽여야겠다.”

신타로 나가이가 조원들에게 눈짓했다.

경계하던 사이토 요시모리가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두 명이 몸을 날린 상태였다. 일단 지켜보고 향후 대응을 결정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결정은 빨라야 했고, 당연히 만류해야 했다.

조원 둘이 달려들었지만, 어느 틈에 화무결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무언가 두둥실 떠올랐다. 달려들던 조원들의 머리였다. 머리를 잃은 조원들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비명이고 뭐고 없었다. 떠올랐다가 바닥에 나뒹구는 조원들의 얼굴엔 의아한 표정만 남아 있었다.

내가 왜 하늘을 날았다가 떨어지고 있는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 이게 무슨···.”

신타로 나가이는 말을 더듬었고.

“위험인물이다! 다들 물러서라!”

사이토 요시모리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작 화무결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씁쓸한 눈빛으로 손에 쥔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일렉트릭 쇼크에 당한 이상목이 놓아버린 검이었다.

“검결이 거칠어졌군. 너무 오래 검을 놓은 탓인가?”

조원들을 물러서게 한 사이토 요시모리가 앞으로 나섰다. 어눌한 한국어로 화무결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오?”

“이곳의 주인은 내 친구라고 이미 말한 것 같은데. 그대야말로 내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 같군. 누구인가? 너희들은.”

화무결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사이토 요시모리가 움찔했다. 시선에 실린 한랭한 기세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뭐지? 이 기이한 기운은? 마나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데, 초인에 근접하는 기세. 아니 압도할 것 같은···.’

사이토 요시모리는 대답 대신 신타로 나가이를 비롯한 조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영훈길드 구성원 전원을 끌고 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이행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했다.

눈앞의 인물은 위험했다. 야마가토산업의 방한 목적 달성을 위해선 제거해야 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레벨 7의 각성자인 그와 신타로 나가이. 거기에 레벨 6 각성자 넷과 레벨 5 각성자 둘.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임무는 실패했다. 저자를 죽여라! 방해되는 놈은 모조리 죽여도 상관없다. 특성을 최대한으로 발동하라!”

여덟 명의 일본 각성자들이 일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주위로 기운이 일렁였다. 빛무리가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화무결은 무심한 눈빛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갈 무렵이 돼서야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영훈길드 구성원들을 돌아봤다. 이상목에게 시선을 멈췄다.

“자네 검은 나쁘지 않았네. 다만 신법과 결합이 조금 아쉬웠네. 한 단계 위의 고수를 상대할 때는 신법을 활용한 변칙이 필요하네.”

일본 각성자들이 공세의 채비를 갖춘 상황.

화무결은 여유롭게 길드원들에게 가르침을 마친 뒤에야 느릿하게 삼재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일본 각성자들이 특성을 발동하려는 찰나, 화무결이 벼락같이 땅을 박찼다. 신법을 전개했다. 엄습해 오는 마나의 결정체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검격을 쏟아냈다.

“아!”

영훈길드 구성원들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화무결이 구사하는 신법은 유지훈이 그들에게 가르쳐준 신법과 동일했다. 화무결이 전개하는 검법은 삼재검법이었다.

익숙한 신법과 검법이었지만, 화무결에 의해 펼쳐지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본의 고레벨 각성자들이 발동한 특성을 하나하나 깨부쉈다.

뇌기, 빙기, 화기···. 마나로 형성된 모든 기운이 화무결에 검을 마주한 순간 무기력하게 바스러졌다.

검 주위에 형성된 푸르스름한 빛무리. 무림 천하제일인이 일으킨 검강이 일본의 고레벨 각성자 여덟이 쏟아낸 마나의 기세를 압도했다.

검강이 일본 각성자 무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였다. 서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피를 쏟으며 쓰러진 자들만 존재했다.

생명의 기운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살아남을 이는 하나에 불과했다.

무리의 우두머리 사이토 요시모리였다.

“오늘의 도발을 책임질 놈 하나는 남겨둬야겠지.”

화무결이 사이토 요시모리에게 다가가 혈도를 제압했다.

사이토 요시모리가 축 늘어진 채 그대로 굳어졌다. 숨만 쉴 뿐 움직임은 없었다.

“어르신!”

길드원들이 일제히 달려와 화무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희를 지도해주십시오. 어르신!”

“허허허. 지훈이 그 녀석이 사고 쳤다고 뭐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지훈이 오면 상의해 보겠네.”

“사고라니요. 어르신 아니었으면 저희는 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지훈이 오면 자네들이 잘 좀 말해주게. 사고 친 거 아니라고.”

화무결이 미동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사이토 요시모리를 가리켰다.

“저놈 좀 어디 가둬뒀으면 좋겠는데.”

“그냥 가둬둬도 괜찮겠습니까? 레벨 6, 7은 되는 것 같던데요. 가둬놓아도 부수고 나올 겁니다.”

엄덕대가 걱정스러워하자, 화무결이 허허로운 웃음으로 반응했다.

“허허허. 괜찮을 걸세. 저놈 당분간 숨만 쉬기도 버거울 거야.”

“길드 사무실에 가둬놓을 만한 곳은 없는데요···.”

엄덕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무릎을 쳤다.

“어르신. 아예 묻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묻어버린다고? 생매장이라도 하자는 건가?”

“생매장까지는 아니고요. 머리만 내놓고 나머지는 묻어버리는···.”

한때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던 엄덕대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조치이기도 했다.

화무결이 손뼉을 쳤다.

“그거 재미있겠군. 그럼 어서 땅부터 파게.”

“알겠습니다. 삽질은 형식이가 전문입니다.”

길드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박형식은 땅을 팠고, 나머지는 참상의 현장을 정리했다.

이윽고 일본 각성자 서열 20위의 강자 사이토 요시모리는 영훈길드 마당 한구석에 머리만 내밀고 파묻혀 있는 신세가 됐다.

***

“뭐? 무결이 이놈 또 사고 쳤구나. 사고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잡아놓은 놈이나 잘 감시해. 누가 또 올지 모르니까 무결이한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라고 하고. 아! 죽이진 말라고 해. 병신만 만들라고.”

전화를 끊은 뒤 유지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덕대로부터의 전화였다. 일본 각성자들이 영훈길드로 쳐들어온 사건에 대한 보고였다. 물론 화무결의 무용담도 빼먹지 않았다.

“왜요? 어르신께서 무슨 사고 치셨어요?”

갈드 마스터 강은영은 바로 옆에 있었다.

국가안전본부로 향하던 그녀를 유지훈이 불러들인 것이었다.

“쳤지. 그것도 거하게. 쪽발이 각성자 놈 아홉을 죽이고, 한 놈은 폐인으로 만들었다고 하네.”

“네? 일본 각성자들을 왜요? 어디서요? 어떻게요?”

“왜는 왜야. 덤비니까 그랬겠지. 어디서는 우리 길드 사무실에서고, 어떻게는 검으로 싹 날려버렸대.”

강은영은 여전히 무슨 말인가 눈을 깜빡였다.

유지훈은 엄덕대의 보고 내용을 들려줬다.

“큰일 날 뻔했네요. 어르신 없었으면. 그런데 일본 각성자들이 영훈길드로는 왜···?”

“나 때문이야. 야마가토 놈들도 내가 귀환자인 걸 알아. 이번에 한국에 오는 이유 중에 나를 일본으로 데려가는 것도 있다나 봐.”

“그러니까 길드 애들을 잡아가서 유지훈 씨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려 했다는 거예요?”

“회유는 어려울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지. 정확하게 보긴 했어. 치밀한 쪽발이 놈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은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일본에서 각성자들을 더 보낼 수도 있을 텐데요.”

“당장은 걱정할 거 없어.”

유지훈이 손에 쥔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쪽발이 각성자 놈들 입국 기록 살펴봤는데, 대단하다 할 만한 놈들은 아직 안 들어왔어. 길드에 쳐들어온 놈들이 전부인 모양이야.”

“아···.”

“그리고 온다 한들 괴물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무결이 그놈 여기로 치면 초인이야.”

“그렇긴 해도 일본에는 세계 랭킹에서 10위 안에 드는 초인이 셋이나 있어요. 셋 다 이번에 입국하고요.”

유지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결이 걔 별명이 무신이야. 무공의 신이라고. 무림을 지배했던 놈인데 여기 레벨로 평가할 수나 있겠어? 굳이 평가한다면 레벨 10? 그보다도 위려나?”

“아···. 어르신이 그 정도였군요.”

“무결이가 지키는 영훈길드를 걱정할 게 아니라, 뭣도 모르고 쳐들어오는 쪽발이 놈들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바이에른 뮌헨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이럴 때 딱 어울리겠네요. 하긴. 오는 족족 다 죽여버리면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그렇지. 적당히 폐인 만들어서 잡아놓는 게 최선이지.”

화무결 문제는 이쯤에서 정리해야 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찾으려는 사람이 누구예요? 빨리 찾아주고 본부 들어가 봐야 해요. 본부장님도 급하다고 성화예요.”

“그게 좀 복잡한데···. 뚜렷이 누군가를 찾으려는 건 아니고···.”

유지훈이 사정을 설명했다.

대통령이 크리스털 박에게 약점 잡힌 사연과 크리스털 박의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면 동영상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내용까지.

지저분한 치정 문제에 대해 여인들은 대체로 민감했다.

강은영도 일단 길길이 날뛰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동영상이 있는 고위 인사들을 한참 동안 성토했다.

“지금 그 양반들 욕할 때는 아니고. 일단 동영상 공개의 열쇠를 쥔 인물부터 찾아보자고.”

강은영은 여전히 투덜투덜했지만, 문제의 인물을 찾는 작업에는 동참하기로 했다.

“특정된 인물을 찾는 게 아니면 힘들 수도 있어요.”

“일단 관련 자료는 다 줄 테니까 한 번 해봐.”

유지훈이 크리스털 박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강은영에게 넘겨줬다. 크리스털 박의 시신과 심장까지 보여줬다.

강은영이 심호흡하더니 특성 내비게이터를 일으켰다. 한참 동안 집중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인물이 특정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그렇겠네. 혹시나 해서 도움을 청한 건데···.”

미안해하는 유지훈을 씁쓸한 표정으로 마주하던 강은영이 돌연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감고 특성을 재차 끌어올렸다.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요?”

“뭐가?”

“저 시신이랑 심장. 크리스털 박이라 그러지 않았어요?”

“맞아. 내가 저렇게 만들었어.”

강은영이 미간을 잔뜩 좁혔다.

“크리스털 박이 죽지 않은 것으로 나와요. 생명의 징후가 있는 것으로···.”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허상과 실체

“내 특성은 크리스털 박이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고요.”

강은영의 돌발적인 한 마디가 엄청난 파문을 예고하고 있었다.

강은영의 특성 내비게이터는 특정 인물의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파악되지 않는 인물은 정보가 잘못됐거나 죽었다는 의미. 반대로 죽은 인물은 존재 자체를 감지할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 강은영은 크리스털 박의 존재가 감지된다고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 봐.”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다만 크리스털 박의 존재는 감지돼요. 흐릿하지만 감지되는 건 분명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