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될 게 전혀 없는 상황으로 파악됐다. 예정대로 모든 계획을 진행하도록 하라.]
“박 여사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는데···?”
[바뀐 것 아무것도 없다. 본국 각성자들은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외교관 신분 역시 보장된다. 예정된 지원도 변함없을 것이다.]
“한국의 귀환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부분은···?”
[귀환자 유지훈은 살아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본국으로 데려오도록. 단, 다른 계획에 방해 요인이 되면 제거해도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차질없이 추진하겠습니다.”
***
뜻하지 않은 걸림돌
“아직 어디로 연락이 가는지 파악되지 않은 건가요?”
12시간 동안 매달렸지만, 동영상 공개의 열쇠를 지닌 존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유지훈의 신속한 활약 덕분에 크리스털 박의 심장은 순조롭게 확보했지만, 조사는 더디기만 했다.
“첨단 기술이 개입됐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특성과 연관된 문제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윤성의 낯빛은 어두웠다.
심장 박동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멈추는 건 시간문제였다. 언제 이상 박동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곧바로 동영상들이 만천하에 공개될 터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 수십 명의 지저분한 동영상이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널리 널리 퍼져나갈 텐데. 국가적인 망신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으로 치달을 형편이었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당연히 심장이나 심장으로 연결된 신경에 첨단 기기가 설치됐을 것으로 예상하고 진행한 작전이었는데···.”
이윤성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눈앞엔 가슴이 훤히 열린 크리스털 박의 시신이 있었다. 한쪽 옆 대형 시험관 안에선 박동을 유지하는 심장이 보관돼 있었다.
의료진과 첨단 IT 요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사에 여념이 없었다. 심장 주위 신경을 헤집어놓다시피 했지만, 단서는 찾지 못했다. 다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심장 박동은 언제까지 이상 없이 유지되는 겁니까?”
유지훈의 표정도 무거웠다.
주어진 임무는 훌륭하게 완수했지만, 결과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형국이었다.
괜스러운 책임감에 가슴이 묵직했다.
“길면 24시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더 당겨질 수도 있고요. 심장 내부에 통신 장비가 설치됐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거든요.”
“그 말씀은 심장을 가를 수도 있다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상 박동이 불가피해질 겁니다.”
불현듯 궁금했다.
왜 이런 작전을 계획하게 됐는지.
거기로 돌아가면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 연락이 가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죠?”
“크리스털 박의 최측근 중에 우리 쪽으로 돌아선 분이 있었습니다. 아킬레스건이 될 만한 정보들을 많이 넘겨줬는데···.”
“그분한테 알아보면 되지 않나요?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이윤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거됐습니다. 배신자로 낙인찍혀서요. 탁세현 초인 손에···.”
“저런···.”
“그분이 넘겨준 정보는 대부분 정확했습니다. 심장 문제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성급하게 접근한 제 실수입니다.”
첨단 장비가 아닌 특성과 연관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이윤성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특성이면 어떤 특성일까? 정신 계열 특성일까? 아니면 신체 계열 중 신경에 국한된 특성?
만일 특성과 연관된 문제라면, 특성을 보유한 각성자가 심장 박동의 이상을 감지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텐데···.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말을 꺼내려는 찰나, 이윤성이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대통령님. 네.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이윤성이 서둘러 웃옷을 챙겨 입었다.
“대통령님께서 찾으셔서 가봐야겠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윤성이 총총히 떠났다.
유지훈은 하려던 중요한 말을 주워 담아야 했다. 반드시 말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실행에 옮겨도 될 일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왜요?]
“어디야?”
[본부에서 호출 와서 가고 있어요.]
“당분간 연락 끊고 잠수 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려고 했는데, 유지훈 씨 덕분에 들켰어요. 탁세현 초인 반병신 만든 거 본부에도 알려졌거든요. 유지훈 씨랑 나랑 살아있는 것까지 싹 들통난 거죠.]
“그래서 뭐래? 징계라도 한대?”
[그런 건 아니고요. 내막 보고하래요. 초인 하나가 사라지게 됐잖아요. 본부 입장에서 보통 사건이 아니에요.]
“보고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거야?”
[본부장님이 당장 달려오라고 하긴 했는데, 왜요?]
“일단 나한테 먼저 좀 와줘. 그대가 절실해.”
[내가 절실한 게 아니라 내 특성이 절실한 거겠죠. 누구 찾을 사람 있는 거죠?]
“이제 척하면 척이군.”
[알겠어요. 본부장님께는 대한민국 유일의 귀환자께서 호출했다고 말씀드릴게요. 끊어요.]
“잠깐! 어딘지 안 알려줬잖아.”
[유지훈 씨 있는 곳 주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어요.]
***
야마가토산업 각성자 그룹의 3조장 사이토 요시모리는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긴급 임무를 받았다.
한국의 신생 길드를 습격해 길드원들을 포획하라는 지시였다. 그와 함께 입국한 조원들 전원이 동원되는 중요 임무였다.
일본에서 출국할 때만 해도 다른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변경에 의아했지만, 충실히 임무만 수행하면 된다고 여겼다.
“너무 하찮은 임무 아닙니까? 조장님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임무 장소에 도착한 뒤 부조장 신타로 나가이가 투덜거렸다.
사이토 요시모리 또한 그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도착한 곳 영훈길드엔 기껏해야 레벨 2 각성자들이 다였다. 조원 모두 레벨 5 이상 각성자로 구성된 3조의 임무로는 하찮았다.
레벨 7 각성자인 사이토 요시모리에겐 격에 맞지 않는다는 부조장의 볼멘소리도 지극히 타당하다 할 수 있었다.
“하찮은 임무 같은 건 없다. 완수할 임무만 있을 뿐이다.”
단호하게 부조장을 꾸짖었지만, 사이토 요시모리 역시 조금은 맥빠진 기분으로 임무에 임했다.
[가급적 전원 생포하도록 하라. 중요한 존재를 손에 넣기 위해 인질로 활용할 인물들이다. 위험인물이 있을지 모르니 경계는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지령을 상기시키며 길드 주위를 살폈다.
차원 에너지까지 철저하게 감지했다. 고레벨 각성자는 없었다. 위험 요소가 없음을 수차례 확인한 뒤 영훈길드로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이토 요시모리 일당을 맞은 이는 엄덕대였다.
영훈길드의 창립 멤버로 집사 역할까지 도맡고 있었기에 낯선 손님의 방문에 앞장서 응대했다.
“너희들 우리와 함께 가야겠다. 하나도 빠짐없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신타로 나가이가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엄덕대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의 무리를 훑어봤다. 범상치 않은 기도의 사내들이 열 명이나 됐다.
엄덕대는 비각성자였지만, 유지훈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한 뒤 기도를 읽는 눈이 생겼다.
길드로 들이닥친 사내들이 심상치 않은 강자라는 점은 파악할 수 있었다. 길드원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나와 봐. 우리를 끌고 가겠다는 놈들이 왔는데.”
박형식부터 강민정까지 길드원들이 모여들었다. 원래 열 명이었지만, 유지훈과 강은영이 자리를 비워 여덟 명이었다.
사이토 요시모리 일당과 비교해 쪽수에서도 밀렸다. 물론 각성 레벨에서는 쪽수보다 한참 더 밀렸다.
“흥! 반항이라도 해보겠다는 거냐? 가소로운 놈들.”
“너희 같으면 가잖다고 순순히 끌려가겠냐? 게다가 여긴 우리 홈그라운드야. 똥개도 홈그라운드에선 먹고 들어간다고.”
박형식이 호기롭게 맞섰다.
그 역시 눈앞의 사내들이 길드원들보다 한참 위 레벨의 강자들임을 감지했다. 그렇다고 그냥 끌려갈 순 없었다.
유지훈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유지훈은 레벨은 넘을 수 있는, 아니 넘어야 하는 벽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한 달여 단련을 통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당할 때 당하더라도 맞붙어 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거기에 믿는 구석이 하나 더 있었다.
“순순히 따라오너라. 그럼 다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하는 것 보니까 쪽발이 아니야? 야! 남의 나라 와서 행패 부리지 말고 당장 꺼져.”
외팔이 검객 이상목이 거친 어조로 맞섰다.
영훈길드에 합류하기 전까지만 해도 점잖았던 이상목이었지만, 지독한 수련 과정을 겪으면서 과격해졌다.
좌수로 펼치는 삼재검법 또한 제법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한 놈 정도 시범 케이스로 만져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신타로 나가이가 사이토 요시모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조원들의 출수 허가를 구하는 눈짓이었다.
사이토 요시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타로 나가이가 일행 중 가장 젊은 청년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에하라 군!”
“네!”
“죽여서는 안 되니 특성은 자제하도록.”
“네!”
청년 우에하라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이상목도 검으로 기수식을 취하며 맞섰다.
서로를 탐색하는 짧은 긴장의 시간이 흐른 뒤, 먼저 출수한 이는 이상목이었다.
“타핫!”
삼재검법 중 가장 위력적인 초식인 청룡탐조와 백사토신, 맹호희산을 연달아 전개했다.
빠르고 매서웠다. 정확한 동작에 묵직한 힘도 실려있었다.
우에하라가 연신 뒤로 밀렸다. 제대로 검을 뻗어보지도 못했다.
그는 레벨 6의 각성자였다. 3조 조원 중 검에 가장 능했다. 저레벨 각성자에 외팔이인 이상목을 얕잡아봤다.
결과는 형편없이 물러서기만 하는 형국이었다.
이상목의 초식 전개는 물 흐르듯 유려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초식을 펼쳐 보였다. 투박하지만 부드러웠고, 예리하면서도 강맹했다.
그간 얼마나 피나는 수련을 거듭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한참 상위 레벨의 각성자를 상대로 우세를 점해갔다.
“오! 상목 형님 제대로인데!”
“역시 지훈 형님 말대로야. 레벨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거야.”
우에하라가 이를 악물었다.
분명 마나의 농도에선 우위였지만, 상대의 매서운 초식을 당해내지 못하는 국면이었다.
부조장은 특성 발동의 자제를 지시했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임을 직감했다. 특성을 아끼면 당하는 건 자신일 상황이었다.
특성 일렉트릭 쇼크를 발동했다. 수만 볼트의 전류를 검에 실었다. 매섭게 파고드는 상대의 검을 받아쳤다.
이상목 또한 상대의 검에 흐르는 전류를 감지했다. 그렇다고 검을 놓을 순 없었다. 공격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검을 놓았다가는 자칫 검에 실린 전류가 고스란히 몸에 작렬할 터였다.
임기응변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동안의 수련이 임기응변의 길을 터주리라 믿었다. 본능에 맡겼다.
검의 방향을 비틀었다. 검면으로 상대의 목을 후려치려 했다.
상대 또한 검의 방향을 바꿨다. 이상목의 검면을 검면으로 받아치는 반격을 가해왔다.
‘기회다!’
콰지직!
검면이 충돌하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사이, 이상목은 검을 상대에게 내던졌다. 동시에 유지훈이 가르쳐준 신법을 변용한 발차기로 상대의 복부를 가격하려 했다.
하지만. 발을 내뻗으려는 찰나, 가슴을 강타한 전기 충격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검은 놓았지만, 순간적으로 팔을 타고 온 전류가 가슴에 충격을 가한 것이었다.
우에하라의 특성 일렉트릭 쇼크가 통한 순간이었다.
“으으···.”
이상목이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원통했기에 나오는 신음이었다.
한쪽 팔을 잃지 않았으면, 검을 놓고 역습하는 과정이 훨씬 빨랐을 텐데. 특성까지 끌어들인 레벨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을 텐데.
“가소로운 놈들. 이제 우리의 무서움을 알았느냐. 앞으로 덤비는 놈에겐 죽음을 선사해줄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닥쳐라! 쪽발이 놈들 위협 따위 두렵지 않다.”
“누가 죽음 따위 두려워할 줄 알아.”
신타로 나가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길드원들의 대응은 한층 강렬해졌다. 이상목의 선전이 투지를 불러일으킨 덕분이었다.
“어쩔 수 없군. 두어 놈 정도는 죽일 수밖에. 대여섯으로도 인질로서 가치는 충분할 테니.”
사이토 요시모리가 조원들에게 명령했다.
“놈들을 제압해라. 부상은 얼마든지 입혀도 좋다. 두 명까지는 죽이는 것도 허용한다.”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사이토 요시모리 일당이 출수에 나서려는 순간, 허허로운 웃음이 공간을 잠식해 들어왔다.
일당의 앞을 여유롭게 웃음 짓는 미중년이 가로막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어느 틈에 나타났다.
미중년은 일렉트릭 쇼크에 당한 이상목이 놓아버린 검을 주워 들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뇌기를 사용하는 놈이라···. 재미있군.”
미중년의 시선이 사이토 요시모리 일당을 향했다.
옅은 웃음기가 실린 그윽한 시선이었다. 거역하기 힘든 기세가 담긴 시선이기도 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도장 깨기 하러 다니는 흑도 악적들인가?”
무림의 무신 화무결이 21세기 전장에 출도한 순간이었다.
무림 천하제일인의 21세기 재림
사이토 요시모리는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미중년. 기척도 없었는데 어느 틈에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외모는 40대 중반이었지만, 분위기는 노회한 고수였다. 마나가 감지되지 않았음에도 초인의 기세가 느껴졌다.
허허로운 웃음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각성자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묵직한 기운은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