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50)

“절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자리 지키겠습니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밖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통령이 왔다고 여긴 참석자들이 복장을 단정히 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크리스털 박은 컴팩트를 꺼내 화장을 살피기까지 했다.

이윽고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면담 장소로 들어선 사내를 확인한 참석자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짧은 경악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아! 누구···?”

대통령 대신 나타난 낯선 청년의 모습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단 한 사람, 탁세현만 빼고.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왜? 지옥에서 돌아온 저승사자라도 만난 것 같아?”

경이로운 반전

“그러기에 상대를 제대로 파악했어야지. 띄엄띄엄 처리하고 사라져버렸으니 마무리가 됐겠어?”

유지훈이 비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탁세현을 쏘아봤다.

탁세현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분명 이 손으로 네놈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는데···.”

“알게 뭐야.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네 눈앞에 서 있잖아?”

탁세현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눈매를 한껏 일그러뜨린 채 유지훈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승사자는 만났어. 아직 때가 안됐다고 보내주더라고. 대신 탁세현이란 놈부터 먼저 보내달라고 하던데?”

“건방진 놈!”

탁세현이 출수하려는 찰나, 크리스털 박이 만류하고 나섰다.

“당신이 유지훈이라는 귀환자인 모양이군요. 초인님과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유지훈 씨가 올 장소가 아니에요. 대통령님과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자리예요.”

“아항. 그쪽이 박순덕이라는 술집 사장인 모양이군. 그런데 어쩌지? 대통령님은 여기 안 오시는데. 지금 청와대에서 외무 회담 관련해서 회의를 주재하고 계실 거야.”

“뭐라!”

크리스털 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투 또한 반말로 바뀌었다.

“너!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어떻게 들어오긴. 걸어서 들어왔지. 느긋하게.”

느물느물한 유지훈의 대답에 크리스털 박은 미간을 좁혔다.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뜻하지 않은 상황인 듯했다.

“아아. 밖에 여기저기 숨어 있던 애들 때문에 그러는 건가?”

유지훈이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크리스털 박에게 던졌다.

사뿐히 날아간 종이가 탁자 위에 차분히 놓였다. 적힌 글자들이 정확히 보이도록 크리스털 박 바로 앞이었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려는 데 방해하더라고. 좀 심하게. 어쩌겠어. 처치해야지. 나 역시 좀 심하게 다뤄줬어.”

“이, 이게 무슨 짓···.”

크리스털 박 앞에 놓인 종이는 대통령의 직인이 찍힌 자기면책권 증명서였다.

크리스털 박 또한 자기면책권을 모르지 않았다. 탁세현이 자기면책권을 활용해 그녀의 악행에 큰 도움을 주곤 했으니.

물론 유지훈에게 자기면책권이 부여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최측근 중에 둘이나 유지훈의 자기면책권에 당한 상태였다.

“걱정마. 딱 거기 적힌 대로 했거든. 죽은 놈은 없어. 대신 앞으로 박순덕 씨 주위에 얼쩡대는 일도 없을 거야. 다시는 팔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줬거든.”

“죽여버리겠다!”

마침내 탁세현이 출수했다. 노기 충천한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지훈에게 당한 이들 모두 그가 아끼던 수하들이었다. 직접 무예를 가르친 제자들이기도 했다.

특성 플래시를 발동해 유지훈을 덮쳤고, 기세를 몰아 검까지 내질렀다. 일격필살의 태세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탁세현의 필살기에도 유지훈은 여유롭기만 했다.

일단 반사기로 반응했다. 플래시에는 플래시였다.

순간 이동과 동시에 내지른 탁세현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유지훈은 반사기로 발동한 순간 이동으로 탁세현의 뒤에 자리했다.

“느려. 느려도 너무 느려.”

탁세현이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어느 틈에 유지훈은 사라지고 없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탁세현이 다시금 플래시를 발동했다. 이번에는 발동 전에 검부터 내질렀다. 당도와 동시에 검을 꽂아 넣겠다는 의도였다.

역시나 유지훈은 반사기로 맞섰다. 탁세현의 검은 여지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탓인지 휘청하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유지훈의 위치는 탁세현의 바로 뒤였다.

“여전히 느려. 좀 더 빨리해볼 수 없겠어?”

탁세현도 유지훈의 움직임을 읽었다. 뒤에 자리 잡을 거란 예측 하에 검을 역수로 쥐고 후방을 향해 거세게 찔러댔다.

유지훈이 또 하나의 특성을 발동할 시점이었다. 21세기로 귀환하면서 얻은 특성, 심검(心劍)이었다.

오른손이 거무스름한 빛으로 휩싸이더니 이내 묵빛 광휘를 뿜어내는 검이 찬란한 자태를 드러냈다.

“검은 함부로 휘두르는 게 아니야. 특히나 역수로 쥘 때는 치명적인 역습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어야지.”

유지훈의 심검, 빛의 검이 맹렬하게 찔러 들어오는 탁세현의 검을 결대로 받아쳤다.

싸악! 서걱!

빛의 검이 탁세현의 검을 그대로 갈라버렸고, 여세를 몰아 어깨까지 잘라냈다. 자루만 남은 검을 쥔 탁세현의 오른손이 팔과 함께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탁세훈이 어깨를 감싸 쥔 채 몸을 날렸다. 이번엔 공격 목적이 아니었다. 피하기 위해 플래시를 발동했다.

유지훈에게 자비는 없었다. 다시금 반사기로 뒤를 따랐다. 이번엔 뒤쪽이 아닌 전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으로 흥한 자가 검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어?”

“······.”

“어떻게 되긴. 얻어터지는 거지. 그러니 일단 좀 맞자.”

구타가 시작됐다.

무림을 제패했던 유지훈의 박투술이 탁세현에게 펼쳐졌다.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이 쉴새 없이 작렬했다. 플래시로 도주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반사기로 뒤쫓으며 구타를 이어갔다.

탁세현의 전신이 피로 흠뻑 젖은 다음에야 구타가 중단됐다.

탁세현은 엎어진 채 숨을 헐떡였다. 대한민국 서열 2위 초인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 그만 해요. 내가 물러날게요. 대통령님 뵙지 못해도 돼요. 요구했던 것들도 다 없었던 것으로 할게요.”

크리스털 박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했지만, 여기서 끝낼 유지훈이 아니었다.

“그런다고 지금까지 악행들이 사라지나? 초인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저지른 더러운 행태들. 국정을 농단한 범죄였어.”

유지훈이 천천히 탁세현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엎드린 자세로 고개를 처박고 있던 탁세현이 움찔했다. 유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볍게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 소멸기가 작렬할 시간이었다.

6초. 초인답게 지금까지 소멸기를 작렬시킨 상대 중 가장 길었다.

뭔가 이상한 기운의 잠식을 감지했는지, 탁세현은 힘겹게나마 저항하려 했다. 억센 유지훈의 손아귀를 뿌리칠 수 없었다.

소멸이 완성됐다. 탁세현을 들어 올려 멀찍이 내던졌다.

크리스털 박이 탁세현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오라버니. 정신 좀 차려보세요. 플래시를 사용해서 같이 도망쳐요. 일단 여기만 벗어나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어요.”

탁세현이 어렵사리 정신을 차렸다.

크리스털 박을 끌어안은 채 플래시를 발동하려 했다.

작동하지 않았다. 안간힘을 썼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유지훈을 노려봤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응. 별일 아니야. 초인으로 악행 저지르며 살았으니, 초인 아닌 상태로 고통 좀 받으면서 죗값 치르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던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긴 몸이 너무 멀쩡한가? 오른팔 하나 날려서는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네.”

유지훈이 펄쩍 뛰어올랐다. 묵직한 기세로 탁세현의 왼쪽 다리 위에 착지했다. 지그시 무릎을 짓이겼다.

콰드득!

“크아아악!”

탁세현의 무릎이 으깨져 조각났다.

탁세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각성을 상실한 데다가 한쪽 팔이 날아가고,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됐다. 초인으로 추앙받고 군림하던 탁세현의 삶이 비루함의 늪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생각 같아서 네가 나한테 했던 짓이랑 똑같이 심장에 검을 박아넣어 주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자기면책권으로 커버가 안 될 것 같아서. 남은 인생 힘없이 사는 게 어떤 건지 경험해 봐.”

크리스털 박이 탁세현을 부여안고 오열했다. 원독을 품은 눈빛으로 유지훈을 노려봤다.

“대통령이 시킨 거야?”

유지훈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크리스털 박이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당장 공개하겠어. 다 터트려버리겠다고!”

“그러든지 말든지. 내 영상은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유지훈이 코웃음과 함께 크리스털 박에게 다가갔다.

“터트려버리는 거 좋은데. 그전에 일단 죽어.”

심검을 일으켜 크리스털 박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튀어나올 듯 눈이 커진 크리스털 박을 향해 싸늘한 한 마디를 추가했다.

“심장만 남겨두고.”

유지훈의 심검이 크리스털 박의 가슴을 가르자마자, 일련의 사내들이 면담 장소로 뛰어들어왔다.

SSG 국장 이윤성이 이끄는 첨단 의료진이었다.

“서둘러 주십시오. 잠시라도 심장 박동이 멈춰선 안 됩니다. 평소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돼야 합니다.”

의료진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속하게 크리스털 박의 심장을 적출해냈다. 박동은 유지됐다. 계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물론 크리스털 박은 숨을 거뒀다. 원통한 듯 눈을 감지 못한 모습이었다. 나라를 손에 쥐고 흔들던 요녀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왠지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은 찝찝한 여운을 남기기까지 했다.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초인 탁세현이 폐인이 되고, 크리스털 박은 가슴이 갈라진 채 심장을 적출당했다. 참혹한 광경이 연달아 펼쳐진 셈이었다.

크리스털 박의 일행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와중에 여당 원내대표 신영호는 호기를 부려봤다.

물론 호기는 상대를 보며 부려야 했다. 유지훈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매만 벌 뿐이었다.

빠악!

유지훈이 신영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지금까지 다 봐놓고도 몰라? 국정 농단의 주역들을 처단했잖아.”

유지훈이 남은 네 사내를 죽 훑어봤다.

여당 원내대표, 행정안전부 장관, 청와대 정무수석 그리고 신화그룹 전 부회장···. 하나 같이 고위 권력자들이었다.

“여기 몰카 동영상 있는 사람?”

“······.”

대답은 없었다.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없어? 그럼 다들 자발적으로 국정 농단에 동참했다는 뜻이네? 그럼 처맞아야지.”

다시금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됐다.

부정한 권력에 기생해 나라의 등골을 빼먹던 자들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었다.

“나는 동영상 있어. 몰카 있다고요.”

뒤늦게 자백하는 이도 있었지만.

“응. 아니야. 이미 버스는 떠났어.”

응징은 계속됐다.

***

야마가토산업의 최연소 이사 야마구치 구니오는 예정보다 하루 일찍 한국으로 입국했다.

외무 회담 및 각성자 회합의 본격적인 진행을 앞두고 한국 내 조력자들과 사전 미팅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박 여사, 크리스털 박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야마구치 구니오는 ‘긴급’이라고 표시된 문자 한 통을 확인했다. 비행하는 도중에 와있던 문자였다.

[긴급! 박 여사 신변에 이상 징후 포착. 기존의 모든 계획은 가토 회장님과 상의 후 진행 요망.]

한국 정부 내에 심어둔 첩자가 보낸 문자였다.

크리스털 박은 이번 각성자 회합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였다.

일본 각성자의 입국부터 한국 내 자유로운 이동과 외교관 지위 부여까지 완벽한 편의를 지원하고 있었다.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면 중요한 계획들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컸다. 무산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야마구치 구니오는 곧바로 가토 마사오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구니오입니다. 문자를 받았습니다. 회장님께서 결정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을 파악 중이네. 잠시 기다려보게.]

일단 전화를 끊었다.

나름대로 상황을 분석했다.

외무 회담은 그냥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딱히 걸림돌도 없었고, 요식적인 행사에 불과했다.

문제는 한일 각성자 회합이었다. 회합을 빙자하고 야마가토산업 각성자 그룹 조직원들이 벌일 각종 공작이었다.

비밀 프로젝트의 결과물 확보, 나카무라 형제의 복수, 신화그룹 재건 지원, 한국 유망 기업들의 핵심 기술 탈취 그리고 한국 귀환자···.

몇 가지는 난항에 봉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크리스털 박과 만나 향후 대응을 상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크리스털 박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니.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일본 각성자들의 한국 내 자유로운 이동과 외교관 신분 부여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계획을 취소해야 할 수도 있었다.

가토 마사오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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