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50)

“그렇긴 합니다만. 이자걸 대표는 비각성자라···. 신화길드 해체 이후 경호 인력 중에 고레벨 각성자도 없는 상태고요.”

“이자걸 문제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지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초인 서넛이 나서지 않는 한 이자걸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예요.”

“네? 그게 무슨···?”

“재앙급 몬스터를 처리한 놈이에요. 레벨 5 각성자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종이 찢듯이 찢어발길 놈이라고요.”

“네???”

“탁세현이 퇴치 실패했다던 거대악어요. 이자걸이 처치했어요. 덕분에 저랑 은영이 놈 뱃속에 안 들어가게 된 거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

“그 비밀 프로젝트 성공했거든요. 인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까지요. 실험 대상은 이자걸 본인이었고요.”

유지훈이 이자걸과 만나 나눈 대화들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이자걸이 이자웅을 죽이고 연구소와 함께 프로젝트의 모든 흔적을 날려버린 일, 완성된 결과를 독차지한 과정과 이유 그리고 유지훈과 손잡고 야마가토산업의 야욕을 분쇄하기로 한 것까지.

“이자걸 그놈 미친놈인 건 분명한데요. 하려고 하는 건 은근 마음에 들더라고요. 연구 결과를 독차지해서 일본에 빅엿을 먹인다나요.”

“그래서 유지훈 씨도 함께하시기로 한 겁니까?”

“그렇죠. 뭐. 그놈 혼자 하면 빅엿인데, 같이하면 그레이트 엿을 먹일 수 있다잖아요. 거절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허허허.”

이윤성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이자걸 대표가 다 인정했다는 거로군요. 비밀 실험과 이자웅 살해 그리고 모든 범죄 사실의 은닉까지 말입니다.”

“그렇긴 하죠.”

“그런데도 유지훈 씨는 이자걸과 손을 잡기로 하셨고요.”

“대화를 나누다가 말렸어요. 그게 다 대한민국을 위한 거라는데, 묘하게 설득력 있더라니까요.”

“하아. 이거 참 난감하군요.”

이윤성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스러운 눈치였다.

하긴. 공직에 몸담은 처지에 범죄자를 옹호할 순 없었다. 그것도 그냥 범죄자가 아닌 살인 폭발 등 거대 흉악범을.

그런데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심지어 재앙급 몬스터를 처치하기까지 했다. 어떤 의미에선 초인을 능가하는 활약이었다.

무엇보다 일본에 빅엿, 아니 그레이트 엿을 먹인다는데···. 이거야말로 귀가 솔깃한 내용이었다.

한참의 고심 끝에 이윤성이 입을 열었다.

“유지훈 씨 지금까지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셨죠?”

“네? 이자걸 관련해서···.”

“이자걸 대표가 위기라고 말씀드린 이후에 뭐라고 하셨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무슨 엿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

“하하하.”

이번엔 유지훈이 헛웃음을 터트릴 차례였다.

이윤성은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아무런 이야기도 들은 게 없습니다. 그러니 유지훈 씨는 엿을 드시든지, 먹이든지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일단 엿 문제는 잘 마무리해보겠습니다.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요. 이후엔 역시 대한민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계속 가도록 이자걸 놈을 가르치겠습니다. 두들겨 패서라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지훈 씨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자기면책권을 현명하게 활용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윤성은 끝까지 나몰라라로 일관했다.

그에게도, 유지훈에게도 최선의 대응이었다.

이제 남은 건 크리스털 박 그리고 탁세현과 관련된 문제였다.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과 관련해서 크리스털 박이 대통령님께 무리한 요구를 해왔습니다.”

“동영상의 강도가 세긴 센 모양이네요. 궁금해지네요. 언젠가 꼭 봐야겠어요. 뭘 요구했습니까?”

“일본 각성자들의 한국 내 이동을 자유롭게 할 것과 그들에게 외교관에 준하는 지위를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쪽발이 각성자들이 여기 와서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라는 의미로군요. 그래서 대통령님은 어쩐다고 하십니까?”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동 제한과 국내법의 엄격한 적용을 완강히 주장하고 계시는데···.”

“동영상을 가지고 협박하고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이윤성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지만, 유지훈은 그저 같잖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고 하세요.”

“네? 그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야죠. 안 따르면 죽여버리면 돼요. 대한민국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짓을 하는 놈들은 제가 다 죽여버릴게요. 그러니 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세요.”

“초인이 다섯이나 입국할 예정인데···.”

“더 와도 돼요. 까부는 족족 죽여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어떻게···?”

방법이야 많았다.

소멸기로 각성을 없애버려도 되고, 반사기로 특성을 되돌려줘도 될 일이었다.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특성도 있고.

다만 아직 공개할 시점은 아니었다.

“어떻게라고 물으시면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아! 직접 보여드리면 되겠네요.”

“네? 직접 보여주신다고요? 그거야말로 어떻게···?”

“해달라는 대로 해주더라도, 박순덕 문제는 매듭을 지어야죠. 대통령님께서 직접 만나서 정리하는 것으로 해주세요.”

“대통령님과 크리스털 박의 만남 말씀입니까?”

“네. 그럼 박순덕은 탁세현을 대동하고 오겠죠. 그 자리엔 대통령님 대신 제가 나갈게요. 둘 다 마무리하는 것으로···. 국장님도 같이 가서 보시면 어떻게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될 거예요.”

크리스털 박 제거를 가로막은 오랜 장벽 초인 탁세현.

유지훈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처리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

추가된 특성의 놀라운 효능 (1)

순조롭게 마무리된 줄 알았지만, 걸림돌이 남아 있었다. 이윤성이 뒤늦게 찾아냈다.

“크리스털 박이 만남을 거절하면 어떡하죠? 일본 각성자들도 숨어서 무언가를 하면 해결할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유지훈 씨에게 처치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요.”

일리 있는 우려였다.

크리스털 박은 늘 하던 대로 전화로만 요구 사항을 관철하려 할 수도 있었다. 만나서 대화로 풀어가자고 하면 나올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거절했을 때 끌어낼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크리스털 박은 조심성이 많은 여인입니다. 그동안 대통령님께선 크리스털 박이 만나자고 해도 피하곤 하셨습니다. 먼저 만나자고 하면 의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국가안전본부 인력이 총동원돼 그들의 행적을 좇을 터였다. 각성자 관련한 사고에 대비한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고레벨 각성자들이 작정하고 숨으면 추적이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뭔가를 도모해도 몰래 할 텐데, 이들의 행적을 정확하게 파악하긴 사실상 불가능했다.

“으음. 그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했네요.”

예기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지만, 뜻하지 않게 해결책이 찾아왔다.

강은영의 전화였다.

“어. 왜? 무결이가 무슨 이상한 소리 한 거야?”

[그게 아니고요. 유지훈 씨 지금 안마 의자 파는 데 있어요?]

“응? 그건 왜 물어?”

[어르신 이야기 듣다가 문득 유지훈 씨가 생각났는데요. 안마 의자 파는 곳에 있다고 머리에 떠올라서요.]

“그건 또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야···.”

핀잔을 주려다가 뇌리를 강타하는 생각이 있었다.

SSG의 비밀 사무실은 안마 의자 판매점으로 위장된 곳이었다.

[급한 일 있다고 나간 사람이 안마 의자 파는 데는 왜 갔나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아니면 끊을게요. 어르신 이야기가 다시 흥미진진한···.]

“아니야! 잠깐만 끊지 말아 봐. 혹시 이윤성 국장 어디 있는지도 머리에 떠올라?”

[잠시만요. 어! 변태 국장님도 안마 의자 파는 데 있는데요? 둘이 같이 안마 의자 사러 간 거예요?]

“위치, 위치는? 주소 같은 것도 떠오르는 거야?”

[서울 중랑구 동일로 92길···.]

“됐어. 일단 끊어 봐. 무결이랑 마저 놀고 있어. 다시 전화할게.”

해결책이었다.

귀환의 차원 이동 과정에서 강은영이 얻은 특성은 위치 탐지 능력이었다. 이를테면 인간 네비게이터.

전투력이 높아지진 않았지만, 쓰임새는 훨씬 커졌다고 할 만했다.

“국장님. 다 해결된 것 같습니다. 박순덕이 만남 거절해도 상관없게 됐습니다. 쪽발이 각성자 놈들도 숨어서 무슨 짓을 하든 다 찾아낼 수 있게 됐고요.”

“대체 어떻게···?”

“자세한 건 이번 일 다 마무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찾아야 하는 인물 정보만 확보해 주세요. 최근 사진이랑 신상 명세요.”

“그럼 대통령님과 크리스털 박의 만남은 추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추진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요. 성사되지 않더라고 방법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크리스털 박과 입국 예정인 일본 각성자들의 인물 정보를 확보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미 들어와 있는 각성자들의 정보는 지금 바로 드릴 수 있습니다.”

이윤성이 확보해둔 사진과 신상 자료를 넘겨주면서 물었다.

“이것으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바로 찾을 수 있어요. 우리에게 인간 내비게이터가 생겼거든요. 어디에 숨든 다 찾아낼 수 있는.”

다만 크리스털 박은 쉽게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얼굴이 계속 바뀐다고 했으니. 최근 사진을 확보하지 못하면 강은영의 특성 발동에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경우에도 명쾌한 대안은 있었다. 탁세현을 찾으면 될 터였다. 크리스털을 수호하는 탁세현을 제거하면, 크리스털 박은 끈 떨어진 연이나 마찬가지 신세가 될 테니.

***

이윤성의 우려대로 이자걸은 납치당했다.

퇴근길에 차를 타고 가던 중 괴인들의 습격에 의해서였다. 차에서 끌려 나와 다른 차에 태워졌고,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차로 한참 간 뒤 무언가로 갈아탔다. 출렁임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 배로 이동하는 듯했다.

도착한 곳은 서해 인근의 무인도였다.

이자걸은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의자에 앉혀졌다.

눈을 가렸던 안대가 풀렸다. 눈앞엔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세 사내와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이렇게 끌고 온 이유를 모르진 않겠지?”

세 사내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사뭇 위협적으로 물었다.

마흔 언저리로 보이는 사내였다.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깔끔한 용모. 대기업이나 정부 기관 같은 곳에서 근무하는 인물로 보였다.

한국말이 어눌했다. 일본인이 한국말을 사용하는 듯했다.

“바다를 건너온 것 같았는데, 설마 여기가 일본은 아니겠죠?”

이자걸이 능청스럽게 반문했다.

끌려왔음에도 여유롭기만 한 모습이었다.

“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사내가 이자걸이 앉은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가 넘어지면서 이자걸이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옷을 털며 일어나면서도 이자걸의 입가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살살들 하세요. 그렇게 나오면 내가 협조하려고 하겠어요? 신화전자 같은 대기업을 책임지는데 그 정도 강단은 있습니다.”

“네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

세 사내 중 체구가 큰 청년이 이자걸에게 손찌검을 가하려고 했다. 나이든 사내가 만류했다.

이자걸은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오! 오랜만에 보는 얼굴도 있군요. 반갑네요.”

야마가토제약에서 신화길드로 파견 나왔던 연구원 둘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본으로 귀국한 것으로 알려진 연구원들이었다. 한국에 남아 뭔가 은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지훈이 빙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기운도 느껴지는군요. 아기 때 만났던 녀석들 같은데, 성체가 다 된 모양입니다.”

몬스터의 기운이었다.

야마가토제약 연구원들이 몰래 빼돌린 유체 몬스터들. 무인도에서 키워 이제는 재앙급에 가깝게 성장한 변종 몬스터들이었다.

“대표님도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럼 순순히 협조하십시오. 안 그러면 놈들의 먹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연구원이 당부조로 말했다.

한때 함께 연구하며 친분을 쌓았던 인물이었다. 좋게좋게 마무리하고 싶은 눈치였다.

이자걸이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래도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해주시네요. 고맙군요.”

이자걸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죽 훑어보는 여유까지 보였다. 비소를 머금은 말투로 한마디 던지기까지 했다.

“사람을 이렇게 끌고 오길래 야쿠자가 아닐까 했는데, 다들 멀끔하게 생기셨네요. 엘리트 회사원 같은 인상이에요.”

“우리는 아니지만, 저들은 야쿠자들이다.”

나이든 사내가 뒤쪽에 무리 지은 자들을 가리켰다.

역시 정장을 잘 갖춰 입긴 했지만, 분위기는 다소 험악했다.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저들에게 맡길 것이다. 모르긴 해도 손가락부터 자르고 시작하겠지. 다음엔 발가락, 그래도 안 되면 팔목···.”

나이든 사내에 이어 덩치 큰 청년이 윽박질렀다.

“우리가 원하는 게 어디 있는지 말해라. 그러면 몬스터의 먹이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해주겠다.”

“그게 그렇게 되나요? 살려준다고 해도 말할까 말까인데···.”

“얼마나 잘 협조하는지에 따라 살려줄 수도 있겠지. 물론 야마가토산업에 끼친 피해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겠지만.”

이자걸이 짧게 한숨을 토해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별수 없군요. 나도 살아야 하니. 그전에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을까요? 뭔가 하고 싶어도 지금은 목이 너무 마르네요.”

나이든 사내가 연구원을 향해 눈짓했다.

연구원이 플라스틱 물병을 이자걸에게 건넸다.

이자걸이 물병을 받아든 뒤 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꺼냈다.

“내가 심장이 좀 안 좋아서요. 지금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을 지경이에요. 그럼 뭔가 하기 곤란하겠죠?”

알약을 입에 털어 넣은 뒤 물을 들이켰다.

표정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자 그럼 이제 말해라.”

덩치 큰 청년의 위협적인 요구에 유지훈이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팔목에 찬 시계, 스마트워치를 가리키는 동작이었다.

“여기 있어요. 당신들이, 아니 야마가토의 탐욕스러운 불한당들이 원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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