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야. 거기서 여기 오면 기이한 능력이 하나 생긴다고 했잖아. 너한테 생긴 능력이 환골탈태인 모양이다.”
“환골탈태?”
그제야 화무결이 자신의 몸 곳곳을 살펴봤다.
달라진 몸을 깨달았다. 분위기는 노인이었지만, 확연히 달라졌다.
“대충 사십 언저리라고 해도 믿겠다.”
“으음. 아쉽군. 반로환동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됐어. 괜히 와서 어린아이 취급당하는 것보다 그 정도가 딱 좋아.”
유지훈이 청바지와 셔츠를 툭 던져줬다.
“이거나 입어. 처음엔 좀 어색할 수 있겠지만, 입다 보면 저 동네 옷보다 훨씬 편할 거야.”
화무결이 청바지를 만져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지퍼 부분을 유심히 살피기도 했다.
“모양이 참 독특하군. 재질도 몹시 기이하네. 빳빳한데 이토록 탄력이 있다니···.”
티셔츠는 어떻게 입는지 모르겠는지 이리저리 돌려보기만 했다. 유지훈이 나서서 입혀줘야 했다.
입혀놓고 보니 제법 근사했다. 봉두난발의 머리와 수염만 잘 다듬으면 영락없는 미중년이었다. SSG 이윤성 국장을 능가할 듯했다.
“야! 너 잘 하면 이 동네에서 먹어주겠다.”
“먹어준다고? 뭘 먹어준다는 말인가?”
“아 그게 그러니까···.”
설명하려는 찰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악!”
물론 강은영이었다.
몸을 새우처럼 만 채 유지훈과 화무결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두 사람은 옷을 입고 있는 거죠? 왜 나만 홀딱 벗겨 놓은 거예요?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하아. 또 시작이네. 옷을 입었으니까 입고 있지.”
“먹어준다는 것 같던데, 나한테 한 말이에요? 두 사람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유지훈이 옷을 던져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책임질 일 한 거 없으니까 이거나 입어. 서둘러 가자. 할 일 많다.”
***
일단 목적지는 영훈길드였다.
볼일은 화무결부터 내려놓은 뒤 처리해야 했다.
“형님. 어디로 잠수타셨다가 오신 겁니까? 어제 형님 찾는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습니다.”
엄덕대가 달려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화무결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이 오신 멋진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말입니다.”
예사롭지 않을 만도 했다.
봉두난발에 덥수룩한 수염,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노숙자에게 아무 옷이나 입혀놓은 인상이었지만, 형형한 눈빛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눈에 확 띄는 외모였다.
“어. 내 친구야. 너희들 무술 사범으로 모셔왔다.”
“네? 형님 친구라고요? 형님보다 열댓 살은 많아 보이는데요?”
“시끄러. 친구라면 친구인 줄 알아. 그나저나 미용실 아는 데 있으면 출장 좀 와달라고 해라. 이 친구 싹 관리 좀 하게.”
“미용실은 민정이가 잘 알 겁니다. 바로 하라고 하겠습니다.”
엄덕대가 화무결에게 넙죽 인사하더니 부리나케 달려갔다.
화무결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오는 길에 유지훈이 그러라고 했다. 어느 정도 현대 문물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말수를 줄이라는 주문이었다.
유지훈이 강은영에게 물었다.
“지금 당장 국가안전본부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지?”
“그렇진 않아요. 그래도 연락 오면 바로 달려가야 해요.”
“그럼 여기서 이 친구 옆에 붙어서 이 동네에 적응하는 법 좀 일러줘. 길드 애들이랑 인사도 시켜주고.”
“왜요? 어디 가요?”
“어. 이윤성 국장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서.”
휴대폰을 보니 이윤성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스무 통이나 됐다. 길드 사무실로 전화해 유지훈을 찾은 것도 이윤성일 터였다.
“탁세현 초인 관련한 문제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자세한 건 다녀와서 알려줄게.”
화무결에게도 당부했다.
“너도 당분간 여기 문물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어디 돌아다니지 않는 것으로 하자. 은영이랑 우리 애들이 도와줄 거야.”
“그래도 가볍게 산책 정도 하는 건 괜찮지 않겠나? 뭘 봐야 익숙해지고 적응할 게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강은영을 바라봤다.
“알았어요. 내가 한 번 모시고 나갔다 올게요. 덕대 씨나 형식 씨한테도 잘 일러두고요.”
“그래. 부탁 좀 할게. 저 친구 사고나 치지 않을지 걱정이야.”
화무결이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사고를 칠 사람인가? 나처럼 반듯한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
“그래서 더 걱정이야. 무림에서 어울리지 않게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다가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거잖아. 제대로 비뚤어질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지.”
화무결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왠지 ‘원 없이 비뚤어질 테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말은 잘 통하냐?”
“신기하게도 잘 들리고, 술술 나오는군.”
“잘됐네. 애들이랑 인사하면서 어떤 무공이 어울릴지 면담도 해줘. 다들 네 제자가 될 거니까.”
“늘그막에 제자를 여럿 얻게 됐군. 즐겁게 가르치겠네. 아. 자네 내자 또한 내 제자라 할 수 있겠지?”
“하아···. 니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 이윤성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차원 이동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특성을 확인할 시간이기도 했다.
***
유쾌한 폭풍전야
“아이고. 아무 문제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SSG 국장 이윤성은 평소답지 않은 호들갑으로 유지훈을 반겼다.
유지훈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일 없을 거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시라고 했잖아요.”
“들려오는 소식들이 여간 흉흉했어야 말이죠. 게다가 일은 또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
이윤성이 유지훈의 잠적 기간, 그러니까 무림을 다녀온 열흘, 여기 시간으로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탁세현 초인이 국가안전본부에 퇴치 작전 실패를 보고했습니다. 문제의 거대 악어가 재앙급이었다는 핑계를 곁들여서 말이죠.”
탁세현은 유지훈의 가슴에 검을 꽂은 뒤 국가안전본부에 연락을 취했다. 퇴치에 실패하고 쫓겨왔다는 내용이었다.
동행한 유지훈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거대악어에게 희생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측만 전했다. 아울러 강은영이 현장에 왔는데,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재앙급일 수 있음을 배제하고 섣불리 나섰다가 실패했다고 자인했습니다. 실패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흐음. 대인배 행세를 해서 나를 죽이고 은영을 죽게 내버려 둔 사실을 묻히게 하겠다는 수작이군요.”
“강 국장님도 무사하신 거죠?”
“멀쩡해요. 오히려 더 건강해졌어요.”
그때 뭔가 긴급한 생각이 유지훈의 뇌리를 스쳤다.
“잠시만요. 전화 한 통 해야겠어요.”
바로 강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요? 어르신이랑 놀아드리느라 정신없어요.]
“혹시 국가안전본부에서 연락 안 왔어?”
[왔어요. 숱하게 와 있었고, 계속 왔어요.]
“받았어?”
[안 받았어요. 어르신이랑 노느라 정신없어서.]
“잘했어. 혹시 은영이 연락하거나 하진 않았지?”
[안 했어요. 어르신이랑 노느라 정신없어서.]
수화기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내가 몬스터한테 당한 것으로 돼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상태로 둬야 유지훈 씨가 뭔가 도모하기 유리해서요?]
“어! 그걸 어떻게···?”
[나 바보 아니에요. 국가안전본부 국장 자리 제비뽑기로 올라온 거 아니라고요. 2, 3일은 연락 끊고 여기서 농땡이나 피울 거예요.]
“그래그래. 잘 하고 있어. 그나저나 무결이는 잘 있나? 애들 무공은 좀 봐주기 시작했어?”
[방금 머리랑 수염 싹 정리했어요. 일단 애들 모아놓고 정신 교육부터 시작했어요.]
“정신 교육?”
[무림에서 유지훈 씨가 얼마나 혹독하게 수련했는지 뭐 그런 이야기요. 애들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고 있어요.]
“뭐! 무림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했단 말이야? 그 자식이 미쳤나.”
[뭐 어때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요. 애들한테 밖에 나가서 하지 말라고 입단속은 시켜뒀어요.]
“입단속 확실하게 해. 우리끼리야 괜찮지만, 아직은 외부로 알려져선 곤란해.”
[알았어요. 그런데 알려져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해요. 믿어져야 말이죠. 애들도 무협 소설 읽는 것처럼 듣고 있어요.]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무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믿기 힘든 판에 거기서 왔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어르신 말씀을 어찌나 재미있게 하시는지 다들 넋을 잃고 듣고 있어요. 어르신 인물도 근사하시니 방송가로 진출하셔도 될 것 같아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길래···.”
[다 유지훈 씨 이야기죠. 초창기라 그런지 흑역사가 좀 많네요.]
“뭐! 야! 무결이 바꿔 봐.”
[됐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대목이에요. 유지훈 씨가 요녀한테 홀려서 침상으로 기어들어 간 순간이에요. 끊을게요.]
“야! 끊었어? 야!”
끊었다.
유지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괜히 데려온 것 같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이윤성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유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영훈길드에 무술 사범을 하나 초빙했는데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요.”
“어떤 분이길래···.”
“차차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국장님도 아셔야 하는 놈이라. 조만간 자리 만들겠습니다. 그전에 하던 이야기부터 마저 하시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왔다.
탁세현의 수작과 그와 연관돼 이어진 급박한 전개였다.
“국가안전본부에서 대규모로 수색대를 꾸려서 현장으로 출동했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차원 에너지도 감지되지 않았고요.”
“차원 에너지가 감지되지 않았다는 말은···?”
“몬스터가 사라졌다는 의미죠. 어딘가로 자취를 감췄거나, 아니면 죽었거나. 자취를 감췄으면 차원 에너지라도 감지됐을 텐데···.”
“푸훗.”
유지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죽은 게 맞을 거예요.”
“아! 유지훈 씨가 처치하신 겁니까?”
“저는 아니고요. 괴물 하나 있어요. 자칭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괴물이요. 그놈에 대해서도 차차 말씀드릴게요.”
“흐음. 궁금증만 쌓이는군요. 좋습니다. 당장은 집중해야 할 사안들이 산적해 있으니···.”
유지훈과 탁세현의 합동 작전에 대해서는 여기까지였다.
이제 새롭게 초래되고 있는 혼란에 관해 이야기할 때였다.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 일자가 당겨졌습니다.”
“언제로요? 외무 회담은 열흘 후 아닙니까?”
“한일 외무회담은 예정대로 열흘 후지만, 각성자들은 1주일 앞서 들어오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흘 뒤입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로군요.”
유지훈이 담담하게 반응했다.
이윤성은 한층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첨언했다.
“이미 일본의 각성자가 국내에 잠입해 있다는 첩보도 입수됐습니다. 세 명 확인된 상태입니다. 레벨 5 수준이긴 한데, 일본 내각 정보조직의 비밀 요원으로 파악되고 있어서···.”
“레벨 이상의 뭔가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네요.”
“그렇습니다. 그들이 도모하는 바도 어느 정도 알아내긴 했습니다.”
“그게 뭔데요?”
“두 사람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자걸 신화전자 대표와 유지훈 씨입니다.”
“나를요?”
유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를 왜요? 나카무라 형제 복수 때문인가? 큰놈은 마철진 영감님이 죽였잖아요. 작은놈은 자살했고.”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야마가토산업이 유지훈 씨가 귀환자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듯합니다. 일본으로 데려가려는 의도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야마가토 놈들은 내가 죽은 것으로 돼 있는 걸 모르나? 박순덕이 거기까진 알리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긴 알리기 뭐할 수도 있겠네요. 야마가토가 노리는 걸 방해한 결과가 될 테니까요.”
야마가토산업이 이자걸을 노리는 이유는 두 측면에서 분석됐다.
야마가토산업의 한국 내 하수인 노릇을 해왔던 신화그룹의 해체 시도에 대한 응징 그리고 야마가토제약과 신화길드의 비밀 실험 프로젝트 결과의 확보일 터였다.
“이자걸 대표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리 들어온 자들이 이미 손을 쓴 게 아닌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걔들 레벨 5라 그러지 않으셨어요? 세 명 정도라고 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