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페르시아도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라 생각됐다. 이 무렵 페르시아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강대국이었을 터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21세기로 돌아가 할 일이 많았다.
“지금은 좀 곤란하고. 나중에 바쁜 일 다 처리한 다음에 생각나면 가든지 할게.”
“감사합니다. 언제든 오셔서 위지천을 찾아주십시오. 성심을 다해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웨이터야? 찾긴 뭘 찾아···.”
“네?”
“아니야. 어서 가기나 해.”
위지천이 남은 흑의인들을 이끌고 떠났다.
서로 간에 할 말이 많은 세 사람만 남겨졌다.
“자네가 또 강호를 구했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잠깐 다녀갈 생각이었는데.”
“바로 돌아갈 참인가? 중원 무림의 은공을 강호의 동도들에게 널리 알려야 할 텐데 말이야.”
“귀찮아. 그냥 여기선 무림공적으로 남을래.”
강은영의 새로운 특성에 대해서도 정리가 필요했다.
“어때? 할 만해?”
“할 만하고 뭐고도 없어요. 그냥 생각한 대로 다 돼요.”
“좀 더 열심히 단련해봐. 더 많은 무기도 다룰 수 있을 거야.”
강은영의 새로운 특성. 무림 용어로는 이기어검(以氣馭劍).
일종의 염동력일 터였다. 어떤 성질의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 했다. 눈치를 보니 모든 물체가 대상은 아닌 듯했다.
“움직일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도 잘 파악해 봐. 예를 들면 사람의 몸이라든가···.”
“그건 잘 안 되는 것 같은데요.”
강은영은 눈을 부릅뜬 채 유지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지훈을 상대로 시험해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다쳐. 나한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잖아.”
“아. 그렇군요. 큰일 날 뻔했네.”
“그나저나 원래 지니고 있던 특성은 뭐야?”
강은영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이언 피스트라고요. 주먹이 무쇠처럼 단단해져요. 어지간히 단단한 물건은 다 부술 수 있을 정도로요.”
“여자한테는 별로 안 어울리는 특성이네. 지연이 특성 같은 게 우아하고 좋은데···.”
“그래서 잘 안 쓰게 되더라고요. 국가안전본부에 합류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강은영이 멋쩍게 웃었다.
유지훈은 정색했다.
“영훈길드 마스터가 그런 거 가려서 되겠어? 단련해. 철권. 돌아가면 다 때려 부순다는 각오로.”
이기어검에 철권이면 강은영은 단숨에 레벨 7 각성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터였다. 거기에 돌아갈 때 특성 하나가 더 생기면···.
유지훈이 화무결에게 요청했다.
“쟤한테 권법 좀 가르쳐 줘.”
“자네 내자한테 권법을?”
“내자 같은 거 아니라니까! 쟤 주먹이 엄청 강한데, 그냥 휘두를 줄만 알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적당한 권법 하나 전수해줘.”
화무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운 처자가 주먹이 엄청 강하다니 흥미롭군. 옥녀권이라고 적당한 권법이 하나 있네. 우아하면서도 매서운 권법이지.”
유지훈이 자신에 대한 요청도 덧붙였다.
“나한테도 검법 하나 가르쳐 줘. 가능하면 쾌검으로. 돌아가면 무지하게 빠른 놈을 상대해야 하거든.”
“자네야 박투술로 탄탄한 기본기가 갖춰져 있으니 어려울 건 없지. 시간은 얼마나 있는가?”
“사흘.”
화무결이 강은영을 힐끗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빡빡하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요령만 알려줘. 수련은 돌아가서 하면 되니까. 시작하기 전에 두꺼비탕이나 먹으러 가자. 맛있더라.”
“우웩!”
긴장해서 듣고 있던 강은영이 구역질을 해댔다.
***
다시 귀환
사흘이 지났다.
강은영은 옥녀권법의 기본 동작을 익혔고, 유지훈은 화무결이 직접 착안한 쾌검 백광검법을 배웠다.
사실 화무결은 유지훈에게 스승이기도 했다. 유지훈이 과거 익힌 체술을 비롯한 무공들이 화무결에게 배운 것이었다.
덕분에 화무결은 유지훈의 무공을 잘 알았다. 가장 잘 맞는 검법을 손수 만들어 알려줬다. 점창파의 사일검법에 기반을 두고 무당파의 태청검법을 접목한 검법이었다.
“역시 자네 눈썰미 하나는 천하제일로 손색이 없군.”
화무결이 두어 차례 시범을 보이자, 유지훈은 그대로 재현해냈다. 과거 유지훈도 미처 몰랐다가 무림에 와서 꽃피운 재능이었다.
새롭게 보유하게 된 특성도 익숙해지도록 연습했다. 처음엔 화무결을 상대로 연습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화무결의 무공은 되돌려줄 수 없었다.
“리플렉션(Reflection 반사)이란 특성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지켜보던 강은영이 조언했다.
“마나가 작용한 공격을 반사하는 특성이에요. 다만 같은 레벨까지의 각성자를 상대할 때만 사용할 수 있어요. 리플렉션을 특성으로 지닌 각성자가 두드러지지 않은 이유예요.”
자신보다 상위 레벨의 각성자에게 리플렉션을 발동했다가는 자칫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유지훈에겐 의미 없었다. 어차피 비각성자라 마나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했으니.
어쨌거나 유지훈의 반사기는 21세기에선 마나, 무림에선 내공에 반응하는 이능력인 듯했다. 아수라혈염기와 천마신공을 완벽하게 되돌려준 게 이를 방증하는 부분이었다.
별수 없이 스파링 파트너는 강은영이었다.
아이언 피스트와 염동력은 여지없이 되돌려줄 수 있었다. 두어 차례 연습 끝에 강은영은 기겁하고 도망가버렸다.
“차라리 날 죽여요.”
“책임지고 강하게 해준다니까.”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으로 귀환, 화무결과는 작별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가는 건가?”
“가야지. 할 일이 많아. 그 일들 때문에 온 거였어.”
“자네와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화무결의 눈치가 이상했다.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같이 가고 싶은 거야?”
“꼭 그렇다기보다···.”
화무결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동안 철저하게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네. 내공을 잃고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지. 가끔 쓸쓸함을 견디기 힘들더군.”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나다운 게 다 뭔가. 이제 늙고 지친 늙은이에 불과하네. 이곳에서 사는 게 별로 재미없기도 하고···.”
유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신 화무결과 동행하는 귀환.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할 만했다. 내공은 잃었어도 일신의 무예는 그대로이니, 영훈길드의 사범으로 최적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차원 이동 과정에서 특성을 얻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지훈으로서는 막강한 동료가 생기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도 같이 가면 좋아. 그런데 시간의 흐름이 문제가 될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인가?”
화무결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밝아졌다.
어지간한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반응이었다.
“여기랑 거기는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달라. 여기가 거기보다 열 배 빠르게 시간이 흘러. 여기 열흘이 거기선 하루라는 의미야.”
“그게 문제 될 게 뭐 있는가?”
“사람의 몸 또한 그 시간의 흐름에 맞게 설정된 것 같거든.”
화무결이 눈매를 좁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듣고는 무슨 의미인가 했지만, 바로 파악한 것이었다. 인체가 늙는 속도 또한 원래 살던 곳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나이를 먹지 않은 거로군. 여기서 50년을 지냈지만, 5년이나 지났을까 싶은 정도의 외모인 비결이 그거였어.”
“맞아. 역시 현명하네.”
“내가 그리로 가게 되면, 열 배는 빨리 늙을 수 있다는 의미고.”
“그것 역시 맞아.”
유지훈이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하고 싶은 친구를 남겨둬야 하는 아픈 이유라 여겨서였다.
“거기서 너는 1년만 지내도 10년의 세월을 보낸 것처럼 늙게 될 수도 있을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내 경우를 보면···.”
“허허허.”
화무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더없이 밝은 눈빛. 즐거워하는 듯했다.
“내가 여기서 오래 산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또 누가 해코지하겠다고 찾아오면 쫓겨 다니는 일밖에 더 있겠나. 오래 못 살더라도 새로운 곳에서 재미있게 살고 싶네. 좋은 친구와 말이야.”
화무결이 강은영을 흘깃 쳐다봤다.
“친구가 내자와 해로하는 모습도 보면서 말일세.”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화무결도 함께 가기로 했다.
귀환한다고 하니 강은영의 반응이 민감했다.
“가면 다시 홀딱 벗게 되는 건가요?”
“그렇긴··· 하지.”
“그럼 옷 몇 벌 챙겨가야겠네요.”
“바보야. 그냥 싹 사라진다고. 몸뚱이 빼고. 공수래공수거야.”
“할 수 없죠. 뭐. 책임지라고 들러붙는 수밖에.”
마침내 귀환의 시간이었다.
다만 둘이 와서 셋이 돌아가게 됐다.
통로는 유지훈의 눈에만 보였다. 과거 무림에 온 지 딱 50년이 되는 순간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통로였다.
어쩌면 오랜 차원 이동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인 듯했다.
유지훈이 두 사람의 안내자가 돼야 했다. 오른손엔 화무결의 손을, 왼손엔 강은영의 손을 잡고 통로로 들어섰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빨려 들어갔다. 전신이 요동치는 불편한 느낌 잠시, 나른한 기분과 함께 스르륵 잠이 들었다.
깨어났다. 17호 던전 한구석이었다.
역시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화무결과 강은영 역시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다. 잠든 상태였고, 물론 알몸이었다.
“또 보는군. 알몸.”
외면하려다가 본능적으로 다시 봤다.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린 듯했다. 눈을 떼기 쉽지 않았다.
“곱긴 곱네. 확실히 봐줄 만해.”
잠시 감탄했다.
그렇다고 계속 보고 있을 순 없었다.
괜히 신체가 반응하기라도 하면, 혹시 강은영이 깨어나 그 장면을 목격하기라도 하면. 책임지라고 난동을 피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두 살 위 누나를 책임질 순 없지.”
일단 던전 밖으로 달려갔다.
근처에 세워둔 강은영의 차를 향해서였다.
화무결과 강은영 둘만 남겨두는 게 조금은 신경 쓰였지만,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늙은이가 무슨···.
오기 전 강은영에게 여벌의 옷을 준비해달라고 당부해뒀었다.
차에는 잘 개켜진 옷 다섯 벌이 있었다. 전부 유지훈의 옷이었다.
“여자 옷도 좀 챙겨오지 않고···.”
일단 옷부터 입었다.
옷 두 벌을 들고 던전으로 돌아왔다.
“흐음···.”
화무결은 깨어나 있었다.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일어났네. 몸이 이상하거나 그렇진 않지?”
물어놓고 이상하다고 느낀 건 오히려 유지훈이었다.
화무결의 모습이 이상했다. 그것도 몹시.
“너···.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도통···.”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일단 백발이던 머리가 까맣게 바뀌어 있었다. 자글자글하던 얼굴의 주름도 싹 사라졌다.
전신의 피부도 팽팽했다. 물론 수십 년 무공을 익힌 덕분에 잘 단련된 몸매였지만, 세월까지 거스를 순 없었다. 내공을 잃기까지 해 피부의 탄력은 사라진 상태였는데, 지금은 매끈하기만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화무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또 왜? 뭐가 문제인데?”
“내공이 돌아왔네. 고스란히. 단전 또한 완벽하게 회복됐어.”
유지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