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50)

서서히 양손을 들어 올리면서 유지훈을 향해 걸어왔다.

핏빛 기운이 두 손 주위에서 피어올랐다. 조금씩 커지더니 급기야 사람 크기의 악귀 형상을 이뤘다.

한때 중원 무림을 공포로 물들게 했던 아수라혈염기였다.

“가거라!”

악수창이 양손을 유지훈에게 뻗었다.

악귀 형상의 핏빛 기운이 유지훈을 뒤덮었다.

스걱스걱.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소로운 녀석.”

악수창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그려지려는 찰나.

핏빛 기운이 악수창에게 되돌아왔다. 고스란히 악수창을 휘감았다.

“아악! 이게 뭐야! 아악!”

악수창이 비명을 질러댔다.

핏빛 기운, 아수라혈염기가 악수창의 전신을 화염처럼 뒤덮었다.

이윽고.

털썩! 악수창이 쓰러졌다.

새까맣게 타버린 시신의 모습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화무결과 양수명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두전성이(斗轉星移)!”

새롭게 얻은 특성 (2)

악수창의 아수라혈염기. 유지훈에겐 생소한 무공이었다.

혈교의 교주 혈마는 무림에 공포의 존재였지만, 스스로 무너졌다. 무리해서 아수라혈염기의 화후를 십 성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주화입마에 빠졌다. 유지훈으로서는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악수창의 양손에서 악귀 형상의 기운이 쏟아져 나왔을 때, 유지훈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본능이 그를 차분하게 이끌었다.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새로운 특성이 반응하는 과정이라고.

아수라혈염기가 덮쳤을 때도 유지훈은 편안하기만 했다. 나른한 기분만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특성을 발동하는 과정이었다.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유지훈의 전신을 뒤덮은 핏빛 기운이 고스란히 악수창에게 되돌아가기까지. 악수창의 입가에 그려진 득의양양한 미소가 경악으로 바뀌기까지.

“아악! 이게 뭐야! 아악!”

아수라혈염기는 악수창을 휘감았고, 온몸을 불태우는 고통을 안겨줬다. 처참한 비명과 함께 혈마의 후예는 삶의 기운을 잃어갔다.

잠시 무거운 침묵에 이어 화무결과 양주명에게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두전성이!”

두전성이(斗轉星移). 상대가 구사한 무공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수법으로 모용세가의 비전 절기였다.

유지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물론 두전성이는 아니었다.

내공의 절묘한 운용으로 상대의 무공을 되돌린 건 아니었으니.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받아친 결과였다.

굳이 명명하자면 반사기라고 할까. 어쨌거나 공격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점에선 일맥상통했다.

소멸기가 무림에서 화공대법으로 통했듯이, 가칭 반사기는 두전성이로 통할 수도 있을 듯했다.

아무려면 어때. 며칠 안 있으면 다시 떠날 텐데.

“모용의 후예인가?”

양주명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유지훈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아니. 난 유 씨야.”

“그런데 어떻게 모용의 가전 비기를···?”

“설명하자면 복잡해. 그나저나 계속할 건가? 할 거면 빨리하지. 분위기 탄 김에 몰아치고 싶은데.”

유지훈이 양주명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양주명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흑의인들을 돌아봤다.

“고루귀영마진을 전개하라!”

“네!”

흑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유지훈의 주위를 기괴한 형태로 에워쌌다. 합격진을 구축하는 모습이었다. 양주명의 지시만 내려지면 곧바로 공격에 나설 태세였다.

그때 검 한 자루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조금 전 유지훈이 해치운 흑의인의 검이었다.

고오오오.

강렬한 진동을 일으키며 허공에 멈춰 서더니.

쐐애액!

무서운 기세로 날아갔다.

흑의인들이 형성한 진세 안으로 파고들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치 검이 살아있기라도 한 듯한 양상이었다.

“크억!” “으헉!”

흑의인들이 비명을 질러댔고, 합격진은 무너졌다.

와중에 들려오는 경쾌한 탄성.

“어! 이게 되네!”

강은영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지훈을 바라봤다.

“내가 한 거예요! 내가 검을 움직이고 있다고요!”

차원 이동의 보상으로 강은영이 얻은 이능력이었다. 무기를 허공에 띄워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새롭게 추가한 특성이었다.

유지훈은 빙긋 웃었고, 양주명은 경악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유지훈은 한술 더 떴다.

“한 자루만 되는 거야? 몇 자루까지 되나 해봐.”

“그럴까요?”

우연히 하게 된 것이었다.

흑의인 무리가 진을 이뤄 공세를 취하려 할 때, 무심결에 쓰러져 있는 흑의인들을 쳐다봤다가 눈에 띈 검에서 비롯됐다.

무의식적으로 집중했는데, 검이 떠오르더니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흑의인들을 난도질했다.

몇 자루 더 해보라는 유지훈의 주문. 강은영은 실행에 옮겼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검들을 둘러봤다. 집중했다.

검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한 자루, 두 자루, 세 자루···.

“일곱 자루까지 가능한데요!”

“날려버려!”

일곱 자루의 검이 무서운 기세로 흑의인들에게 날아갔다.

흑의인들이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신묘한 움직임으로 파고드는 검들을 감당할 순 없었다. 차례차례 검을 맞고 쓰러졌다.

“요사스러운 년이로구나!”

양주명이 인상을 구기더니 화무결을 향해 독설을 쏟아냈다.

“내공도 없는 늙은이가 믿는 구석이 있나 싶었더니, 두전성이와 이기어검을 구사할 수 있는 고수를 끌어들인 것인가?”

“나도 지금 처음 알았네.”

화무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양주명이 양손을 기이하게 뒤틀어 합장하고는 일성을 토했다.

“소용없을 것이다. 천마신공은 그깟 하찮은 손장난 따위를 압도하는 절대적인 무공이다. 마주하게 된 걸 영광으로 알아라.”

양주명이 합장한 손을 비틀어 펼쳤다. 짙은 묵빛 기운을 머금은 손을 힘차게 뻗었다. 스산한 마기가 화무결과 강은영 그리고 유지훈을 향해 엄습해왔다.

“네 상대는 나라니까. 엉뚱한 사람들 집적대면 곤란하지.”

유지훈이 홀연히 움직여 천마신공의 마기를 가로막아 섰다.

양주명의 장력을 고스란히 맞아줬다. 그리고 그대로 돌려줬다.

파앗!

“으헉!”

마기를 정통으로 맞은 양주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두전성이는 내공의 운용에 바탕을 둔 수법이었다. 천마신공은 내공보다 한 차원 높은 개념의 기를 다루는 심법이기에 두전성이로 되돌릴 수 없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고스란히 돌아왔다. 오히려 더 강해져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오 성 화후를 지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어, 어떻게 두전성이 따위가 천마신공을···.”

유지훈이 느릿하게 양주명에게 다가갔다. 어깨에 걸친 검이 무심한 한기를 뿜어냈다.

“두전성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그, 그럼···?”

“설명하자면 복잡하다고 했잖아. 짜증 나게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궁금하면 저승에 가서 물어봐.”

서걱!

유지훈의 검이 양주명의 목을 날려버렸다.

데구르르 굴러가 멈춘 목을 향해 싸늘하게 한마디 던졌다.

“천마 죽었으면 아랫것들은 어디 짱박혀서 숨만 쉬든지 해야지. 왜 기어 나오고 지랄이야.”

강은영이 날린 검들도 흑의인들 대부분을 처치한 상태였다.

서른 가까이 쓰러져 나뒹굴었고, 열 명 안팎만이 서로 등을 맞대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일곱 자루의 검을 가까스로 상대하고 있었다.

이제 적진에 강자라고 할 만한 이는 파사 배화교의 장로 하나였다.

“그쪽은 뭐가 있나? 멀리서 온 모양인데, 빨리해 보시지.”

배화교의 장로 위지천은 넋을 잃은 채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유지훈이 다가가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오!”

무릎을 털썩 꿇었다.

“건곤대나이신공을 여기서 영접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건곤대나이신공?”

반문하는 유지훈을 향해 위지천이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성화령의 수호 신공입니다. 파사에선 소실돼 명맥이 끊겼습니다. 대협께서 건곤대나이신공의 전수자일 줄이야···.”

위지천은 감격에 젖은 표정이었다.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무공이었다. 대단한 것 같긴 한데, 알지 못하니 반응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화무결이 슬그머니 다가와 귀엣말로 설명했다.

“성화령은 배화교의 성물일세. 건곤대나이신공은 성물을 수호하는 신성한 무공이라 할 수 있네.”

“아아.”

이제 위지천을 훈계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굳이 필요치 않았다.

위지천이 이마를 바닥에 처박은 채 통렬한 반성을 시작했다.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건곤대나이신공의 전수자가 계시는 줄 알았으면 이렇게 중원을 넘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왔잖아. 곳곳에 난장판을 만들어 놓지 않았어?”

“무지로 인해 저지른 실수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중원 무림에 끼친 피해는 최선을 다해 보상하겠습니다.”

“흐음···.”

유지훈이 화무결을 쳐다봤다.

어차피 유지훈은 떠날 사람. 남겨질 자가 판단할 일이었다.

화무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중원 땅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일세.”

“당연한 말씀입니다. 오늘 이후로 배화교는 천마신교와도 관계를 단절하겠습니다. 중원 무림을 넘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유지훈이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그림자도 넘어와선 곤란해. 그랬다간 내가 가서 확!”

“물론입니다. 쳐다도 보지 않겠습니다.”

마교 잔당의 발호도 싹 정리됐다.

강은영은 여전히 허공을 떠다니는 검으로 흑의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리 보내고, 저리 보내고. 어린아이가 전쟁놀이라도 하는 듯 즐거운 모습이었다.

“연습할 만큼 했으면 슬슬 정리해.”

“얘네들 다 안 죽여도 되는 거예요?”

“얌전히 돌아가겠대. 지금까지 버티느라 애썼잖아. 봐줘.”

그제야 강은영이 검에 대한 집중을 거둬들였다.

투두둑. 일곱 자루의 검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흑의인들이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몰아쉬었다.

“너희들도 앞으로 이 동네 얼씬도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

“네!”

헤어질 시간이었다.

위지천이 뭔가 아쉽다는 눈빛으로 양손을 비볐다.

“왜? 또 무슨 할 말 남았어?”

“그게···. 혹시 대협께서 배화교 총단을 방문해주실 수 없을까 해서 말입니다. 성화령 수호 신공의 전수자를 모시고 싶어서요.”

“배화교 총단? 페르시아에 있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교주님도 대협께서 오신다고 하면 교의 귀빈으로 환영하실 겁니다.”

“교주는 천마 하나로 충분한데···.”

“네?”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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