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거? 차원 이동하면 다 그렇게 돼.”
***
새롭게 얻은 특성 (1)
“어? 어쩐 일이야? 전자 일은 거들떠도 안 보겠다고 하더니.”
신화전자 대표 이자걸이 갑작스럽게 집무실을 찾은 이나연을 의아한 눈빛으로 반겼다.
“전자 일은 여전히 관심 없어. 오빠한테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야.”
“뭔데? 표정이 비장하네? 긴장된다.”
이자걸은 형제지간에도 존댓말을 쓰며 사무적으로 대했지만, 이나연에겐 달랐다. 유일하게 터놓고 지냈다. 말도 편하게 했다.
“큰오빠 만나고 오는 길이야.”
“형님? 뭐라고 하시는데? 만난 김에 지분 정리 좀 서둘러달라고 하지 그랬어. 안 그래도 매각 절차가 순조롭지 않은 모양인데.”
“매각 절차가 중요한 게 아니고. 오빠가 야마가토 쪽이랑 진행한 프로젝트 독차지했어?”
이자걸이 짐짓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큰오빠가 엄청 시달리나 봐. 야마가토 쪽에서도 계속 압박 들어오고, 박 여사도 지랄한다는 것 같아.”
“그래서 너는 내가 독차지한 것 같니?”
“나야 오빠를 믿지만, 큰오빠 표정이 너무 절실해서···.”
이자걸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도 알잖아. 실험은 길드 차원에서 진행한 거. 이자웅 마스터가 본거지랑 같이 자폭하면서 결과까지 싹 사라졌어.”
“연구에 오빠도 상당히 깊이 개입한 거 나도 알아. 큰오빠 말로는 오빠가 전담하다시피 했다고 하고.”
이자걸이 순순히 시인했다.
“맞아. 전담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깊이 개입했어. 그래서 더 아쉬워. 제대로 성과가 나왔으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을 텐데.”
“그래서 오빠는 아니라는 거지?”
“응. 아니야.”
“그런데 왜 큰오빠 연락은 피하는 거야?”
다시금 이자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형님 연락을 피했다고? 형님이 그러셔?”
“응. 어제도 하루 종일 전화를 안 받더라는데?”
“아. 어제는 내가 일이 좀 있어서 전화를 받을 수 없었고.”
하루 전 이자걸은 정말 다이내믹한 하루를 보냈다. 재앙급 몬스터와 씨름을 했을 정도였으니···.
“연락 안 되는 건 오히려 형님이야. 형님이 계열사 지분들 꼭 틀어쥐고 안 내놓는 바람에 매각 작업 진행이 안 되잖아.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큰오빠야 아쉬워서 그렇겠지. 그래도 셋째 오빠랑 내 지분은 다 넘겼으니 어떻게든 진행은 될 거야. 그럼 큰오빠도 내놓겠지.”
“그런 일은 다 시기가 있는 건데, 때를 놓치면 안 되니까 그러지. 형님도 미련 좀 버리셨으면 좋겠다.”
이나은이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계를 호령하던 위치에서 그저 돈만 좀 많은 중년이 됐을 때의 허망함을 그녀 역시 모르지 않았다.
이자성이야 그룹 후계자로 사실상 입지를 굳히고 있었으니, 내려놓기 더욱 쉽지 않을 터였다.
이자걸도 이나연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너한테 더욱 고맙게 생각한다. 패션이랑 엔터테인먼트는 사실상 네가 키운 거나 마찬가지였잖아. 다른 계열사들과 달리.”
“버겁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뭔데? 설마 헌터?”
이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각성자인데 걸맞은 뭔가는 해봐야 하잖아.”
“그래서 요즘 그렇게 바빴던 거니? 단련하느라고?”
근래 이나연은 얼굴 보기 힘들었다.
문득 생각나서 찾으면 트레이닝 센터에 있다는 말만 들려왔다. 우연찮게 그런 시기만 골라서 연락한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최근에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었고 해서. 각성자 테스트만 받고 아무것도 안 한 내가 부끄럽더라고.”
“자존심 상하는 일? 혹시 그거 말하는 거야?”
이자걸에게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이나연이 유지훈에게 영훈길드 합류를 요청한 사실이었다. 결과는 완곡한 거절이었고.
이나연이 입을 비쭉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격이 안 된다잖아. 엄연히 나도 각성자인데. 얼마나 단련을 안 했으면 각성자로 보이지도 않았겠어.”
“내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 넌지시 부탁했는데, 연락은 없었니? 네가 연락해본 적도 없었고?”
“내가 연락을 왜 해! 나도 자존심 있는 여자야.”
이나연이 발끈했다.
“갈 데가 영훈길드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먼저 제안 올 때까지 내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너한테는 거기가 제일 잘 맞을 것 같아서 그런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몸 잘 만들어서 찾아가 보려고.”
이나연이 말하다 말고 스스로 놀라더니 고쳐 말했다.
“부탁하러 찾아가는 건 아니야. 보고 그쪽에서 오라고 하면 가는 거고. 아니면 다른 데 찾아볼 거야.”
“그래. 건투를 빌게. 열심히 해봐라.”
사무실을 나서려던 이나연이 책상 위에 놓은 물건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게 뭐야? 혈석 아니야?”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탄성을 질러댔다.
“와~! 이거 특급 몬스터 혈석 같은데? 아닌가? 초특급인가?”
“그런 것도 알아볼 줄 아는 거야?”
이자걸이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나 각성자야. 차원 에너지 정도는 감지할 줄 안다고. 그나저나 어떻게 구했어? 초특급 몬스터 혈석이면 100억은 족히 될 텐데. 혹시 회사 담보로 대출이라도 받은 거야?”
“아니야. 오다 주웠어.”
이자걸이 실없는 농담 한마디 던지고는 말했다.
“잘 활용하면 뭔가 대단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렵게 구했다. 당분간 여기 매달려야 할 것 같아.”
“어이구. 누가 미치광이 천재 아니랄까 봐. 그래. 매달려서 대단한 거 만들어 보셔.”
이나연이 악담 같은 격려를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다.
이자걸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옷소매를 걷어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얼룩덜룩한 화상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참 어렵게 구했다. 지독한 놈이 남기고 간 거야.”
전날 거대악어와 혈투를 떠올렸다.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주둥이를 움켜쥘 때만 해도 쉽게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 찢어버려서 끝장을 내려고 했다.
문제는 혈독이었다. 다리에서 뿜어낸 혈독을 전신에 뒤집어썼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 악전고투를 이어가야 했다.
마침내 아가리를 잡아 뜯는 데 성공했다. 초특급, 아니 재앙급 몬스터를 처치했고 혈석을 손에 넣었다.
돌이켜 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약효가 지속되는 시간은 10분 남짓. 조금만 늦었어도 놈의 먹이가 됐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해결책은 혈석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여기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였다.
“개 같은 야마가토 놈들. 이런 몬스터들을 대한민국에 풀어놓았다 이거지. 백배 천배 갚아주고 말겠어.”
한편으로 유지훈도 떠올렸다.
유지훈과 약속에 따라 강원도 산지로 향한 것이었다.
원래 탁세현을 상대할 생각이었지만, 유지훈은 무리할 필요 없다고 했다. 거대악어나 잘 막아달라고 당부했다.
“하긴 탁세현 그놈은 내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더군.”
탁세현의 특성 플래시는 이자걸이 어쩔 수 없는 능력이었다. 잡아야 어떻게 해볼 텐데.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몸놀림이었다.
“그나저나 살아있긴 한 건가?”
유지훈의 가슴에 검이 꽂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심장을 관통한 듯했다. 당연히 죽어야 정상이었다.
사전에 유지훈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정리되면 연락한다고 마철진의 행보만 주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보면 도깨비 같은 친구야. 나더러 이상하다고 하지만, 그 친구가 훨씬 이상해. 어쨌거나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으니, 나는 해답이나 확실하게 찾아야지.”
이자걸의 부릅뜬 눈에서 광선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했다. 물론 향한 곳은 재앙급 몬스터 거대악어의 혈석이었다.
***
무신 화무결의 모옥 주변으로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몰려들었다.
자색 장포의 장년 사내와 적색 피풍의의 중년인 그리고 황금빛 불꽃이 새겨진 흰색 제복을 입은 벽안의 노인이 흑의인들을 이끌었다.
“무신께서는 이만 나오시지요. 신교에서 혈채를 받으러 왔습니다.”
자색 장포의 장년 사내가 모옥을 향해 소리쳤다. 내공을 한껏 실어 내지른 음성이었다. 모옥 지붕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화무결이 느릿한 걸음으로 모옥 밖으로 나왔다. 유지훈과 강은영이 뒤를 따랐다.
“자네가 천마의 후계자인가?”
“그렇습니다. 양주명이라고 합니다.”
양주명이 포권으로 화무결에게 예를 표했다. 죽이러 왔지만, 무림 선배에 대한 예의는 깍듯했다.
양옆의 두 사내도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혈교의 대사제 악수창이오.”
“배화교의 장로 위지천, 중원 무림의 큰 어른께 인사드립니다.”
적색 무복의 중년인이 혈마의 대제자고, 백색 제복의 노인이 배화교에서 파견한 고수였다.
악수창의 눈은 당장이라도 피를 뿜을 듯한 혈안이었다. 혈마의 절세 마공 아수라혈염기를 칠성 이상 익혔다는 의미였다.
위지천은 분위기가 묘했다. 하얀 피부와 푸른 눈에 뭉툭한 콧날. 색목인과 중원인의 혼혈인 듯했다.
무리를 주도하는 이는 천마의 후계자 양수명이었다.
“무신께서도 오늘 저희가 찾은 이유를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알고 있네. 천마의 복수를 위해 왔겠지.”
화무결이 무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주명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유지훈과 강은영을 가리켰다.
“그럼 불필요한 충돌은 피할 수 있겠군요. 저희가 원하는 건 무신의 목입니다. 다른 분들은 보내드리겠습니다.”
마치 맡겨둔 화무결의 목을 찾으러 온 듯한 태도였다. 크게 양보하겠다는 오만함까지 내비쳤다.
화무결이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사람을 잘못 찾아온 듯하네.”
“무슨 말씀이신지···?”
“천마를 죽인 건 내가 아니거든.”
화무결이 아쉬운 듯 짧게 탄식을 토해냈다.
“내가 천마와 겨룬 것 맞네. 모든 걸 걸고 싸웠지. 다만 나는 천마의 상대가 아니었네. 억지로 버티긴 했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까지 몰렸네.”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요! 무신 그대가 아니면 누가 무학의 극을 넘어선 분을 해할 수 있다는 말이오?”
악수창이 혈안을 번득이며 물었다.
드디어 유지훈이 나설 차례였다.
“무학의 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런 양반이 내공도 없는 놈 검에 목이 날아가냐?”
“그대는 누구인가? 누구길래 무신의 뒤에 숨어 시정잡배의 망언을 지껄이는가?”
악수창의 근엄한 호통에 유지훈이 비릿한 코웃음으로 반응했다.
“흥! 누구긴 누구야. 그 양반 목 날린 놈이지.”
“건방진 놈!”
양수명이 폭발했다.
같잖은 놈이 장난친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감히 신교의 신성한 행사를 삿된 혀 놀림으로 모욕하느냐!”
양수명이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신교의 전사들은 들어라! 당장 저놈의 사지를 자르고 혀를 뽑아오도록 하라!”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흑의인 십여 명이 유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일단 졸개들로 시작하는 건 이 동네나 저 동네나 똑같군.”
유지훈이 흑의인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양손에 쥔 단검에서 싸늘한 광휘를 뿜어냈다. 일단 썰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팔, 다리, 발목, 옆구리 심지어 머리까지. 닥치는 대로 썰었다.
일정 부분 타격은 감수하기로 했다.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대기 중인 만큼, 속도전이 최선이라 여겼다.
가벼운 상처는 재생 능력에 맡기면 될 테니. 최대한 빠르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서 상대방 우두머리를 끌어내겠다는 복안이었다.
덤벼든 흑의인 모두 순식간에 썰렸다.
유지훈도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흑의인들의 피에, 자신의 피까지. 온통 피칠갑을 한 모습이었다.
지옥에서 온 사신(死神)을 연상케 했다.
“보통 놈이 아니었구나.”
양수명이 화무결을 노려봤다.
그나마 갖췄던 예의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늙은이가 기어코 살아보겠다고 방수를 끌어들였군. 어림없는 짓! 더욱 처참한 죽음을 맞보게 될 것이다.”
양수명이 악수창에게 눈짓했다.
악수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무신 늙은이한테 사용하려고 했거늘, 애송이한테 쓰게 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