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유지훈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바로 쫓아갔지. 아파 죽겠는데, 자네 쫓아갈 힘은 있었네.”
“어디 간 줄 알고 쫓아온 거냐? 잠들었다가 깨어난 다음이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었을 텐데.”
“자네 처음 나타났던 곳.”
화무결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바로 이곳이라고 표현하는 모습이었다.
“돌아간다고 했으니 왔던 곳으로 갔겠거니 생각했네.”
유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와의 조우. 50년 우정을 되찾은 기분은 감격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자네는 더 젊어진 것 같군.”
화무결의 눈빛에 기쁨과 쓸쓸함이 겹쳤다.
친구의 건강한 모습은 기쁘지만, 상대적으로 늙고 약해진 자신의 처지는 쓸쓸했기 때문일 터였다.
확실히 화무결은 못 보던 새 부쩍 늙었다.
평소 유지훈 같으면 농담을 던지며 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화무결의 미소가 너무 처연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색함을 깬 건 찢어질 듯한 비명이었다.
“꺄악!”
강은영이었다. 잠에서 깨어났다.
내처 뒤척이던 탓에 덮어놓은 나뭇잎도 흩어진 상태였다.
“이게 뭐야! 왜 내 옷이 홀딱 벗겨진 거야! 여긴 어디예요?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외진 숲속에 뉘어져 있으니 기절초풍할 상황이긴 했다.
강은영은 몸을 새우처럼 만 채로 유지훈을 향해 비명을 질러댔다.
“아무 일도 없었어. 여기 오면 다 그렇게 돼.”
유지훈이 차분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강은영은 한층 격하게 소리쳤다.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유지훈 씨는 왜 홀딱 벗고 있는 거예요! 옆에 있는 응큼한 노인네는 또 누구예요! 둘이 짜고 나한테 몹쓸 짓이라도 한 거예요?”
“아니라니까!”
급기야 유지훈이 호통으로 반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 거 아냐! 여긴 차원 이동으로 온 곳이고, 차원을 이동하게 되면 육신을 제외한 모든 게 사라져.”
“그럼 진작 말을 해주지. 옷이라도 몇 벌 더 입고 오게···.”
“바보야? 옷이고 뭐고 다 사라진다니까.”
놀라서 바라보던 화무결이 그제야 털털하게 웃었다.
“허허허. 그러고 보니 자네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는군. 알몸으로 이 근방을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화무결의 시선이 강은영을 향했다.
강은영은 움찔하더니 몸을 한껏 움츠렸다.
화무결이 화들짝 놀라더니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이쿠. 미안하게 됐소. 보려던 건 아닌데···.”
이어 유지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처자는 누구신가? 자네 내자인가? 참 고우시군.”
“내자는 무슨. 나 아직 총각이야.”
“자네도 혼례를 올릴 나이가 지나지 않았나? 선남선녀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선남선녀는 얼어 죽을···. 그럴 일 없어. 같이 일하는 동료야. 강해지게 해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강은영도 대략 상황을 파악했다.
유지훈이 21세기로 귀환했던 때가 떠올랐다. 아랫도리에 거적때기만 걸치고 돌아다니던 모습이 생생했다.
차원 이동 과정에 대한 유지훈의 설명이 이해됐다.
어쨌거나 계속 이 상태, 알몸으로 있을 순 없었다.
“어르신. 혹시 입을 만한 옷 좀 구해주실 수 없을까요?”
“어이쿠. 내 정신 좀 보게.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내 후딱 다녀오리다. 여인의 옷은 없지만, 아쉬운 대로 입을 만한 게 있을 거외다.”
화무결이 허겁지겁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다시 유지훈과 강은영 둘만 남겨졌다. 조금 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 둘 다 깨어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어떡할 거예요?”
강은영이 뾰로통한 어조로 물었다.
유지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어떡해?”
“내 알몸 봤잖아요.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요?”
“은영 알몸은 이윤성 국장이랑 최금강 영감님도 봤잖아. 그 양반들한테 먼저 책임지라 그래.”
“그걸 말이라고 해요?”
강은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그분들은 영상으로 본 거고요. 유지훈 씨는 직접 봤잖아요. 나뭇잎까지 덮어준 것으로 봐서 만지기도 했을 거고요.”
“그럼 홀딱 벗은 채로 놔둘 걸 그랬나? 추워서 바들바들 떨던데.”
“어쨌거나 책임져요.”
강은영은 완강했다.
유지훈이 의외로 순순하게 응했다.
“알았어.”
“정말 책임질 거예요?”
“응. 책임지고 강하게 만들어줄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러는 사이 화무결이 옷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남자 옷이었다. 자신의 무복을 챙겨온 듯했다.
유지훈과 강은영이 허겁지겁 입었다. 유지훈은 화무결과 체형이 비슷했기에 잘 맞았지만, 강은영에겐 껑충하니 컸다.
그래도 적당히 접어서 헐렁하게 입으니 그럭저럭 보이프렌드핏으로 어울리기도 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 거처로 가세. 할 이야기가 제법 많지 않은가. 나는 정말 할 말이 많네.”
밀린 이야기는 화무결의 거처로 이동해 나누기로 했다.
***
“그래서 2년 반 동안 여기서 이러고 살았단 말이야?”
유지훈이 놀라서 물었다.
화무결은 유지훈이 21세기로 귀환한 이후 줄곧 이 일대에 머물렀다. 산속에 방치된 모옥(茅屋)을 수리해 거처로 삼았다. 50년 전 유지훈을 발견했던 곳을 찾아 둘러보는 것이 일과였다.
“떠날 때가 되긴 했네. 사실 거기 가본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네. 자네를 보게 됐다니 하늘이 도운 셈이지.”
“왜? 이제 나를 잊기로 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말을 얼버무리는 화무결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데 애써 감추려는 듯했다.
50년 지기 유지훈이 놓칠 리 없었다.
“무슨 일 있구나. 털어놔 봐. 우리가 남이냐.”
“자네라서 말하기 더 어렵다고 할 수도 있네.”
“시끄럽고. 말 안 하면 네 내공을 싹 사라지게 하는 수가 있어.”
“허허허. 그놈의 화공대법···. 무림공적으로 쫓기던 시절이 지겹지도 않은가.”
털털하게 웃었지만, 화무결의 눈빛은 씁쓸하기만 했다. 두어 차례 한숨을 쉬더니 사연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요즘 쫓기는 신세일세.”
“뭐? 네가 쫓겨 다닌다고? 천하제일인 무신이?”
“다 지난 일일세. 지금은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네.”
화무결은 2년 반 전 천마와 생사를 건 대결을 벌였을 때 단전이 부서져 내공을 잃었다. 급격히 늙은 것도 사라진 내공으로 설명이 되는 대목이었다.
일신의 무예야 그대로이더라도, 내공이 없으니 예전과 비교해 10%의 무위도 발휘하기 힘들게 됐다.
문제는 마교의 잔당들이 발호하기 시작한 점이었다.
“파사의 배화교에서 지원을 보내왔네. 사라진 줄 알았던 혈교와도 손을 잡았고. 곤륜과 공동을 비롯한 서부 지역 문파가 봉문에 이르렀지. 정도 무림의 피해가 만만치 않은 상황일세.”
“놈들이 너를 해치우려 한다는 거지?”
“그렇다네. 지금은 내공을 잃어서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하지만, 한때 정도 무림의 지도자라는 상징성이 있으니 말이야.”
화무결이 유지훈의 눈치를 살피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놈들에겐 중요한 명분이 하나 더 있네.”
“또 뭐야?”
“천마에 대한 복수. 놈들은 내가 천마를 죽인 것으로 알고 있네. 놈들뿐만 아니라 무림 전체가···. 실은 자네인데 말일세.”
“내가? 에이 나 아니지.”
유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화무결이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연히 자네가 천마의 목을 날리지 않았는가. 자네가 맞네.”
“아니야. 네가 다 했어. 나는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어.”
중원 무림을 구한 공적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두 사람이었다.
강은영이 끼어들어 정리했다.
“유지훈 씨는 여기서도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곤 했군요. 그래도 지분은 목을 날린 사람이 가장 커요. 우리 동네에서도 유지훈 씨가 대체로 70%를 가져갔잖아요.”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지분 정리가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신씩이나 돼서 마교 잔당 놈들한테 쫓겨 다닌다는 거야?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찾아오는 족족 처치하긴 했네만. 상황이 쉽지 않아졌네. 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놈과 혈마의 직전 제자 그리고 파사의 고수가 직접 찾아온다고 하거든.”
“흐음···. 만만치 않긴 하겠네. 그나저나 무신 신세 처량해졌다. 후계자들 무서워서 도망 다니는 신세라니···.”
유지훈이 혀를 끌끌 찼고, 화무결은 입맛을 다셨다.
“작전상 후퇴라고 해주게. 일단 삶을 도모해야 상대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 테니.”
유지훈이 경쾌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됐어. 딱 좋아. 안 그래도 시험해볼 상대가 필요하던 참인데. 알아서 기어들어 오는 격이네.”
“시험해볼 상대라고?”
“최근에 능력이 하나 더 생겼거든. 어찌 활용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놈들한테 써보면 되겠어.”
“능력? 화공대법 같은 걸 또 익힌 건가?”
“화공대법 아니라는데 자꾸 화공대법이래. 다시 만난 기념으로 비밀을 털어놓을 테니 잘 들어.”
유지훈이 강은영에게도 말했다.
“은영한테도 해당하는 거니까 같이 들어. 중요한 거야.”
유지훈이 한 차례 헛기침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차원 이동의 비밀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동할 때마다 이능력을 얻게 된다는. 한 차례에 하나씩이니 유지훈은 세 개의 이능력을 갖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아울러 강은영도 하나 보유하게 됐고.
“나도 이능력을 갖게 됐다고요? 그럼 특성이 두 개가 됐다는? 그나저나 그게 뭔데요?”
“그건 나도 몰라. 이제 알아봐야지. 확인하고 연습도 해봐야 하는데, 좋은 시험대상이 알아서 와준다는 거 아니겠어?”
화무결이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자네는 화공대법을 익힌 게 아니고···.”
“응. 아니야. 우리 동네에서는 소멸기라 불리는 이능력이야.”
“거기에 하나 더 있고, 또 하나가 추가됐다는 말이로군.”
유지훈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검을 집어 들고 가볍게 팔뚝을 그었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다가 이내 상처가 아물었다.
“재생 능력이야. 방금 건 상처가 얕아서 바로 아물었지만, 깊은 상처는 나으려면 시간이 걸려.”
“그래서 유지훈 씨가 심장에 검을 맞고도 멀쩡했던 거군요?”
“멀쩡했던 건 아니고. 많이 아팠어. 심장 박동이 멈추기도 했을 거고. 재생돼서 다시 살아났다고 보면 돼.”
화무결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허허. 화공대법에 금강불괴의 신체를 지녔다니. 안 그래도 절세의 박투술을 지닌 친구가 또 다른 괴능력을 갖게 됐고···. 이쯤 되면 무신은 내가 아닌 자네한테 어울리는 별호가 되겠군.”
“화공대법 아니라니까. 금강불괴랑도 달라. 그건 상처도 안 생기잖아. 아프지도 않고. 나는 아파. 상처도 생기고. 머리나 목이 날아가면 죽을 수도 있어. 확인해볼 순 없지만.”
“자네 내자 될 사람도 만만치 않은 능력을 지니게 됐을 텐데···.”
화무결이 강은영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짓자, 유지훈이 질겁을 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동료야.”
“볼 거 다 봐놓고 그러는 거 아닐세. 고운 처자 마음 아프게 하면 하늘이 노할 거야.”
“나 말고도 본 사람 많아.”
“많긴 뭐가 많다는 거예요!”
발끈하려는 강은영을 유지훈이 앞서 차단했다.
“그 이야기는 됐고. 놈들은 언제 온대?”
“놈들? 엊그제 졸개들을 싹 처치했으니 빠르면 이삼일, 늦어도 칠주야 안엔 올 걸세.”
“그 정도면 시간도 적당하네. 잘 됐다. 오랜만에 무공 좀 봐줘. 적당한 검법 있으면 가르쳐 주고.”
유지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가려는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화무결을 잡아 일으켰다.
“돈 모아놓은 것 좀 있지?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이 동네에 전갈 볶음 잘 하는 집 있었는데.”
“그 집 할망구 세상 뜬 지가 언제인데. 그러지 말고 내가 두꺼비탕 얼큰하게 잘 하는 집을 아네. 그리로 가세.”
기괴한 식재료의 등장에 구역질하려던 강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왜 말이 잘 통하죠? 나 여기 말 배운 적도 없는데, 척척 들리고 술술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