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50)

[그렇지. 은영이 다짜고짜 육두문자를 날렸던 곳이기도 하지.]

“내가 반말은 했어도 육두문자는 언제 날렸다고···. 그나저나 거긴 왜요? 무슨 일이라는 건 어떤 건데요?”

[지금 좀 바빠서.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전화를 끊고 강은영은 조금 불안했다. ‘무슨 일’이라는 표현이 불길했다. 어쨌거나 따라붙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둘렀다.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된 이후 강원도 산간 지역은 통신망이 부실해졌다. 휴대폰 위치추적도 수시로 끊겼다.

수차례 길을 잃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따라잡을 수 있었고, 평창 산속의 호수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장은 소란스러웠다. 엄청난 격돌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다급히 달려갔다. 탁세현이 거대악어를 상대로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유지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세할 타이밍을 가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강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탁세현이 거대악어를 몰아붙이는 양상이었다. 쉴새 없이 특성 플래시를 발동하며 거대악어를 압박했다.

탁세현의 위력적인 검은 거대악어의 몸뚱이 곳곳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이빨과 꼬리를 사용한 거대악어의 반격은 탁세현의 플래시에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탁세현은 강했다. 대한민국 초인 서열 2위 다운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거대악어에게도 독이 있을 텐데···. 그 부분만 조심하면 무난히 처치할 수 있겠군.’

역시나 거대악어가 독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탁세현의 움직임이 위축될 상황이었다. 유지훈이 나설 시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유지훈의 시선이 거대악어의 독이 분포하는 상황을 살폈다.

유지훈이 몸을 날리려는 찰나. 강은영의 입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 탁세현 초인이 왜···?”

플래시를 발동한 탁세현이 향한 곳은 유지훈의 바로 앞이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내질렀다.

푹! 날붙이가 육신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유지훈의 가슴에 검이 꽂혔다. 심장을 정통으로 관통한 듯했다.

“아악! 안돼!”

처절한 비명과 함께 강은영이 달려갔다. 쓰러지는 유지훈을 끌어안았다. 탁세현을 노려봤다.

탁세현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검을 겨냥했다가 피식 웃은 뒤 검을 거두고 사라졌다.

“재앙급 몬스터의 희생양이 둘이 되겠군.”

강은영은 오열하며 유지훈을 부둥켜안았다. 피를 쏟아내는 가슴의 상처를 안간힘을 써서 눌렀다. 지혈하려 했다.

유지훈에게서 생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재앙급 몬스터 거대악어도 주둥이를 떡 벌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침을 뚝뚝 흘리며.

절망적이었다. 도망쳐야 했지만, 몸이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유지훈을 품에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그래도 같이 죽으니 나쁘지 않네.’

죽음을 앞둔 순간 떠오른 생각이 묘했다.

어쨌거나 눈을 질끈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다가오던 거대악어가 멀리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니 살벌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핏빛 괴인의 등장이었다. 키가 3m는 족히 넘을 듯한 흉측한 거인이었다. 거대악어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틀어쥐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눈동자가 없는 빨간 눈이 사뭇 공포스러웠다.

거대악어는 몸부림치며 핏빛 거인을 제압하려 했다. 이빨을 꽂아 넣으려, 또 꼬리로 후려치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킹콩과 고질라의 대결 장면이었다.

‘뭐지? 저건. 신종 몬스터인가? 왜 지들끼리 싸우는 걸까?’

궁금하게 여길 때가 아니었다.

일단 유지훈의 당부를 따라야 했다. 17호 던전으로 달려야 했다.

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면 뭔가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유지훈을 데리고 가야 했다.

필사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장애물이고, 둔턱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급기야 둔턱을 넘다가 차가 붕 떠올랐다 내려왔을 때,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좀 가. 단속 카메라에 세 번쯤 찍힌 거 알지?”

유지훈이었다.

맥도 안 잡히고 호흡도 끊겼는데, 멀쩡히 살아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쏟아내는데도 기뻐서 눈물만 흘렀다.

한참을 울다가 가까스로 진정한 뒤 물었다.

“17호 던전으로 계속 가는 거 맞아요?”

“응. 당연히 가야지.”

“안 죽었잖아요. 살아나려고 가라 그런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원래 나는 잘 안 죽어. 목이 날아가면 또 모르겠네.”

“그럼 17호 던전은 왜···?”

유지훈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은영 말고 거기 누구 안 왔어? 오기로 한 놈이 있는데···.”

“안 왔는데요. 아! 시뻘건 괴물 하나가 나타나긴 했어요. 생긴 건 사람인데 덩치는 엄청나게 큰 놈이었어요. 거대악어 주둥이를 붙잡고 살벌하게 싸우던데···.”

강은영이 거대악어의 주둥이를 찢으려 하던 괴인을 흉내 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유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오긴 왔네. 기왕 올 거면 빨리 좀 오지.”

“왜요? 유지훈 씨 아는 놈이에요?”

강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유지훈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내가 오라고 했어.”

“네? 유지훈 씨가 그런 괴물을 어떻게 알아서요?”

“괴물? 아. 그렇지. 괴물로 나타났겠구나.”

“그럼 원래 괴물 아니에요?”

“응. 생긴 건 멀쩡해. 잘 생겼어. 정신 상태가 이상해서 그렇지.”

“대체 누구길래···?”

이어진 유지훈의 대답에 강은영은 뒤로 넘어갔다.

아울러 힘차게 달려가던 차도 휘청 전복될 뻔했다.

“아아. 걔 이자걸이야. 전 신화그룹 차남. 지금은 신화전자 대표. 뭐야! 운전 똑바로 안 해!”

“뭐라고요? 그 괴물이 이자걸이라고요? 어떻게···?”

“약 빨아서 그래.”

“약···이라고요? 혹시 야마가토산업이랑 개발했다는···?”

“맞아. 그 미친놈이 본인한테 직접 실험했더라고.”

“그럼 혹시 유지훈 씨도 약 빨아서···?”

강은영이 유지훈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자걸의 약 덕분에 심장을 뚫리고도 멀쩡하냐는 질문이었다.

유지훈이 버럭 했다.

“난 약 같은 거 안 해! 사람 뭘로 보고. 내 몸은 청정 그 자체야.”

“그럼 어떻게 심장에 칼을 맞고도 괜찮은 거죠?”

“원래 그래.”

그러는 사이 17호 던전에 도착했다.

강은영이 투덜거리면서 물었다.

“그럼 이게 다 유지훈 씨 설계대로 된 거예요?”

“약간의 오차는 있었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봐야지.”

유지훈은 탁세현과 떠나기 전 이자걸에게도 연락했다.

탁세현과 단둘이 은밀한 작전에 나선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자걸은 자신도 합류하겠다고 제안했다. 유지훈은 그러라고 했다.

탁세현의 암습도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피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준비가 돼 있기에 받아준 것이었다.

머리만 공격당하지 않으면 괜찮으리라 판단했다.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검은 기꺼이 맞아줬다.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거예요?”

“당장은 탁세현을 제압할 방도가 없을 듯했거든. 확실히 나보다 강해. 상성도 안 맞고.”

탁세현의 특성 플래시가 유지훈에겐 버거웠다. 순간 이동에 가까운 몸놀림이 소멸기를 작렬할 여지를 주지 않으니.

일단 한 수 당해준 뒤, 다음 기회를 노리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강은영도 사정은 이해했다. 그래도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법이 있긴 한 거예요?”

“있으니까 그렇게 했겠지?”

유지훈이 어깨를 으쓱한 뒤 17호 던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강은영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어디긴. 강해지러 가는 거지. 엄청나게.”

“네? 어떻게 강해진다는···?”

“가보면 알아. 같이 갈 거지?”

강은영이 걸음을 멈춰 선 채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눈치였다.

유지훈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왜? 강해지기 싫어? 혼자 갈까?”

“아니에요. 나도 강해지고 싶어요.”

“그럼 아무 생각 말고 따라오기나 해. 생각은 내가 할 테니까.”

유지훈이 17호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한 채 쫓아오는 강은영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

나른한 기분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까무룩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느낌이었다.

세 번째 지나온 길이었지만, 여전히 느낌은 개운치 않았다. 몸속의 뭔가가 한껏 요동치고 난 뒤 피로감에 젖은 기분이었다.

“다시 왔구나. 시간은 얼마나 흘렀으려나.”

주위를 둘러봤다. 떠나올 때와 딱히 달라진 건 없는 듯했다.

어차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니 풍광이 바뀔 여지도 없는 장소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 길을 거쳐오고 나면 항상 그랬다. 차원 이동은 육신을 제외한 모든 걸 거둬갔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가는 삶의 철학이 깃든 길인 셈이었다.

문제는 옆에 널브러져 잠들어 있는 강은영도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보고야 말았네. 알몸.”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가 슬그머니 다시 봤다.

몸매가 제법, 아니 몹시 훌륭했다. 뽀얀 살결과 근사한 굴곡, 단련으로 예쁘게 다져진 탄탄한 근육까지.

SSG 국장 이윤성이 변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까지 변태가 될 순 없지.”

주위에서 나뭇잎과 가지를 모아와 덮어줬다. 임시방편이었다. 깨어난 뒤 이동하려면 어떻게든 옷가지를 구해야 했다.

“어디 가서 구하냐. 저렇게 내버려 두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옷가지를 구한답시고 어딘가 다녀오는 동안 누군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일단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누군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무림으로 돌아왔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3개월 남짓 지낸 다음이니, 이곳의 시간은 2년 반 정도 흘렀을 터였다. 무림에서 50년을 보내고 돌아간 21세기 대한민국은 5년이 지난 뒤였으니.

어쨌거나 유지훈에겐 약속의 공간이었다.

무림으로 넘어왔을 때 소멸기를 얻었고, 무림을 떠나 21세기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면서 재생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다시 건너왔으니 또 하나의 능력을 얻게 됐을 테고, 돌아가는 길에 하나 더 추가하게 될 터였다. 랜덤으로 주어지기에 어떤 능력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새로운 능력은 무림에 머무는 기간 동안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익숙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연습도 좀 하고.

열흘 정도 머무르면 충분하리라 예상했다. 무림에서 열흘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선 하루. 잠시 잠수 탔다가 돌아온 정도에 불과했다.

강은영 또한 두 개의 특성을 얻게 될 테니. 현재의 레벨 5를 훌쩍 뛰어넘는 능력자가 될 것이었다. 어쩌면 초인에 근접할 수도.

“우리 마스터도 강해져야지. 그래야 영훈길드가 대한민국 3대 길드에 이름을 올릴 수 있지.”

강은영이 추운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몸을 뒤척였다.

덮어둔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다시 더 많이 모아다가 덮어줬다.

“우리 마스터 연약하구나. 초인은 쉽지 않겠네. 레벨 7 수준까지만이라도 강해져라.”

2년 반만의 무림 귀환. 아는 얼굴은 얼마나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가장 친했던 무신은 죽음을 확인한 뒤 무림을 떠났고. 그 외에도 알고 지내던 이들 대부분이 세상을 등졌다.

하긴 50년의 세월이었으니, 대다수 늙어서 명을 다했다. 천마의 마교 침공 때 많은 지인이 강호를 지키다가 희생됐다.

좋은 인연도 있었고, 지독스러운 악연도 있었다. 떠나 보냈다고 생각하니 쓸쓸한 향기를 남기는 추억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이런 것일까. 괜스레 먹먹해지는 순간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는데, 멀찍이서 가까워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옷가지를 구해야 할 때였다.

알몸 상태로 나뭇가지를 대충 엮어 중요한 부위만 가린 행색. 잠깐의 수치는 기꺼이 감수하리라 다짐했다.

다행히 사내였다. 치한 취급은 피할 수 있게 됐다.

서서히 다가오는 사내의 얼굴이 뚜렷해진 순간, 유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사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엇! 너는?”

“아아. 자네!”

유지훈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고, 사내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했다.

“살아 있었던 거야?”

“돌아왔군.”

무신 화무결이 살아 있었다.

***

무림으로 귀환

“어떻게 된 거야? 고개가 완전히 꺾이는 걸 보고 떠났는데.”

반가웠다. 무신 화무결.

초췌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형형함이 여전했다.

“고개를 꺾은 게 아니라 꾸벅 존 거였네.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자네가 사라지고 없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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