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타깃 (1)
외교통상부 장관 정태성은 두 시간 만에 어둠에서 벗어났다.
질끈 동여매진 안대가 벗겨지자 유난히 밝은 빛이 눈을 간지럽혔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빛을 잃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러 올 때면 항상 겪는 일이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헤어나기 힘든 암연 같은 존재와 마주하기 때문일 터였다.
“장관님. 오시느라 힘드셨죠? 이렇게 모실 수밖에 없어 죄송해요. 장관님도 제 사정 아시니 이해해 주시리라 믿을게요.”
그녀, 크리스털 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소한 모습이었다. 두 달 전에 봤을 때와 확연히 달라졌다.
정태성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멋쩍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지만,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왜요? 제 모습이 이상해요?”
“아닙니다. 오랜만에 봬서···. 박 여사는 그간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몰라볼 뻔했습니다.”
“꾸준한 관리 덕분이죠. 그나저나 박 여사가 뭐예요. 결혼도 안 한 여인네한테. 미스 박이라고 부르세요.”
잠시 뒤 또 한 사내가 안대를 한 채 응접실로 들어왔다.
정태성이 살짝 눈을 치켜떴다. 아는 얼굴이었다. 지금 여기서 만날 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장관님. 죄송해요. 모셔놓고 다른 분을 함께 자리하게 했네요. 요즘 어려움이 있으셔서 장관님 뵙고 조언 좀 구하라고 오시도록 했어요.”
이제는 사라진 신화그룹의 부회장 이자성이었다.
그 역시 안대를 벗자 빛이 어색한 듯 눈을 껌뻑였다. 두 사람을 알아보더니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박 여사님, 장관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 부회장님. 소식 듣고도 연락 못 드렸습니다. 송구합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모처럼 머리도 비우고 푹 쉬고 있습니다.”
크리스털 박이 이자성에게 자리를 청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신화그룹 다시 일으켜 세울 준비하고 계시잖아요. 저도 그렇고, 여기 장관님도 그렇고. 다들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거예요. 신화그룹 예전보다 더 융성해지도록요.”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다과가 차려졌다.
크리스털 박이 다과를 권하며 논의의 서두를 열었다.
“아시겠지만, 오늘 두 분 모신 건 한일 외무 회담 때문이에요. 최종적으로 준비 상황도 점검할 겸, 당부도 전할 겸해서요. 혹시 어려운 부분 있으면 말씀하셔도 되고요.”
정태성이 한 차례 헛기침한 뒤 준비 상황을 브리핑했다.
대체로 순탄했다. 각성자 회합을 위한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 문제도 깔끔하게 정리됐다. 여전히 여론은 시끄러웠지만,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좋네요. 장관님께서 고생이 많으세요. 이제 2주 정도 남았으니까 차질 없도록 마무리해주세요.”
“한 가지 박 여사와 상의할 문제가 있습니다.”
정태성이 조심스럽게 안건을 꺼냈다.
크리스털 박이 그윽한 시선을 정태성에게 보냈다. 조금은 언짢음을 머금은 눈빛이었다.
“말씀하시죠.”
“각성자 입국에 관해서입니다. 일본 측에서 초인 다섯 분을 보낸다고 했는데, 현재 우리 측에서 참석 가능한 초인이 세 분밖에 안 됩니다. 두 분이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으셔서···.”
“그래서 일본 측 초인 둘을 제외시켜 달라는 말씀인가요?”
“각성자협회에서 국가 안전 본부를 통해 요청해왔습니다.”
“흐음.”
크리스털 박의 표정에 언짢음이 짙어졌다.
“초인을 다섯이나 보내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좀스럽게 숫자를 맞춰달라고 요구해? 옹졸한 놈들. 그러니까 한국 각성자 수준이 일본을 못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도 균형은 맞아야 한다는 견해가 타당하기도 해서···.”
“알았어요. 야마구치 가문 쪽으로 말은 전해볼게요. 다만 자꾸 그런 식으로 양해를 구하면 우리한테 유리할 게 없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성자협회 쪽도 설득해보겠습니다.”
크리스털 박이 당부를 전할 차례였다.
“장관님께서 몇 가지 처리해주실 사안이 있어요. 우선 일본 각성자들의 이동 제한을 해제해주셨으면 해요.”
“아무런 제한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 부분은 민간인에게 위협이 될 수 있어서 국제 관례상으로도···.”
“이번 회합의 주제가 뭐예요? 화해와 공조 아니에요? 꽁꽁 가둬놓고 무슨 화해와 공조가 되겠어요.”
“그래도 제한을 해제하려면 대통령님의 재가가 필요해서···.”
“대통령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정 힘들면 형식적인 제한 정도로 정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 해보겠습니다.”
“변종 몬스터들이 기승이라면서요. 일본 각성자들이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모양인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줘야죠.”
크리스털 박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이자성을 쳐다보더니 떨떠름한 어조로 당부를 이어갔다.
“일본 쪽에선 이번 회담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려고 해요. 야마가토흥업의 대중 예술인들을 대거 동원할 계획이죠.”
“그 이야기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쪽에서도 화답해야겠죠. 그래서 JH엔터테인먼트에 준비를 맡겨 놨는데, 그쪽에 말썽이 좀 있나 봐요. 신화의 누군가가 싸질러 놓은 똥 때문인 모양인데, 그 부분도 좀 해결해주셔야겠어요.”
“그 문제라면 사회적인 논란이 됐던 건이라 무작정 덮기엔···.”
“그러니까 각별히 힘 좀 써달라는 거 아니겠어요. 왜요? 장관님 선에선 힘드세요? 제가 총리님 통해서 처리할까요?”
“아닙니다. 제가 총리님이랑 상의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거기 제 못난 조카 놈도 연루된 모양이더라고요. 잡음 없도록 신경 좀 써주세요.”
이외에도 크리스털 박은 일본 측 편의를 위한 주문 몇 가지를 더 언급했다. 정태성은 꼼꼼히 메모한 뒤 처리를 약속했다.
정태성은 떠났고, 이자성은 남겨졌다.
정태성을 배웅하고 돌아온 크리스털 박의 표정이 싸늘했다. 한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이자성을 노려봤다.
“부회장님. 동생 관리가 그렇게 안 됩니까?”
이자성은 말없이 고개만 조아렸다.
“야마가토산업이랑 진행한 비밀 프로젝트. 어쩌자고 그걸 냉큼 집어삼킬 생각을 할 수 있답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자걸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부회장님 참 못났습니다. 그룹도 빼앗겨, 동생도 어쩌지 못해, 그래 가지고 어떻게 신화그룹을 다시 일으킨단 말입니까?”
“면목 없습니다.”
“동생 설득해서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세요. 안 그러면 대한민국이 쑥대밭이 될 수도 있어요. 야마구치 가주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요.”
“······.”
“모르긴 해도 프로젝트가 다시 정상화되지 않으면 이자걸은 죽은 목숨일 겁니다. 아니. 정상화돼도 죽은 목숨일 수도 있겠네요. 야마구치 가문의 해결사들이 이자걸이부터 찾아간다고 했으니까요.”
“제가 어떻게든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이자성이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제야 크리스털 박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자성을 내려다봤다.
“부회장님. 신화 되찾으셔야죠. 이번에 야마가토산업에서 제대로 지원하겠다고 했어요. 신화그룹을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로 만들어주겠다고 자금까지 대거 준비했다고요.”
“송구스럽습니다.”
“그런데 신화그룹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러니 부회장님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룹을 되찾고 일으키셔야 해요. 저도 정부 쪽에 압력 넣고 있으니까. 부회장님도 힘 좀 내세요.”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오래 가야죠. 야마가토산업의 원대한 그림 아시잖아요. 신화그룹도 같이 가야 하지 않겠어요?”
***
걸그룹 연습생 정예린은 얼마 전 하늘이 무너지는 일을 겪었다.
선배 언니들이랑 클럽에 갔다가 생긴 일이었다.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 일행과 합석을 하게 됐는데, 술 몇 잔 마시며 어울리는 과정에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호텔 방이었다. 침대에 홀로 누워 있었다. 선배 언니에게 물어보니 너무 취해 호텔 방을 잡고 재웠다고 했다.
여전히 찝찝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술 조심해야지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 잊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찝찝함은 시작에 불과했다.
며칠 뒤부터 그녀를 바라보는 소속사 남자 선배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 언니들까지.
알아보니 영상이 있었다. 이른바 성행위 몰카 동영상이었다. 장소는 필름이 끊겨 잠들었다 깨어난 호텔 방이었다.
그 즉시 클럽에서 합석했던 남자들에게 연락해 따졌다. 다들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오히려 그녀를 힐난했다. 함부로 처신하고 다니니 그런 일을 당하는 거라고.
별수 없었다. 경찰에 알리는 수밖에.
소속사 자문 변호사와 상의해 고소장을 작성해 제출했지만, 연락이 온 곳은 경찰서가 아니라 문제의 아이돌 그룹 멤버 소속사였다.
JH엔터테인먼트 강재현 회장이 만나서 관련 문제에 대해 상의하자고 연락한 것이었다.
정예린은 소속사 대표와 함께 JH엔터테인먼트로 찾아갔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 엔터테인먼트 기업답게 사옥부터 웅장했다. 중소 기획사 소속인 그녀는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위축됐다.
강재현은 K팝의 아버지라 불리는 연예계 최고 실력자였다.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 신인을 띄울 수도 주저앉힐 수도 있었다.
정예린은 강재현과 마주한 순간부터 기가 죽었다. 동행한 소속사 대표는 동석한 자체만으로 황송스러워 했다.
문제가 됐던 날 함께했던 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정예린은 분위기에 압도돼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어느 틈에 피해자가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 가해자들 사이에서 벌벌 떠는 신세가 돼 버렸다.
“예린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차근차근 말해 볼래?”
강재현은 자초지종부터 털어놓으라고 했다.
필름이 끊겨 기억나지 않는, 기억나더라도 말도 꺼내고 싶지 않은, 잊어버리고만 싶은 일을 스스로 꺼내놓으라는 잔인한 주문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그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억지로 쥐어 짜낸 기억을 더듬더듬 쏟아내야 했다.
“기억하는 게 아니라 추측한 거네?”
“그, 그게 어떻게···.”
“필름이 끊겼다며? 그럼 기억도 안 날 거 아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어떤지 모르는 일이잖아.”
“동영상이 있어요. 돌아다니는 걸 저도 얼핏 봤어요.”
차마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얼핏 봐도 자신인 건 모를 수 없었다.
“얼핏 봤다고? 그럼 예린이 네가 아닐 수도 있겠네.”
“아니에요. 틀림없이 저 맞아요.”
“그럼 동영상을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강재현이 그날 정예린과 합석했던 이들을 둘러봤다. 소속 아이돌 그룹 멤버와 솔로 가수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었다.
“동영상 있으면 좀 가져와 봐라.”
“동영상 같은 거 없습니다.”
비릿한 웃음과 어우러진 대답이 들려왔다.
강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동영상 같은 거 없다는데? 예린이 네가 잘못 본 거 아닐까?”
“아니에요. 제가 틀림없이 봤어요.”
“아닙니다. 동영상 같은 거 틀림없이 없습니다.”
비릿한 웃음은 조롱 섞인 웃음으로 바뀌어 갔다.
정예린은 결국 울음을 터트려야 했다.
“예린아. 경찰에 고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오히려 너만 힘들어져. 당장 봐라. 너는 기억도 못 하면서 뭔가 당했고 영상도 찍혔다고 하는데, 동영상 같은 건 없다잖아.”
“저는 분명히 제가 찍힌 동영상 봤어요.”
“그래. 동영상 봤다고 치자. 그래서 경찰로 넘어갔어. 증거 있나? 동영상 없다는데? 그러면 거기서 그냥 끝이야. 그럼 내가 너를 가만히 두겠어? 내 한마디면 앞으로 너는 연예계에 발도 못 붙여.”
“흑흑흑.”
“또 봐라. 네가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는데, 경찰서가 아니라 여기서 나랑 이야기하고 있잖아. 그 정도는 내 선에서 막을 수 있다는 뜻이야. 결국엔 너만 힘들어지는 거지.”
강재현이 회유에 들어갔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잘 끝내자. 우리 애들 때문은 아닌 것 같지만, 힘든 일 겪었으니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성의는 표시할게. 앞으로 예린이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소속사 대표마저 거들고 나섰다.
“그래. 예린아. 회장님 말씀대로 하자. 경찰서 가봤자 너한테 좋은 결과도 없을 것 같아. 차라리 회장님 지원받아서 데뷔도 하고, 성공도 하는 것으로 하자.”
역겨웠다. 구역질이 턱밑까지 치솟았다.
가까스로 참았지만, 북받치는 울음과 함께 기어코 밀려 올라왔다.
눈물을 쏟으며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순간, 문 앞에서 서성이던 낯선 사내와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많이 놀랬죠?”
사내가 정예린을 일으켜 세우더니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어 문을 걷어차고 사무실로 달려 들어갔다.
“너 이 새끼들 딱 걸렸어. 안 그래도 동영상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또 동영상이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