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중모색
[박수정. 영어 이름 크리스털 박. 개명 전 이름 박순덕. 1975년생. 출생지 대구. 최종 학력 대졸(서울대 경영학과 94학번). 각성 여부 미상. 가족 관계 미상. 주거지 불명]
SSG가 확보한 박수정의 기본 정보였다.
눈에 띄는 대목은 최종 학력이었다. 화류계 거물이었다고 했는데,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다.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분명했다.
사진이 없었다. 용모를 확인할 수 없었다.
“사진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외모가 하도 자주 바뀌어서요. 어제 만난 사람이 오늘 보고도 못 알아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성괴겠군요.”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뀐 얼굴마다 자연스럽다고 들었습니다. 성형 수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요.”
이윤성이 사진 대여섯 장을 보여줬다. 최근 1년 사이 찍힌 사진들이라고 했다. 하나같이 다른 여인이었다. 물론 대단한 미모의.
용모가 달라져도 동일인이면 눈빛이나 아우라는 비슷해야 하는데, 이 또한 확연히 달랐다.
“역용술이라도 익힌 건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닙니다. 혹시 원래 얼굴은 없습니까? 졸업사진이라든가.”
“안 그래도 보여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윤성이 졸업 앨범 사진을 보여줬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퉁퉁한 데다가 심술궂은 인상이었다. 외모 콤플렉스를 가질 법한 용모이기도 했다.
“뭔가 비상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군요.”
“뭐가 말씀입니까?”
“화류계로 진출한 거요.”
“흐음. 안 그래도 그 부분을 조사해봤는데, 뚜렷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동문들도 아는 게 없다고들 하고요. 졸업 이후엔 연락 한번 없었다고···.”
철저하게 베일에 감춰진 인물이었다.
무림에도 비슷한 유형의 인사들이 있었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오문의 문주와 비궁의 궁주였다.
비궁주가 중년 여인이었으니, 박수정과 가장 유사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맹의 배후 실력자로 정도 무림과 상계를 좌지우지한 점도 박수정과 닮아 있었다.
‘비궁주 그 여인네가 나를 지독스럽게도 미워했지. 밥 한번 같이 먹자는 거 거절했다고, 무슨 앙심을 그리 심하게 품었는지···.’
유지훈이 무림 공적으로 몰린 이유 중에 비궁주의 역할이 컸다. 화공대법을 거론한 것도 비궁주였다.
그 전까지는 스리슬쩍 소멸기를 작렬시킬 수 있었기에 아무리 강한 상대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는데. 비궁주 때문에 꼬였다.
도발에는 응징이라는 원칙을 적용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절세의 역용술 때문에 찾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비궁주의 악행이 드러나 무림맹 차원에서도 처단에 나섰지만, 무려 3년을 피해 다녔다. 당대 천하제일인 무신까지 나섰음에도.
어떻게 제거에 성공했더라···.
“가족 관계가 미상으로 돼 있군요?”
비궁주의 약점은 숨겨둔 아들이었다. 모성애 때문에 몰락했다.
박수정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을 터였다. 가족이 있다면 아킬레스건에 가장 가까울 텐데.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요?”
“없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행정 시스템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친척 쪽만 몇 명 검색되는 정도입니다. 크리스털 박이 정부에 압력을 넣어 조치한 게 아닐까 여겨집니다.”
“친척이면 전에 고모 찾던 망나니 놈이겠군요.”
파면 팔수록 대단한 여인이었다. 무림을 쥐고 흔들었던 비궁주보다 지독한 심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의문점이 하나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풀렸네요.”
“뭐가 의문스러우셨습니까?”
“박수정을 제거할 수 없었다던 이유요.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동영상들이 공개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습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
“박수정을 잡아놓고 죽기 싫으면 동영상 내놓으라 하면 되지 않나 생각했어요. 아무리 대단한 여인네라 해도 죽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이제 보니 잡아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겠네요.”
이윤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워낙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모습을 드러낼 때면 항상 옆에 탁세현 초인이 있으니 잡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자기면책권이 걸림돌이 됐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어찌어찌 크리스털 박의 신병을 확보한다고 해도, 불법 체포가 될 테니까요. 탁세현 초인이 손을 써도 자기면책권을 발동할 수 있으니. 불필요한 희생만 발생했을 겁니다.”
SSG, 비밀전략국은 재미있는 조직이었다.
지금 이윤성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SSG의 비밀 사무실이었다.
외양상으로는 안마의자 대리점인데, 창고로 들어오면 지하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지하실에 초현대식 비밀 사무실이 있었다.
“위에 영감님들 안마의자 하나씩 차지하셨던데, 의심 안 하십니까?”
“안마에 진심이신 어르신들입니다. 오히려 위장에 도움을 주시죠.”
SSG의 상임 요원은 서른 명이었다.
이윤성과 측근 세 청년을 중심으로 내근 인력 다섯과 현장 요원 스물둘로 이뤄져 있었다.
금강길드 마스터 최금강은 비상임 요원이었다. 비상임 요원은 각자 직업을 가진 상태로 SSG의 임무도 겸했다. 서른 명 안팎이라고 하는데, 서로 간에도 비밀이라고 했다.
오직 이윤성만이 비상임 요원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유지훈 또한 비상임 요원 자격으로 SSG에 합류한 것이었다.
“모든 국가 정보기관 시스템에 접근 권한이 주어지니 좋네요. 대한민국의 모든 일이 제 손바닥 안에 있는 기분이에요.”
“조회 기록은 남습니다. 그 부분은 유의해주십시오.”
“저한테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범죄자 여부만 확인하면 돼요.”
자기면책권 발동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누구든 범죄자로 확인만 되면 손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규모는 작았지만, SSG의 권한은 대단했다.
정보기관 시스템 접근권 외에 검찰, 경찰, 각성자수사청 등 모든 수사기관 인력 동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비상시엔 군 병력도 가능했다.
일개 로비스트인 박수정을 해결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박수정의 엄청난 심계와 초인 탁세현의 존재 때문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저희가 유지훈 씨를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초특급 몬스터를 두 마리나 퇴치하시고 여기 오셔서···.”
“돈 많이 벌었는데요. 뭐.”
1주일 사이 변종 몬스터를 두 마리나 처치했다. 한 번은 마철진과 협력 작전, 또 한 번은 최금강의 금강길드와 협력이었다.
혈독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마철진과 최금강에게 해치우도록 했다. 앞으로 유지훈이 나서지 않고도 변종 몬스터를 퇴치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전해준 것이었다.
대신 부산물에 대한 지분은 4 대 6으로 줄었다. 그래도 50억 원 가까운 거액을 영훈길드의 수입으로 잡을 수 있었다.
“지난번에 도망간 거대악어가 어찌 될지 모르겠네요. 그놈만 아니면 이제 저는 이 일에 집중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놈 혈독 구조는 보지 않고는 예상하기 힘들어서요.”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리스털 박 문제는 차근차근 접근하시죠. 속도보다 확실한 처리가 중요하니까요.”
“그래도 한일 외무 회담 전에는 끝내는 게 좋지 싶어서요. 쪽발이 놈들이 들어오면 힘들어질 수 있으니···.”
한일 외무 회담 개최까지 2주 남짓 남았다.
양국 각성자 회합을 위한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은 그보다 이틀 정도 빠를 것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꼭꼭 숨어 있는 인물을 끌어내려면 주변을 잘 들쑤셔야 합니다. 아킬레스건이 될 만한 것들을 쑤셔놓고 보는 거죠.”
유지훈이 태블릿 PC에 두 인물을 띄웠다.
국회의원 하나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기업 오너였다. 박수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구린 구석이 두드러진 놈들이에요. 범죄 사실도 명시돼 있으니 좀 심하게 쑤셔도 문제 될 건 없겠죠.”
자기면책권의 범위 내에 있다는 의미였다.
“구린 구석이 많다는 의미는 박수정이 개입한 이권에 연루됐다고 해석할 수 있겠죠. 일단 쑤셔보겠습니다. 마구마구. 봐서 박수정이 움직일 것 같으면 같이 움직이시죠.”
***
제법 장기간 요원했던 인물이 있었다. 항상 등장했지만, 요즘 들어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인물이었다.
국가안전본부 국장급 프리에이전트 겸 영훈길드 마스터 강은영이었다. 잊혀질 만하니 등장했다. 다만 전화상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요? 연락도 잘 안 되고.]
“언제 연락을 하긴 했어? 전화 온 거 없던데···.”
[하긴. 나도 바빠서 전화도 못 했구나.]
“바쁠 게 뭐가 있다고. 양쪽에 다리 한 짝씩 걸쳐놓고 요리조리 빠져 다니며 탱자탱자하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 말아요!]
강은영이 발끈했다.
[요즘 변종 몬스터 때문에 죽을 지경이에요. 탐사 전문가라고 차원 에너지 변동만 감지되면 나더러 출동하라고 한다고요.]
“차원 에너지 변동이 자주 감지되나?”
[최근 1주일 사이 스무 번 정도 감지됐어요.]
“그래서 변종 몬스터는 찾아낸 거야?”
[꼭 그런 건 아닌데요. 세 마리 정도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요. 초특급 두 마리에, 특급 한 마리로 추정돼요.]
“초특급 중에 한 마리는 지난번의 거대악어 놈이겠군.”
왠지 신경 쓰이는 놈이었다.
원래부터 유지훈은 악어를 싫어했다. 안 그래도 강한 놈이 물속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덥석 물어가는 행태가 못마땅했다.
동물의 왕국을 보다가도 악어만 나오면 돌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변종 몬스터 거대악어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영훈길드에도 신경 좀 써. 마스터가 돼서 너무 무심한 거 아냐?”
[안 그래도 와 있어요. 길드원들 토하고 난리도 아니네요. 단체로 식중독에라도 걸린 줄 알았어요.]
“오호! 토하면 토할수록 강해지게 돼 있지. 잘 봐줘. 다음 주쯤 레벨 4 던전에 실습 데려가는 것도 있지 않았지?”
[최금강 마스터님한테 부탁해서 예약 잡아놨어요. 그런데 가도 되는 거예요? 가서 대거 송장 치르고 오지나 않을지 모르겠어요.]
“안 그러도록 하는 게 우리 마스터 역할이지.”
[칫! 이럴 때나 마스터 찾고···. 그나저나 어디예요? 변태 자식이랑 같이 있어요?]
여전히 강은영에게 SSG 이윤성 국장은 변태 자식이었다.
멀쩡한 양반 변태로 몰아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바로잡아줄 때도 됐다.
“같이 있다가 헤어졌어. 그런데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마. 내가 그 양반 이름 알아냈어.”
[오올~! 역시 유지훈 씨 정보력 대단한데요!]
“대단하긴 뭘. 그 양반이 직접 알려준 건데. SSG라고 비밀전략국 국장이래. 이름은 이윤성이고.”
[나랑 같은 국장이네요. 대단할 것도 없는 양반이었어.]
“그나저나 나도 이제 그쪽처럼 양다리 걸치게 됐다. SSG 비상임 요원으로 위촉됐어.”
[그건 좀 부럽네요. 그나저나 나도 이름 불러줘요. 맨날 그쪽이 뭐예요. 그쪽이.]
“이름? 좀 남사스러울 것 같은데. 은영이 원한다면.”
[흐억! 확실히 남사스럽네요. 익숙해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요.]
그래도 이름이 불리니 기분이 좋은 듯했다. 전화상으로도 흥겨워하는 게 느껴졌다. 아 소리가 들렸다. 뭔가 생각난 듯했다.
[그러고 보니 탁세현 초인이 유지훈 씨와 협력을 요청해왔어요.]
“탁세현 초인이?”
[네. 신화길드 폐업한 이후 협력 길드가 없는 상태잖아요. 대형 길드 몇 군데 추천했는데, 족족 거절하더니 난데없이 유지훈 씨를 찾네요.]
“으음···.”
의도가 궁금한 대목이었다.
변종 몬스터 퇴치를 위한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박수정 차원에서 모종의 대응에 나선 것인지.
후자라면 유지훈도 대비가 필요했다. 아직 탁세현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 방법은 강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요? 탁세현 초인이랑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부담스러우면 거절한다고 해도 안 될 건 없어요.]
“부담스러울 게 뭐 있어. 거절할 필요는 없는데. 2, 3일 정도는 힘들 것 같아.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그럼 사흘 지난 후에 변종 몬스터 출현하면 협력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전할게요.]
아직 의도는 모르겠지만, 탁세현이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박수정의 주변을 들쑤시기도 전이었다. 들쑤신 이후라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겠지.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확실히 처리해야 했다.
두 타깃 중 누구를 먼저 들쑤실지 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 처맞아야 할 놈을 먼저 들쑤시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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