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58화 (58/150)

진격의 소시오패스

“생각보다 빨리 만나 뵙게 됐군요.”

이자걸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유지훈을 반겼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수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예절. 첫인상은 좋았다.

이자성이나 이자웅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였다. 이나연과도 비슷하면서 달랐다. 묘한 분위기였다.

깔끔하게 면도한 하얀 피부가 창백했다. 음침한 지식인이라고 하면 어울리는 표현이려나.

“계신 곳으로 제가 찾아갔어야 했는데, 이렇게 어려운 걸음 하시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약속을 잡기 위해 이나연에게 연락하자, 바로 이자걸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훈길드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유지훈이 거절했다. 유지훈에게 이자걸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인물이었다. 탐색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소굴로 쳐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의 만남은 신화전자 대표이사 집무실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내가 아직 이자걸 대표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만은 않아서요. 영훈길드에 오게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가시 돋친 언사로 첫인사를 건넸다.

이자걸은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저희 신화그룹이, 이제는 사라졌지만요, 유지훈 씨에게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저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겠죠. 다시금 사죄드립니다.”

“사죄는 동생분 통해서 충분히 받았어요. 아직 제가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말씀 돌려드렸고요.”

“나연이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도움 주시기로 하셨다죠.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됐습니다. 인사치레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자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을 펼쳐 내밀었다. 먼저 이야기하라는 의미인 듯했다.

유지훈이 서두를 열었다.

“이나연 씨 부탁은 수용하기로 했지만, 의미는 다르다는 걸 이 대표도 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에 대한 의심을 지우진 않았다고 하셨다죠.”

“맞습니다. 저는 이 대표를 의심합니다. 야마가토 놈들의 행태를 응징하는 부분은 함께하더라도, 이 대표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부분도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겁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그럼 어떤 부분이 의심스러우십니까? 물어보시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답해드리겠습니다.”

이자걸은 당당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는 태도였다.

유지훈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내가 잘못 의심하고 있었던 건가?’

확인할 건 해야 했다. 맺고 끊을 건 분명히 해야 했다.

“야마가토산업과 함께 몬스터를 대상으로 실험한 진행한 장본인이 이 대표라고 의심됩니다. 아울러 이를 이자웅에게 덮어씌우고 죽인 것 역시 이 대표라는 심증도 있습니다.”

유지훈은 이자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진실을 감출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림 생활 50년. 유지훈은 눈을 통해 진실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와중에 한 마디 추가했다.

“물론 이 대표가 직접 죽이진 않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자걸은 눈매를 살짝 좁히더니 지그시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너무 자신 있게 대답하시는군요.”

“아니니까요. 아닌 건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드려야죠.”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자, 이자걸이 손을 저었다.

“오해하신 모양이군요. 아니라는 말은 제가 직접 죽인 게 맞다는 의미입니다. 실험과 연구 또한 제가 진행한 게 맞고요.”

“역시 그렇게 말씀하시는···. 네???”

“말 그대로입니다. 다 제가 한 일들입니다.”

유지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말문이 막혔다.

사실일지라도 어떻게든 둘러대야 정상인데.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인정해버렸다.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엿보이기까지 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거야 원···. 칭찬이라도 받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칭찬받아도 될 만하다고 여겨지긴 합니다. 유지훈 씨가 칭찬할 것 같진 않아 보이긴 하지만요.”

“그걸 말이라고 해!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을 실험이야. 당신은 동생을 죽여가면서 결과를 독차지하려고 한 거고!”

급기야 유지훈이 폭발했다. 억지로나마 갖추고 있던 예의도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냈다.

이자걸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진행한 실험이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었다고요? 오히려 그 반대 같은데요?”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야!”

“실험이 도의적으로 문제인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면 감안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가 나라를 위한다는 거야?”

이자걸이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진심이 통하지 않아 안타깝다는 눈치였다.

“실험 결과로 야마가토 놈들을, 또 일본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다면, 대한민국을 위해 활용하는 거 아닐까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말 같은지 어떤지는 지켜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자걸은 당당했다. 당당해도 너무 당당했다.

유지훈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혼란에 빠질 지경이었다.

“실험 결과를 독차지했다고요? 맞습니다. 독차지했어요. 그걸 일본 놈들한테 넘겨줄 순 없으니까요. 일본 놈들 빅엿을 먹이기 위해 제가 독차지했습니다.”

“허어···.”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논리에 구멍도 없었다.

애국지사를 의심했다는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신묘한 설득력의 논리는 이어졌다.

“자웅이를 죽인 거요?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각성이 권력이라고 우기더군요. 각성은 의무여야죠. 형으로서 그런 정신 상태를 가진 놈을 살려둬선 안 되겠다는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잘 하셨네요···.”

존댓말로 돌아왔다. 반말을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왠지 제대로 말릴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실험 결과라는 거 약 맞습니까?”

“정확하게 맞습니다.”

“각성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효능을 지닌 약이죠?”

“복용자를 만나보신 모양이군요. 물론 나카무라 형제겠죠.”

“나카무라 히로. 형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자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테스트 단계에 불과한 약이었습니다. 최근에 시제품을 완성했습니다. 임상 실험 결과도 만족스러웠고요.”

“그럼 더 높은 단계로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비각성자에게도 능력을 선사하죠. 한마디로 각성을 창조한다고 할까요? 임시로 기프트라 명명했습니다.”

다시금 유지훈이 입을 떡 벌렸다.

각성의 창조라니.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눈앞의 사내는 신의 영역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었다.

“임상 실험에 성공했다고 하셨습니까? 대상이 누구···?”

“접니다. 각성이 권력이라는 놈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깟 권력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다고요. 다만 가르침을 받자마자 죽었군요.”

“하아···.”

이제 한숨도 제대로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자걸은 의기양양해져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좋은 걸 일본 놈들한테 넘겨줄 순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일본 놈들을 상대로 써야죠.”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겁니까?”

“방법이야 많죠. 생각해둔 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몬스터들을 일본 열도에 좍 풀어놓는 거? 아! 그 약이면 일반 짐승도 각성의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몬스터로 재탄생시키는 거죠.”

“마음대로 하세요. 어처구니는 없지만, 통쾌할 것 같기도 하네요.”

순간 유지훈의 뇌리에 언짢은 생각이 떠올랐다.

변종 몬스터의 출몰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변종 몬스터들도 이 대표 짓입니까?”

“저와 상관없습니다. 연구 용도를 다한 실험 대상들은 확실히 폐기 처분했습니다. 다만 야마가토제약에서 파견 나온 연구원들이 일부 개체를 빼돌렸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야마가토 놈들 소행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인공 몬스터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일본에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유지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자걸은 유쾌한 웃음으로 박자를 맞췄다.

“독도가 지네 땅이라고 우길 때부터 빅엿을 먹이고 싶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 같군요. 그놈들이 도와준 결과라 더욱 통쾌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한데,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말리는 한편으로 묘하게 빠져드는 기이한 양상이었다.

“유지훈 씨가 도와주신다고 하니 정말 든든합니다. 함께 손잡고 일본 놈들에게 그레이트 엿을 먹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긴 한데···. 그래도 되는 건지···.”

계속 말리다 보니 정작 중요한 목적을 까먹을 뻔했다.

탁세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나연 씨가 언급한 신화를 조종하려는 실력자, 크리스털 박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성심성의껏 답해드리겠습니다. 저희를 도우려 하시는 걸 테니까요.”

“크리스털 박을 비호하는 자가 탁세현 초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탁세현 초인은 신화길드와 협력을 빌미로 그룹을 좌지우지하려 들었습니다.”

“크리스털 박과 고리를 끊겠다고 하셨는데, 탁세현 초인을 상대할 복안 같은 건 있습니까?”

“아!”

이자걸이 짧은 탄식과 함께 머리를 두드렸다.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야마가토 놈들만 생각하느라 탁세현 초인을 계산에 넣지 못했네요.”

“사실 탁세현 초인 때문에 이 대표를 만나자고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대라···.”

“저 역시도 탁세현 초인은···. 같이 고민해보시죠. 둘이 머리를 맞대면 좋은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요? 제겐 머리가 있고.”

이자걸이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유지훈 씨에겐 동물적인 감각이 있으니까요. 초자연적인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유지훈은 코웃음으로 반응했다.

스스로 머리를 논하다니. 건방지게 들려야 했지만, 인정할 만하다는 공감이 우세했다.

뭔가 많은 걸 얻은 것 같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놓친 상황이었다. 별수 없이 이자걸과 손을 잡아야 했다.

“혹시 이 대표 소시오패스라는 말 종종 듣지 않습니까?”

“소시오패스요? 들을 필요 없는 말입니다. 소시오패스 맞거든요.”

이 인간은 물어보기만 하면 다 맞대.

소시오패스라니까 좋다고 반응하기까지. 정말 불가해한 인간이었다. 짜증스러운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했다.

“소시오패스인 걸 즐기는 것 같네요?”

“싫어할 이유가 있습니까? 부정적으로들 생각하시는데, 소시오패스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자걸이 오른손 검지를 까닥이며 말을 이어갔다.

“공감 능력이 많이 부족해도, 좋은 목적을 향해 역량을 발휘하면 선이 될 수도 있거든요.”

“목적이 좋더라도 수단이 좋지 않으면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악은 목적만으로 구분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제 기준엔 좋은 목적을 향해 방향을 유지해 가면 결국엔 선에 당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단의 선악을 구분하느라 방향이 흔들리다가 정작 선을 향한 길을 잃어선 곤란할 테니까요.”

유지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논리로 소시오패스를 이기긴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대표와 저는 뇌 구조 자체가 다른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번엔 목적이 같으니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대표의 수단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악으로 간주하진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단!”

유지훈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이 대표의 목적이 달라지는 순간, 그 목적이 선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그 즉시 처단할 겁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만만치만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목적까지는 몰라도 방향만큼은 유지훈 씨와 일치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어쨌거나 동맹이 이뤄졌다.

유지훈은 이자걸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앞으로 우리 사이에 대화는 없었으면 싶군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말리는 기분이라···.”

“저는 유지훈 씨와 대화가 즐겁기만 합니다만.”

“그건 당신 사정이고!”

모처럼 버럭 하고 나니 불현듯 누군가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묻고 또 물어도 환영입니다.”

“이나연 씨도 실험 대상이었습니까?”

잠재된 이나연의 거대한 기운이 이자걸이 개발한 약의 효과가 아닌지 의심돼서 던진 질문이었다.

이자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알쏭달쏭한 웃음이었다.

“나연이가 유지훈 씨 길드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죠?”

“그렇긴 합니다만.”

“받아주시죠. 드러난 능력 이상을 발휘할 겁니다. 길드에 속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요.”

즉답은 피했지만, 충분히 답이 될 만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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