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달다 (3)
“초인이라고요? 초인 누구요?”
대격변의 시대에 초인은 국격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런 초인이 국정을 어지럽히는 인물과 한편에 서 있는 것만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탁세현 초인입니다.”
국가안전본부 비상 대책 회의에서 만난 인물이었다.
그다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별다른 발언도 없이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하기만 했다.
유지훈은 탁세현에게서 음험함을 느꼈다.
특히 일본 각성자 입국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논쟁을 지켜보는 것을 즐기는 듯한 태도.
심지어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을 찬성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역시 그랬군요.”
“뭐가 말인가?”
대통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탁세현 초인이요. 회의 때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에 찬성하는 것 같았거든요. 크리스털 박이랑 교감이 있었던 거죠.”
“그랬겠지. 탁세현 초인은 일본 유학파이기도 하네. 일본 각성자들이랑 친분이 두터운 대표적인 지일파일세.”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 하나.
“탁세현 초인은 왜 박순덕을 비호하는 거죠? 혹시 그 영감도 몰카 동영상이 있는 건가요?”
“그렇진 않은 듯합니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남녀 관계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윤성의 대답에 대통령이 부연했다.
“초인쯤 되면 동영상 따위 있으면 어떤가. 우리 같은 정치인들처럼 이미지로 먹고사는 것도 아닌데. 유명 배우와 동영상 정도는 훈장으로 여길 수도 있을걸세.”
“하긴. 자랑스러울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누구예요? 그 여배우.”
“자네 자꾸 이러긴가!”
“은근슬쩍 여쭤봤는데, 안 넘어오시는군요.”
이윤성이 탁세현에 대해 추가로 설명했다.
“탁세현 초인은 신화길드와 협력 관계였습니다. 크리스털 박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로 여겨집니다. 탁세현 초인이 협력 관계를 빌미로 신화그룹에 많은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철진 영감님도 신화길드와 협력 관계였잖습니까?”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철진 초인이 몬스터 퇴치 등의 임무에서 협력 작전을 진행했다면, 탁세현 초인은 아예 신화그룹 위에 군림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나연의 부탁이 떠올랐다.
야마가토산업과 크리스털 박을 상대하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부탁.
어쩌면 탁세현을 겨냥한 부탁일 수도 있을 듯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대통령과 대화에 집중할 때였다.
“그래서 오늘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크리스털 박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좀 더 구체적으로는 탁세현 초인을 맡아줬으면 하네.”
하다 하다 초인을 상대해달라는 부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비각성자한테 초인이라니. 귀환자라 그런 걸까?
귀환자를 전가의 보도로 여기는 풍조. 짚고 넘어가야 했다.
“돕는 건 좋은데, 왜 제가 탁세현 초인을···? 초인은 초인에게 맡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윤성이 나서서 해명했다.
“초인은 국력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초인들끼리 싸우다가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저는 다쳐도 된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유지훈 씨는 다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윤성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뭔가 아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혹시 소멸기를 아는 건가? 재생 능력도?
“도와주게. 대한민국을 위해 박순덕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네.”
“아까 살인의뢰는 안 하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박순덕은 사람이 아닐세. 마녀야. 이건 살인의뢰가 아니야.”
“흐음···.”
유지훈이 잠시 고민했다.
수락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초인을 상대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을 공짜로 할 순 없었다. 뭔가 얻을 게 있어야 했다.
초인을 상대하는 부분 또한 생각할 게 많았다. 물론 수락 후 고민할 문제이긴 했지만.
“자네가 야마가토산업을 상대로 뭔가 하려는 거 아네. 박순덕은 야마가토산업과 한 몸이나 다름없어. 박순덕을 제거하면 야마가토산업의 국내 암약이 위축될 걸세.”
“좋아요. 도울게요.”
유지훈이 수락했다. 다만 공짜는 아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든 말하게. 가능한 한 다 수용하겠네.”
“우선 첫 번째로.”
유지훈이 말을 끊고 이윤성을 쳐다봤다. 일전에 요청했던 내용의 확대 버전이기 때문이었다.
“박순덕을 제거하든, 탁세현 초인을 상대하든,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제법 나올 거예요.”
“아무래도···.”
“그에 대한 확실한 정리가 필요해요. 불필요하게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말이죠.”
“그거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윤성이 나섰다. 문제가 던져지면 빠르게 답을 찾아내는 스마트한 인사였다.
“유지훈 씨에게 자기면책권을 부여하면 됩니다.”
“자기면책권? 그건 초인에게나 해당하는 권한 아닌가?”
“초인이 되면 대통령령에 따라 자동으로 부여되는 권리입니다. 유지훈 씨는 초인에 준하는 능력자니 대통령님께서 특별 명령으로 자기면책권을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긴. 초특급 몬스터를 두 마리나 퇴치한 영웅이니. 자기면책권을 부여할 명분은 확실하군.”
“앞으로 변종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유지훈 씨와 마철진 초인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기면책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겠군.”
이윤성이 유지훈에게 당부했다.
“자기면책권이 성립하기 위해선 조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남용을 막기 위한 법적 조항입니다.”
“어떤 조건이요?”
“우선 범죄자를 상대했을 때만 성립합니다. 빌런을 겨냥한 조항이긴 한데, 굳이 빌런이 아니더라도 범죄자이긴 해야 합니다.”
“또 있나요?”
“부득이하게 죽이게 됐을 경우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증 책임은 유지훈 씨에게 있습니다.”
“죽이면 안 된다는 의미네요.”
“최대한 조심해 달라는 당부로 받아들여 주시길.”
이윤성이 한 마디 덧붙였다.
“자기면책권은 형사상 책임에만 해당합니다. 민사상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깽값은 물어줘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게 뭐야. 말짱 꽝이잖아. 좋다 말았네···.”
“대신 국가에서 변상합니다. 그러니 조심해주십시오.”
“대통령 영감님 돈 많이 준비해두셔야겠네요.”
일단 유지훈이 자기면책권이라는 날개를 달았다.
이제 두 번째 조건을 제시할 차례였다.
“어쨌거나 대통령님의 실수로 인해 국정이 어지러워진 것이잖아요. 그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는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방식에 대해선 대통령님께서 고민하셔야겠죠.”
대통령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유지훈이 낭랑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저는 대통령님을 위해 이번 일을 수락한 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유지훈이 대통령을 향해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인 뒤 계속 말했다.
“박순덕이 동영상으로 협박하는 고위층 인사가 많다고 하셨죠. 대통령님 이후 그 자리에 앉을 분이 또 그러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수락한 겁니다.”
“뭐라 할 말이 없군. 그저 참담할 뿐이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님께서도 뭔가 행동에 나서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숙고해주십시오. 이것이 제 두 번째 조건이자 부탁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알겠네.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이광진 대통령과 만남이 종료됐다.
유지훈은 자기면책권이라는 날개를 달았지만, 한편으로 초인을 상대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됐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초인을 상대로 유지훈의 승산은 이 할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재생 능력과 소멸기의 효과적인 활용이면 이 할의 승산으로도 충분할 수 있을 테지만.
전략이 중요했다. 아울러 생존을 위해 여태껏 고수해온 원칙도 접어둘 때였다. 발상의 전환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
중요한 임무를 맡게, 아니 사실상 떠안게 됐다.
영훈길드가 출범한 지 보름도 채 안 됐는데, 한동안 거리를 둬야 할 상황이 됐다.
이윤성을 비롯한 SSG 요원들과 밀착해서 임무를 진행하기로 했다. SSG의 비밀 사무실에서 보낼 시간이 많아질 형편이었다.
물론 임무에 영훈길드 구성원들을 참여시킬 순 없었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꿈나무들을 사지에 끌어들여선 곤란했다.
게다가 이들은 길드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일만 하게 할 계획이었다. 몬스터 사냥. 거기에 맞게 단련 프로그램도 제공했다.
SSG에 합류하기 전 마지막 점검을 진행했다.
“하라고 한 단련들은 꾸준히 하고들 있었냐?”
세 가지 단련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모두에게 동일했다.
기초 체력 훈련으로 기마 자세 2시간과 산행 구보 3시간 그리고 삼재검법 23개 초식 각각 200차례씩 수련이었다.
삼재검법은 외팔이 검객 이상목에게 담당하도록 했다. 두 달 전부터 익히기 시작해 제법 그럴듯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마 자세와 산행 구보는 각자에게 믿고 맡겼다. 일일이 감시할 순 없으니. 각자 양심껏 하되 발전 상황을 점검해 미흡하면 어마어마한 페널티가 주어질 거란 경고만 던져줬다.
“죽겠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말했잖아. 토할 때까지라고.”
농땡이 피운 놈들은 없는 듯했다. 근력과 순발력이 그럴듯한 수준까지 올라온 양상들이었다.
“오늘은 효과적인 몸놀림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원래 기초 체력 훈련 한 달 진행하고 레벨 4 던전 실습 다녀온 뒤 가르쳐줄 계획이었는데, 내가 일이 좀 생겨서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그럼 레벨 4 던전 실습은 안 가도 되는 겁니까?”
“안 가긴 왜 안 가! 마스터가 인솔해서 갈 거야.”
강은영도 국가안전본부 일로 바쁜 모양이었다. 영훈길드엔 잠깐씩 들러 얼굴만 비췄다가 복귀하곤 했다.
그래도 유지훈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는 최대한 시간을 내서 길드 구성원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마철진도 사흘에 한 번씩 찾아와 효과적인 마나 운용법 등을 전수해주기로 했다. 마나에 관해 유지훈은 문외한이니, 마철진의 도움이 절실했다. 유지연을 내세운 협박이 제대로 통한 결과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동작들 잘 기억해뒀다가 각자 단련하도록 해라. 기존 훈련들에 추가로 2시간씩 하는 것으로.”
“아이고. 매일 훈련만 10시간씩 하게 생겼네요.”
“레벨 4 던전 실습 가서 살아 돌아오고 싶으면 토 나올 때까지 해.”
가르치려는 건 신법이었다.
무림에서 익혔던 신법 중 기초적이면서도, 몬스터를 상대할 때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신법이었다. 점창파의 비응신법을 기반으로 유지훈이 직접 변형해 만들었다.
세 차례 시범을 보인 뒤 따라 하도록 했고,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방식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길드원들의 훈련을 지켜보며 유지훈은 머릿속으로 앞으로 상대할 강적의 정보를 떠올렸다.
초인 탁세현. SSG 국장 이윤성이 취합해 건네준 정보였다. 공간계 특성을 보유했고, 검술에 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공간계 특성 플래시(Flash). 섬광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사실상 순간 이동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라고 했다. 거기에 레벨 8의 마나를 실어낸 위력적인 검까지.
무림으로 치면 절세의 신법에 쾌검과 중검을 동시에 구사하는 화경의 검객이라 볼 수 있을 듯했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무림에서 상대했던 고수들 가운데도 비슷한 유형을 찾기 힘들었다.
‘소멸기를 발동할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은데···.’
굳이 방법을 찾자면 협공이었다. 마철진이나 최금강을 앞세워 겨루게 한 뒤 기습적으로 소멸기를 작렬시키는 전술.
하지만 마철진이나 최금강이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자 상대하거나 다른 파트너를 구해야 했다.
‘누가 있으려나···.’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유지연이 어울릴 것 같기도 했지만, 가당치 않았다. 이런 일에 끌어들일 순 없었다. 순탄하게 초인의 길을 가야 할 아이였다.
그럼 누구?
헛웃음과 함께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도움을 청한다고 했었지? 어떤 도움일까? 탁세현에 대해 감정도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뭔가 비장의 수단을 마련해두지 않았을까?“
이제는 사라진 신화그룹의 승부사, 이자걸을 만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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